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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의 제5원소] ‘친박’이라는 사이비 과학

입력
2017.03.14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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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을 대상으로 대중과학 강연을 하다 보면 이른바 재야 과학자를 만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의 ‘이론’을 책자나 문건을 보내기도 하고 장문의 이메일로 보내는 경우도 있다. 재야 이론의 종류도 참 다양하다. 상대성이론이 틀렸다거나 우주의 암흑 에너지 문제를 해결했다는 주장도 심심찮게 보인다.

이분들의 주장 대부분은 과학이론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굳이 말하자면 사이비 과학이다. 재야과학자들의 다양한 이론 속에는 이들 이론이 사이비 과학이라고 판정할 수밖에 없는 공통적인 요소가 몇몇 있다.

첫째, 개념 해석이 자의적이다. 에너지, 운동량 같은 기본적인 물리량에서부터 “우주가 가속 팽창한다”는 식의 명제에 이르기까지 제도권 과학에서는 그 개념이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정의돼 있다. 많은 재야과학자들은 공식적 개념 정의를 잘 모르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해 버린다. 과학용어는 일상 언어와 비슷해 보일지라도 정의되는 방식이 따로 있다. 그것을 무시하고 자신의 일상 대화에서 쓰는 용법으로 과학용어를 해석해 버리면 기본적인 대화나 정상적인 의사소통조차 이루어지지 않는다.

둘째, 내적 일관성이 없다. 예를 들면, 상대성이론이 틀렸다는 재야이론의 상당수는 광속불변의 원리를 잘못 적용하고 있다. 광속불변이란 관측자들 사이의 상대적인 운동에 전혀 상관없이 빛은 항상 일정한 속도로만 진행한다는 가정이다. 달리는 자동차에서 나오는 빛은 정지한 자동차에서 나오는 빛과 마찬가지로 광속으로 진행한다. 이는 우리의 일상경험과 맞지 않는다. 그래서 일관되게 광속불변을 적용할 때 심리적 장애가 생긴다. 많은 재야과학자들이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잘못된 결론을 도출한다.

셋째, 확립된 사실들을 무시한다.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이 틀렸다면 지난 100여 년 동안 두 이론을 지지하는 무수한 실험적 결과들을 어떻게든 설명을 해야 한다. 대부분의 재야 과학자들은 지난 세월 동안 수많은 검증을 통해 확립된 사실들을 무시하는 반면 지엽적이거나 검증되지 않은 한두 현상에 집착하곤 한다. 예를 들면 지난 2009년 초광속으로 비행하는 입자를 관측했다는 과학자들의 발표는 이후 컴퓨터에 연결되는 광케이블의 접속불량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판명됐으나, 일부 재야과학자는 아직도 이 잘못된 데이터를 신봉하고 있다. 신봉의 이면에는 음모론이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헌법재판소의 ‘2016헌나1’ 사건을 대하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른바 친박 단체들의 모습을 보면 사이비 과학의 전형적인 세 요소가 눈에 들어온다. 먼저 박 전 대통령은 최순실에 의한 국정농단이 권력남용이라는 개념도, 그것이 대통령을 탄핵할 만큼 중대한 법 위반이라는 죄의식조차도 없어 보인다. 어려울 때 도와 준 사람을 가까이 두는 게 뭐가 잘못이냐, 최순실에 속았을 뿐이다, 등등의 주장은 자의적 개념해석의 사례이다. 친박 인사들이 계속 문제 삼고 있는 태블릿 PC의 경우, 이 태블릿이 최순실 소유임은 내용물과 위치정보, 핵심 증인의 증언 등을 통해 이미 검찰과 특검 수사에서 확립된 팩트이다. 확립된 팩트를 부정하려면 합당한 논리적 물질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합리적 의심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아쉽게도 친박 인사들 주장의 근거는 음모론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지난 3월10일, 헌법재판소의 역사적인 현직 대통령 탄핵안 인용 판결이 나온 뒤에는 친박 단체들이 공공연하게 이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틀 넘게 침묵하던 박 전 대통령은 청와대를 나와 자기 집으로 돌아가면서 사실상의 불복 메시지를 남겼다. 지난 2004년 헌법재판소가 세종시 수도이전 관련 판결을 내리자 “헌재의 결정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곧 헌법을 존중하지 않는 것으로 이것은 헌법에 대한 도전이자 체제에 대한 부정”이라고 말한 바 있다. 법치주의의 일관성을 찾아볼 수 없는 전형적인 이중잣대이다.

재야 과학자가 사이비 과학을 연구하든 말든 그것은 개인 사생활일 뿐이다. 하지만 사이비 과학으로 사회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21세기가 되어서도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영구동력기관 발명’이니 ‘세계 과학사를 새로 쓸 이론’이니 하는 사이비 과학이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때로는 사람과 자금을 끌어 모으기도 한다. 그나마 사이비 과학은 객관적인 검증을 통해 퇴치하거나 바로잡을 가능성이 많은 편이다.

사이비 과학에서 빠져 나오는 한 가지 방법은 당연하다고 생각해 온 전제들과 팩트들을 한 번씩 의심해 보는 것이다. 친박 인사들의 주장을 듣다 보면 암묵적으로 이들이 가정하고 있는 엄청난 대전제 하나를 찾을 수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무오류성이다. ‘우리 대통령이 그럴 리가 없다,’ ‘역사상 가장 청렴한 분이다.’는 명제는 신성불가침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위대한 천문학 혁명은 단지 지구와 태양의 위치를 바꾸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2016헌나1’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그분의 무오류성만 포기하면 음모론이나 가짜뉴스에 기대지 않아도 된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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