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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감시와 저항의 사소한 기록

입력
2016.12.12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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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미닫이문 유리창 너머로 가게 안을 한참 들여다본다. 세 벽면을 메우고 있는 선반마다 빨갛고 파란 표지의 만화책들이 가득하다.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킨다. 선반 바로 아래 아이들이 어깨를 맞대고 앉아 있다. 검고 동그란 머리통들이 펼쳐진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책가방들은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팽개쳐 있다.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백 원짜리 동전을 만져본다. 그 돈이면 만화책을 실컷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묵 꼬치 한 개쯤 주전부리도 할 수 있다. 마음을 굳게 먹고 문을 밀고 들어가려다 그만둔다. 들어가고 싶기도 하고 왠지 무섭기도 하다. 두 마음이 부딪치며 서로를 밀쳐낸다. 몸을 돌려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가 보지만 되돌아와 다시 가게 앞을 얼쩡거린다.

꿈속에서 늘 찾아가는 골목이 있다. 어린 시절 학교가 끝나면 터덜터덜 걸어서 돌아오던 길. 문방구와 수예점과 또 무엇을 파는지 알 수 없는 이런저런 가게들을 지나서 개천을 따라 걷는다. 저 멀리 마치 감옥소처럼 보이는 가발공장이 나타나기 직전 만홧가게가 있다. 이를테면 만화책은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쫀드기나 아폴로 같은 불량과자 정도로 나쁜 것이다. 이불 속에 숨겨두고 보아야 할 것, 어머니의 회초리를 부르는 것, 쓸데없이 돈을 낭비한다는 잔소리를 듣게 하는 것. 하지만 나는 금지된 것일수록 더 달콤하다는 사실을 이미 터득한 사람. 밥을 먹고 학교에 가고 숙제를 하고 양치질을 하는 것 같은 지루한 일상이 제거된 세상, 예쁘고 특별한 사람이 되어 우연과 행운과 모험을 끊임없이 경험할 수 있는 그 신나는 세상 속으로 빠져들지 않을 재주가 있을까.

1970년대 중반의 어느 겨울날. 나는 드디어 호기롭게 만홧가게 문을 밀고 들어간다. 가게 안은 생각보다 좁고 어둡다. 꾀죄죄한 옷차림에 비가 오면 책가방을 머리에 이고 달려갈 법한 더벅머리 남자애들뿐이다. 깔끔하고 순해 보이는 여자애들은 별로 없다. 공기 속을 떠도는 냄새도 수상하다. 검은색 고무줄 뒤에 세워져 있는 만화책들을 머뭇거리며 둘러본다. 긴 머리카락에 눈망울이 커다란 소녀가 나오는 순정만화를 집어 든다. 좁고 긴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책 속으로 빠져든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주인공이 제분소에 들어가 하얗게 날리는 밀가루와 기계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기억을 되살리는 결정적 순간,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들어보니, 가게의 미닫이문이 열려 있고, 문밖 길 위에서 어머니가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나를 바라보며 서 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저 문이 왜 열려 있는 거지.

그 날 나는 어머니의 눈길을 외면했다. 내가 아닌 다른 아이를 보고 어머니가 착각한 것이라고 아무렇게나 생각하려 했다. 그 짧은 순간 어쩌면 정말로 나는 내가 아니라고 믿었는지 모른다. 나는 당신의 딸이 아니에요. 나를 그런 이름으로 부르거나 나무라지 마세요. 나는 당신이 아는 그 누군가가 아니라고요. 내가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는지, 여기서 어떤 시간을 누리고 있는지 잘 알지도 못하잖아요. 마음속으로 항변하면서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누런 갱지 위에 잉크가 번진 듯 조악하게 인쇄된 그림들을 의연하게 들여다보려 애썼다. 얘, 너 거기서 뭐 해? 빨리 안 나와? 어머니의 목소리가 커졌고 더 격앙되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아이들이 몇몇이 밖을 내다보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집요한 눈빛으로 나를 다그치는 어머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게 가운데 놓인 난로 위에서 끓고 있던 주전자 뚜껑이 들썩였다. 반쯤 열려있는 미닫이문의 유리창에 하얗게 김이 서렸다. 그래도 나는 꼼짝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나라는 것이 억울하다는 느낌이 밀려왔다. 누군가가 일어나 가게 문을 닫았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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