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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은 ‘귀태’라기보다 ‘모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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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은 ‘귀태’라기보다 ‘모태’가 아닐까

입력
2016.04.14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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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만주국, 박정희는 양면적”이라는 한석정 교수.
“일제, 만주국, 박정희는 양면적”이라는 한석정 교수.

귀태(鬼胎). 시바 료타로가 만든 이 단어를 야당 의원이 썼다가 대변인직을 내놔야 했다지만, 애당초 이 단어를 소개한 강상중 전 도쿄대 교수의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책과함께)는 만주국을 한일 양국 우익세력의 뿌리로 지목했다는 점에서 주목 받았다.

한석정 동아대 사회학과 교수의 ‘만주 모던’(문학과지성사)은 이 귀태에 대한 분석을 더 세게 밀고 나간 연구서다. 박정희 시대를 상징하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 국토개발, 반공대회, 대량전단살포, 표어 제작, 주민 점호, 국민교육헌장, 재건국민운동, 울산공업단지 조성 등이 모두 만주국 모델을 본 딴 것이다.

만주국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가 세운 괴뢰정부다. 이후 만주국에서는 새로운 도시 건설 등 근대적인 그 무엇의 향연이 벌어진다. 만주국의 표어는 일본인ㆍ조선인ㆍ한인ㆍ만주인ㆍ몽골인 다섯 민족이 합심하자는 오족협화였다. 이 대목에서 근대민족국가를 ‘상상의 공동체’라고 한 베네딕트 앤더슨이 원래 다민족 국가인 인도네시아 연구자라는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다양한 민족을 한데 아울러 하나의 국민으로 상상하게 만드는 것, 그게 근대민족국가라면 만주국은 좋은 연구 대상이자 표본이다. 한 교수가 만주를 연구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박정희(오른쪽) 대통령과 기시 노부스케 전 일본 총리의 1977년 청와대 회동. 두 사람은 만주국의 경험을 한일 양국에 적용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정희(오른쪽) 대통령과 기시 노부스케 전 일본 총리의 1977년 청와대 회동. 두 사람은 만주국의 경험을 한일 양국에 적용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래서 한 교수는 만주국을 ‘귀태’보다는 ‘모태(母胎)’쪽으로 본다. 항일 내셔널리즘의 시선 아래 ‘말 달리던 선구자’만 기억되는 만주국이 아니라 근대민족국가 욕망의 분출구로서 만주국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이는 불편한 기억을 불러낸다. 일제에 탄압받던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에 이어 2등 국민으로서 제국의 혜택을 누리는 조선인의 얼굴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한 교수는 책에서 이 얼굴을 그려냈다.

-1930년대 만주국 경험과 1960년대 박정희의 경제개발을 연결 지었다. 그렇다면 이승만 시대 평가가 궁금하다. 박정희 시대 성장을 이승만 시기 미국식 테크노크라트들이 주도했다는 해석이 있어서다.

“이승만 시기 미국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었던 것은 맞다. 장도영 참모총장도 친미파였고, 4ㆍ19 뒤 총리한 장면도 한동안 미국측 인사들 만나기 좋다는 이유로 조선호텔을 집무실로 쓸 정도였다. 그러나 정보부를 두고 무시무시한 철권 통치를 자행한 박정희와 비교했을 때 관료, 상비군 등 국가의 운용 능력 측면에서 허술하기 짝이 없다. 이승만정부가 한 게 뭐가 있나.”

-그래도 그 시절 미국식 교육을 받은 테크노크라트에 주목해야 한다는 해석이 있다.

“설사 그렇다손 치더라도 만주국 경험이 그대로 증발해버렸다고 보긴 어렵다. 우선 박정희를 비롯, 정권 자체를 만주국 인사들이 주도했다. 또 미국이 돈 주고 교육시켜주고 한 수많은 나라 중에 실제 일어서는데 성공한 나라는 한국뿐이다. 한국만의 방식이 있었다는 의미인데, 그 방식이 바로 박정희의 만주국 경험이라고 본다.”

-근대라면 인간 해방의 측면이 있는데 일제나 박정희 시기의 근대는 그런 측면이 없다. 그래서 왜곡된 근대 아니냐는 시선도 많다.

“그게 참 합의가 어려운 사안인데, 난 근대를 중립적 용어로 쓰자는 쪽이다. 일제 식민지배가 한국 근대화에 도움됐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은 근대를 폼 나고 좋은 것이라 전제해 놓고 시작한다. 그러나 나는 해방도 해주고 발전도 시켜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억압도 하는 양날의 칼이라 본다. 거기에다 서구 근대는 일본 근대로 번역된 뒤 다시 한국, 대만, 싱가포르로 퍼져나갔다. 이들 국가에서는 민주주의의 전면적 유보, 개발제일주의, 속도전, 압도적인 국가폭력 같은 것들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게 바로 동아시아 근대라고 본다.”

1930년대 만주 다롄 중앙 대광장을 그린 엽서. 일제는 허허벌판 만주에서 근대적 도시공간 창출을 실험했고 이런 개발 청사진은 한국으로 이어졌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1930년대 만주 다롄 중앙 대광장을 그린 엽서. 일제는 허허벌판 만주에서 근대적 도시공간 창출을 실험했고 이런 개발 청사진은 한국으로 이어졌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일제와 박정희 시기 평가는 여전히 뜨거운 논쟁거리다.

“일제는 나쁘다, 만주국은 괴뢰국이다, 박정희는 나빴다라고 결론을 다 내려버리면 아무것도 할 게 없다. 그보다는 일제, 만주국, 박정희라는 것들이 얼마나 양면적이고 복합적이었느냐를 보자는 것이다.”

-‘귀태’라는 표현을 어떻게 생각하나.

“학문적 용어로 쓰기엔 너무 자극적인 표현이라 본다. 박정희는 산업화를 위해 기시의 만주국 노하우가 필요했고 그걸 적극적으로 배웠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한국에서 잘 먹혀 들어갔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면 한국 산업화는 일본 우익 덕이냐면 그건 또 아니다. 앞서 말한 미국 원조처럼, 결국 일어서는 건 우리의 힘인 거다.”

-현대 중국 연구에서 만주 연구로 빨려 들어갔다. 계기가 있었나.

“미국 시카고대에서 만난 스승 프라센짓 두아라의 영향이 크다. 탈민족의 시선으로 연구를 해나가다 단순히 괴뢰국이라고만 볼 수 없는 만주국만의 매력에 빠졌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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