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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만의 무대' 류승범, 수컷의 삶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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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만의 무대' 류승범, 수컷의 삶을 그리다

입력
2017.01.19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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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폭력 조직의 ‘보스’인 젊은 남자 장정(류승범)이 검을 빼고 있다. 힘있는 가장을 꿈꾸는 그에게 검은 강한 남자의 힘을 상징한다. 뉴시스
조그만 폭력 조직의 ‘보스’인 젊은 남자 장정(류승범)이 검을 빼고 있다. 힘있는 가장을 꿈꾸는 그에게 검은 강한 남자의 힘을 상징한다. 뉴시스

조광화 연출가 데뷔 20주년 기념

손병호ㆍ김뢰하 등 출연 배우 쟁쟁

조폭 보스 주인공을 맡은 류승범

“희곡 읽으며 무대 설 용기냈다”

“존경 받는 가장! 그기 내 꿈이여~”

연습실에 올려 퍼지는 사투리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대부가 그러니까 보스지라, 왕초제(왕초이지)”라며 영화 ‘대부’의 주인공 알 파치노를 롤모델이라고 말하는 이의 얼굴이 낯익다. 14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온 배우 류승범. 노름에 빠져 가정폭력을 일삼는 아버지에게는 거칠게 대항하고, 자폐가 있는 막내 여동생에게는 다정하게 말을 건네며 강과 약을 오가는 그의 노련한 연기가 스크린 속과 다르지 않다.

19일 서울 종로구 CJ아지트에서 13년 만에 무대에 오르는 연극 ‘남자충동’ 기자간담회와 시연회가 열렸다. 조광화 연출가의 데뷔 2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조광화 전(展)’의 첫 작품이다. ‘남자충동’이 13년 만에 재연된다는 점에서, 손병호 김뢰하 황정민 등 연극과 영화에서 오랜 이력을 쌓은 쟁쟁한 배우들이 자리를 함께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류승범의 연극 복귀작이고 점 때문에 막이 오르기 전부터 시선을 끌었다.

류승범은 배우 박해수와 함께 주인공 장정역을 맡았다. 아버지의 친구들이 술병을 듣고 찾아오는 장정의 집은 이들로 인해 늘 화투 판이 펼쳐져 있다. 장정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피해 숨었던 벽장 바닥 밑에서 발견한 일본도의 서슬 퍼런 날을 내보이며 아버지를 찌르고 싶었던 충동을 말한다. 형이 이끄는 ‘조직’에서 함께 일하고 싶다는 남동생의 손에는 칼을 갖다 대며 “가서 베이스나 치라”고 쫓아낸다. 장정은 줄곧 심상치 않은 표정과 목소리로 “진짜 가장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몸을 사리지 않고 연기한 배우들은 시연이 끝나자 다시 “형, 동생” 사이로 돌아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류승범은 조광 연출가와 배우들에게 “나 어떡해. 두 번이나 틀렸다. 진짜 떨린다”고 말하기도 했다.

‘남자충동’은 전남 목포를 배경으로 삼는다. 가부장제라는 틀 속에서 힘 있는 남자, 강한 가장이라는 판타지를 실현하고 싶어하는 수컷들의 사연을 펼친다. 주인공 장정(류승범·박해수)의 아버지(손병호·김뢰하)는 노름에 빠져있다. 자신을 말리는 아내(황영희·황정민)를 때려 가장으로서 위상을 과시하는 문제적 인간이다. 작은 폭력조직의 ‘보스’인 장정은 가족을 지키는 진정한 가장이 되기 위해 힘을 원한다. 자신의 힘을 입증하기 위해 폭력을 수단으로 사용하다 결국 파멸에 이른다. 조 연출가의 연출 데뷔작으로 1997년 초연돼 제34회 백상예술대상 희곡상, 대상 등을 받으며 연극계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장정(류승범)은 아버지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자신만의 남자다움을 지니고 싶어하는 인물이다. 뉴시스
장정(류승범)은 아버지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자신만의 남자다움을 지니고 싶어하는 인물이다. 뉴시스

“가부장 망령은 20년 지났지만 여전…”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조 연출가는 “’남자충동’ 20년 기념으로 다시 무대에 올려보자는 이야기를 하다가 연출 데뷔 20주년으로 수식이 바뀌면서 민망하고 부끄럽다”고 말했다. “오래 전부터 같이 해보자고 했던 두 주연배우(류승범·박해수)와 함께 돼 매우 설레고 기대된다”고 말했다. 한 때 한국 영화계를 휩쓸었던 조폭영화가 등장하기 전 이미 건달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로 연극계 돌풍을 일으켰던 만큼 이 작품을 다시 올리는 데 고민이 컸다. “식상하고 영화를 따라 했다는 오해를 받을까 봐” 재연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고도 했다.

조 연출가는 과거가 아닌 현재를 반영한 ‘남자충동’을 만드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가부장제가 사회전반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나 곳곳에 아직 망령처럼 깃들어 있다는 게 조 연출가의 생각이다. 그는 “아버지의 권위가 줄고 폭력을 쓰는 아버지가 줄어들어 사회적으로 가부장제가 사라졌다는 착시가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며 “특히 최근 사회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의 개발우선주의로 돌아가 개인을 억압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20년 전 장정은 영화 ‘대부’를 보며 남성과 가장에 대한 그릇된 환상을 키웠다. 반면 21세기 이곳에선 부를 향한 탐욕과 승자중심사회가 남성 판타지를 빚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조 연출가는 세기가 바뀌었어도 여전히 헛된 환상과 욕망을 쫓다 스스로 파멸에 이르는 이들로부터 폭력성을 발견한다. 동시에 ‘힘만 쓰다 힘을 얻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역설을 풍자한다. 조 연출가는 “이전보다 폭력 자체는 줄이고 폭력으로 다가가는 마음, 폭력충동에 사로잡힌 이들의 마음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배우 류승범 14년 만에 연극 무대로 부른 ‘남자충동’

20년이 지났지만 작품이 지닌 에너지는 강하다. 류승범은 “희곡을 읽으며 본격적으로 연극 무대에 서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돼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그에겐 2003년 ‘비언소’ 이후 두 번째로 도전하는 연극 무대다. 류승범은 “처음에는 걷고 뛰고 말하는 연극 무대에서 숙지해야 하는 부분들이 많아 개인적으로는 혼란스러운 시간을 겪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배우로서 연극 예술에 참여하는 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웃었다.

류승범과 함께 장정으로 무대에 번갈아 오를 박해수는 SBS드라마 ‘푸른바다의 전설’ 등으로 대중에게 얼굴을 알린 배우다. 조 연출가는 이전부터 류승범과 박해수를 점 찍어 놨다고 했다. 조 연출가는 “장정은 알 파치노처럼 살아야겠다고 단순하게 믿는 등 오늘날에는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면도 있어 유머가 필수”라며 “강함과 부드러움이 동시에 필요한데 두 배우는 제가 딱 원하는 장정이었다”고 말했다.

폭력적인 남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이혼을 선언하는 어머니 박씨 역의 황정민은 초연 때부터 ‘남자충동’과 함께 해왔다. 첫 공연 때부터 작곡가, 세션으로 ‘남자충동’에 힘을 보태 온 황강록 음악감독이 베이스 연주로 극의 분위기를 돋운다. 제작비 등을 감안해 녹음된 반주음악을 사용하라는 권유가 있었으나 배우들의 세세한 감정변화를 선율로 제대로 전하기 라이브를 고수한다. 공연은 2월 16일부터 3월 26일까지. 장소는 서울 대학로 티오엠(TOM) 1관. 1544-1555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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