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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의 제5원소] 국민의 이름으로 종전을 선언하자

입력
2018.05.08 11:03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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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기 개발의 역사는 과학사 시간에 꼭 다루고 싶은 참 매력적인 주제이다. 최초의 핵무기 실험이었던 1945년 7월16일의 트리니티 실험을 얘기하다 보면 바로 그 다음날부터 시작된 포츠담 회담을 지나칠 수가 없다. 포츠담 회담은 아직도 나에게 카이로 회담, 얄타 회담과 함께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국제회담 3종 세트로 기억돼 있다. 학창시절 1점이라도 점수를 더 받기 위해서 국사시간에 죽어라고 외웠던 이 국제회담들에 대한 기억이 유쾌할 리는 없다. 왜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 회담에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을까, 왜 우리는 패전국도 아닌데 분단과 내전의 비극을 겪어야만 했을까, 그런 생각들이 버무려져 내 기억의 상자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을 뿐이다. 핵무기 개발 역사의 맨 끝에 북한 핵이 있다는 사실 또한 유쾌하지 못하다.

그때 그렇게 힘 있는 나라들끼리 우리의 운명을 재단해 버린 지 70년도 더 지난 2018년, 우리는 이 지긋지긋한 역사의 멍에를 벗어 던질 절호의 시기를 관통하고 있다. 4ㆍ27 정상회담과 그 결과로 나온 판문점 선언은 모든 장면과 모든 문구가 의미 있고 인상적이었지만 내가 가장 가슴 뭉클했던 장면은 두 정상이 이제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다고 선언하는 모습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작년 4월 대통령 후보였을 때 한반도 군사긴장이 고조되자 “주변국들은 한국 대통령 궐위 상황을 이용해 한국을 배제하고 자기들 이해대로 한반도 문제를 처리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며 “모든 것을 걸고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막겠다”고 했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는 8ㆍ15 경축사와 이틀 뒤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거의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때만 해도 2018년 4월의 대반전을 예상한 사람은 문 대통령 본인을 포함해서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북한이 화성15형 미사일을 쏜 것이 작년 11월 말이었다.

더 이상 전쟁은 없다는 선언은 이제 한반도의 운명을 그 일차적인 당사자인 남과 북이 주도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아직 우리의 힘이 많이 미약하긴 해도 4ㆍ27 정상회담과 판문점 선언의 세계적인 파장을 보건대 지금까지 우리의 노력이 결코 헛되지는 않은 듯하다. 국사교과서에 나오던 국제회담 3종 세트 시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 그보다 훨씬 전인 구한말까지 거슬러 따져본다면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이렇게 주도적으로 개척해 나가면서 세계 여론을 선도했던 적은 아마도 역사상 처음이 아닐까 싶다. 이런 면에서도 우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전인미답의 신세계로 들어서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알듯이 4ㆍ27 선언은 시작에 불과하다. 곧 예정된 북미 정상회담과 남북미(중) 정상회담은 아마도 21세기의 한반도 운명을 결정지을 ‘신 3종 세트’로 역사책에 기록될 것이 분명하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한반도는 새로운 평화체제로 돌입할 수도, 다시 전쟁의 공포가 휘몰아치는 냉전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지금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디로 힘을 모으느냐에 따라 향후 한반도 100년의 역사가 바뀐다. 미국은 북한에 대해 완전하고(Complete) 검증가능하며(Verifiable) 되돌릴 수 없는(Irreversible) 핵 폐기(Dismantlement)라는 뜻의 이른바 CVID를 요구하고 있고(최근에는 C 대신 Permanent를 요구하고 있다), 이에 맞서 북한은 체제보장(Guarantee)을 뜻하는 CVIG를 내세우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평화(Peace), 즉 CVIP이다. CVID나 CVIG에서 중요한 점은 정부 간 신뢰와 약속이라면 CVIP에는 더욱 중요한 요소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이 땅에서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우리들의 의지와 열망이다. 항구적인 평화는 힘 있는 나라의 약속만으로, 국가들 사이의 조약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는 평화를 향한 마지막 퍼즐은 우리 자신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제안한다. 우리가 종전을 선언하자. 남북한 정상과 강대국 정상만의 종전선언 말고, 여기 살고 있는 우리 한 명 한 명이 종전을 선언하자. 이제야 한국전쟁이 끝났음을, 앞으로 다시는 여기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그리고 한반도 평화의 새 시대가 열렸음을, 이렇게 찾아온 한반도의 새봄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음을 5,000만의 이름으로, 8,000만의 이름으로 선언하자. 김정은이든 트럼프든, 누구도 이 역사의 대세를 거스를 수 없음을 만천하에 공표하자. 이것이야말로 다가오는 북미 정상회담을 성공시킬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그래서 우리 후손들은 훗날 국사교과서에서 2018년 어느 봄날 자신의 선조들이 위대한 역사의 새 여정을 그 누구도 아닌 당사자의 손으로 열어젖혔음을 자랑스럽게 배울 수 있기를, 그렇게 펼쳐진 새 시대의 한반도에서 세계 인류 평화의 새로운 이정표를 이어 나가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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