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조원일 기자

등록 : 2016.03.12 11:00

바바리맨도 알고 있을까 ‘성범죄와 경범죄 사이’

등록 : 2016.03.12 11:00

영화 ‘몽정기2'에서 여학생들 앞에 바바리맨이 출현한 장면.

영화 ‘몽정기2'에서 여학생들 앞에 바바리맨이 출현한 장면.

여학교 주변이나 으슥한 골목에서 지나가는 여성들에게 성기를 노출하는 이른바 ‘바바리맨’에 대한 처벌은 법조계의 오랜 난제 중 하나입니다.

사회 풍속을 해친 경범죄로 볼 것인지 여성에게 실질적 피해를 안긴 성범죄자로 볼 것인지 기준이 애매하기 때문입니다. ‘응답하라 1988’에서 친구들에게 바바리맨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을 가지던 덕선이가 막상 마주친 후 털썩 주저앉아 오열하는 모습처럼, 큰 충격을 받았다는 피해자들의 경험이 많지만 상당수가 그저 경범죄자로 처벌을 받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바바리맨에게 적용되는 조항은 공연음란죄(1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로, 음란행위를 통한 건전한 성풍속을 해친 데 따른 처벌입니다. 강제추행죄(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는 가해자가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했을 때 적용되며 형량이 훨씬 높습니다.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 입증 요건에 대해 대법원은 “폭행 또는 협박을 가하여 사람을 추행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으로서 그 폭행 또는 협박이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여야 한다고 밝히고 있는데, 여기서 바바리맨에 대한 처벌의 공백이 발생합니다. 바바리맨이 덕선이에게 심리적 피해를 안긴 것은 분명해 보이나 폭력이나 협박이 없었기 때문에 강제추행 혐의로 처벌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관련 사건들에 대한 판결을 보면 바바리맨이 출몰한 장소나 일부 행위의 차이로 처벌 수위가 크게 달라집니다.

강모(당시 46세)씨는 2010년 10월 11일 오후 8시쯤, 부산 동래구의 한 식당 앞에 세워져 있는 차량들 사이에서 피해자 A(당시 46세)씨에게 “죽이겠다”며 폭언과 욕설을 하고 자신의 바지를 벗어 보인 혐의(강제추행)로 기소됐습니다. 강씨에게는 출동한 경찰을 폭행한 혐의(공무집행방해)도 추가됐습니다.

대법원은 강씨에게 경찰을 때린 혐의에 대해서만 유죄를 인정했습니다. “바지를 벗어 성기를 보여준 것은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강씨가 폭행 또는 협박으로 추행을 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죠. 또 직접적인 신체접촉이 없었고, 강씨가 피해자를 강제로 끌고 간 게 아니라 따라간 것이라는 점 등을 추가 이유로 들었습니다.

피해자 측은 당시 범행이 차량 사이 협소한 공간에서 이뤄진 만큼 피해자가 느꼈을 공포가 더 컸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공개된 장소에서 피해자가 외면하거나 도망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봤습니다.

대조적으로 바바리맨의 범행 공간이 개방된 곳이 아닐 경우 공연음란죄가 아닌 강제추행죄가 적용돼야 한다는 법원의 판결도 있습니다. 김모씨는 2008년 9월 광주의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피해자 C씨와 함께 타 그 앞에서 자위행위를 한 혐의(공연음란) 등으로 기소됐습니다. 절도 등 김씨의 다른 혐의는 대부분 유죄를 선고 받았지만 공연음란 혐의는 대법원까지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1심 재판부는 김씨가 C씨의 ‘탈출’을 막았으므로 검찰이 강제추행죄를 적용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검찰은 “폭행과 협박이 없으면 강제추행이 아니다”며 강하게 반발하기도 했습니다.

대법원. 한국일보 자료사진

최근 대법원은 13세 미만의 아동에게 엘리베이터 안에서 성기를 보여준 혐의에 대해서는피해자를 가로막거나 신체접촉이 없었다 하더라도 강제추행 혐의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2010년 9월 전주의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귀가하던 피해자 D양 앞에서 자위행위를 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채모씨는 원심에서 함께 기소된 다른 혐의에 대해서만 유죄를 인정받고 D양에 대한 혐의는 무죄 판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대법원은 엘리베이터라는 폐쇄적 공간의 특성을 인정해 “위력에 의한 추행에 해당한다”며 원심 판결을 깼습니다.

그 밖에도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여성의 옷에 분비물을 묻힌 바바리맨에게 공연음란 혐의가 아닌 강제추행 혐의를 유죄로 인정한 사례도 있습니다. 그만큼 바바리맨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바바리맨의 노출 이외에 다른 세부 기준을 중심으로 강제추행 성립 여부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신진희 성폭력피해자 전담 국선변호사는 “피의자의 노출 자체보다는 장소, 언행 등 다른 구체적 상황에 따라 강제추행죄 유ㆍ무죄가 크게 달라진다”며 “과거 바바리맨은 여학교 주변에 출몰하면서 우스갯소리로 치부되기도 했지만 어두운 골목길 등에서 혼자인 여성을 노리는 경우가 느는 만큼 피해자를 추적하는 행위도 강제추행 혐의 인정에 중요하게 적용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조원일기자 callme11@hankookilbo.com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국일보 페이스북

한국일보 트위터

한국일보닷컴 전체기사 RSS

RSS

한국일보닷컴 모바일 앱 다운받기

앱스토어구글스토어

한국일보닷컴 서비스 전체보기

Go

뉴스 NOW

이전

  • 종합
  • 정치
  • 사회
  • 경제
  • 국제
  • 문화
  • 연예
  • 라이프
  • 스포츠

다음

김정은, 국군 의장대 사열 받는다
[단독] 이명희 항공안전 무시한 참견 “왜 남이 화장실 가는 모습 보게 해”
이헌수 “1억 돈가방, 최경환 집무실에 두고 왔다”
“영수증에 찍힌 ‘갑질’ 조현아”… 소비자 불매운동 조짐
PD수첩 ‘총무원장 3대 의혹’ 방송 예고… 조계종 “음해 땐 MBC 사장 퇴진운동”
조총련계 학자 “북한, 완성된 핵무기 보유 뜻 암시”
비핵화ㆍ종전선언 이어 남북 연락사무소 설치도 논의

오늘의 사진

많이 본 뉴스

  • 1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