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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 들어가, 배우 나와” 연극계 ‘집단지성’ 공동창작이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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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 들어가, 배우 나와” 연극계 ‘집단지성’ 공동창작이 뜬다

입력
2016.03.24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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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 고선웅이 국립극단 단원들과 함께 만든 신작 '한국인의 초상'. 국립극단 제공
연출가 고선웅이 국립극단 단원들과 함께 만든 신작 '한국인의 초상'. 국립극단 제공

대학로 가장 핫한 연출가인 고선웅의 신작 ‘한국인의 초상’(28일까지 국립극단 소극장 판)은 제목처럼 오늘날 한국인의 모습을 모자이크처럼 엮어낸 연극이다. 미디어 보도와 12명의 출연 배우, 배우와 제작진들의 주변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형식의 27개 에피소드로 정리했다. 또 하나의 화제거리는 걸출한 연출가와 국립극단 배우들이 ‘공동창작’ 방식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대본을 쓴 고선웅 연출가는 “한국인의 천태만상을 저 혼자 쓰면 대표성을 담보하기 어렵고 수십 명이 합의해서 이야기를 만드는 게 효율적이라는 생각했다”고 말했다. 대표성을 확보하기 위해 배우를 캐스팅할 때도 20~60대 배우 12명을 나이와 성비까지 맞춰가며 뽑았다. 고 연출가가 경기도립극단 예술감독 시절 발표한 ‘늙어가는 기술’(2012), 극단 마방진에서 올린 ‘팔인’(2008) 역시 공동창작 방식으로 만든 작품이다.

“연출이 방향을 정해주는 것보다 진이 몇 배는 더 빠지는” 공동창작이 연극계 트렌드로 뜨고 있다. 고 연출가를 비롯해 윤한솔, 이경성, 박지혜 등 실험적인 형식으로 각종 연극상을 휩쓸고 있는 연출가들이 배우, 스태프와 공동창작을 통해 작품을 내놓고 있다. 중견 연출가 이성열이 이끄는 극단 백수광부 역시 창단 20주년 기념 공연 ‘햄릿아비’(4월 8일~17일 동숭동 SH아트홀)를 공동창작으로 제작 중이다.

남윤일 두산아트센터 PD는 “최근 십수년간 국내외에서 ‘포스트 드라마 시어터’(탈 희곡적 연극)가 유행하면서 이 중 한 장르인 공동창작이 주목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백수광부를 제외하면, 이 연출가들의 극단이 결성한 것은 대략 2005년(마방진)에서 2008년(양손프로젝트) 사이다. 이들 극단이 출세작들을 내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이들 극단의 전매 특허 기술인 공동창작도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공동창작이라는 단일 카테고리에 묶이지만 ‘창작 실전’에 돌입하면 연출가 취향에 따라 공동창작 방식도 다양하게 갈라진다.

우선 ‘고선웅 스타일’은 배우와 스태프 호구 조사에서 시작한다. “몇 살이냐, 연기하기 전에는 뭐한 거냐, 어디서 태어났고 부모님은 뭐하시냐, 이런 족보 따지면서 살아온 얘기를 하다 보면 개인의 역사가 만들어지잖아요. 그게 모이면 한국이죠.”호구 조사가 끝나면 각종 뉴스에서 본 사건 사고를 던져주고 상황극을 만든다. 고 연출가는 “상황극이 잘 흘러가면 녹음해 기록하고, 잘 안 흘러가면 제가 가이드라인을 준다. 그 기록을 모아서 한두 달 연습해도 지루하지 않게 ‘무대 언어’로 가공한다”고 설명했다.

극단 ‘크리에이티브 바퀴’가 함께 만든 연극 '비포 애프터' 한 장면. 두산아트센터 제공
극단 ‘크리에이티브 바퀴’가 함께 만든 연극 '비포 애프터' 한 장면. 두산아트센터 제공

반면 ‘이경성(극단 ‘크리에이티브 바퀴’ 연출가) 스타일’은 배우, 스태프들과 본격 창작에 앞서 ‘학습’을 강조한다. 지난해 무대에 올린 ‘비포 애프터’를 만들기 전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비롯해 ‘세월호를 기록하다’ 등 5권의 책을 읽고 단원들과 발제, 토론을 이어갔다. 이 토론을 바탕으로 주제를 선정한 다음 소재를 ‘세월호’로 정했고, 배우들이 각자 맡은 역할의 대사를 썼다. 물론 최종적으로 조율하는 이는 이경성 연출가다. 사전 공부와 실제 창작에 쓰이는 시간 비율은 절반씩으로, 한 작품 만드는데 짧게는 석 달, 길게는 6개월이 걸린다. 이 연출가는 “우리가 포착한 현상이나 주제에 대해 각자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차이점은 뭔지를 연극이란 공간으로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에” 공동창작이란 형식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단원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하는 순간 이 극단의 작품은 사실상 시작되는 셈이다. 무대에 오른 공연은 연극의 일부이고, 공연 내용을 소개한 프로그램 북은 연극의 마침표 격이다.

극단 ‘양손프로젝트’가 지난해 선보인 연극 '폭스 파인더'. 두산아트센터 제공
극단 ‘양손프로젝트’가 지난해 선보인 연극 '폭스 파인더'. 두산아트센터 제공

‘박지혜(극단 ‘양손프로젝트’ 연출가) 스타일’은 앞의 두 연출가 스타일의 중간 지점에 있다. 연출가나 배우 구분 없이 각자 아이디어를 내고 즉흥연기를 통해 장면을 구성한다. 장면이 어느 정도 구체화되면 박 연출가가 대표집필하고 배우들은 연기에 몰입한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창작극을 발표하거나 외국 희곡을 자주 공연으로 만들기도 하는데, 원작이나 대본을 선정할 때 배우들과 ‘토론’하는 시간이 전체 제작의 절반을 차지한다. 배우들이 각자 맡은 역할의 대사를 번역한다. 단어 하나 선택할 때도 단원들간 치열한 논쟁도 주고 받는다.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이런 공동창작은 짧게는 석 달에서 길게는 1년여가 걸린다. 보통 연극 초연에 6주에서 8주 정도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두 배 이상 시간을 들이는 셈이다. 끈끈한 유대감을 가진 소수 정예 극단이 아니면 시도하기 어렵다. 남윤일 PD는 “인건비가 그만큼 늘기 때문에 제작비도 같은 규모의 연극에 비해서는 30%가량 더 든다”고 말했다. 이경성ㆍ박지혜 연출은 “인건비는 공동창작 연극에서 가장 중요하다. 비용을 줄일 때는 우선 무대 비용을 줄이기 때문에 미니멀리즘이 될 수 밖에 없다”고 농을 던졌다. 넘치는 아이디어를 어떻게 묶을 것인가도 관건이다. 자칫 아이디어는 좋은데 산만해지기 쉽다. 작품성, 흥행성에서 기복이 심한 것도 단점 중 하나다.

그럼에도 공동창작에서 손떼기 어려운 이유는 뭘까. 연출가들은“합의가 될 때까지 싸워” 만든 작품이라 그만큼 공감대 형성이 쉽다고 입을 모았다. 고선웅 연출가는 “혼자 작품을 만들 때보다 훨씬 생생하다”고 말했다. 여러 아이디어를 모아 다양한 형식을 시도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이경성 연출가는 “다양한 연극을 실험적으로 선보일 수 있는 플랫폼이 구축된 것도 공동창작이 늘어난 이유”라고 말했다.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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