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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의 제5원소] 개ㆍ돼지 나라의 에어컨 상전

입력
2016.08.19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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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전력시장을 운영하는 전력거래소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실시간 전력수급현황을 알 수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16년 8월 18일 22시 25분 현재 대한민국의 전력공급능력은 9,108만㎾이고 현재부하는 6,986만㎾이다. 전력은 단위 시간당 소요되는 에너지이고, ㎾는 전력의 단위이다. 실제 소비한 에너지 양을 구하려면 전력에다가 소비한 시간을 곱하면 된다.

9,000만㎾라는 전력공급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실감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집 스탠드형 에어컨의 소비전력은 1.8㎾이다. 보통의 벽걸이형 에어컨의 소비전력은 1㎾에 훨씬 못 미친다. 9,000만㎾의 전력이면 5,000만 인구가 1.8㎾짜리 에어컨을 하나씩 돌릴 수 있다. 4인 가족의 가정에서는 가족 네 명이 스탠드 에어컨을 하나씩 총 네 대를 돌릴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생산된 전력으로 에어컨만 돌리는 건 아니다. 지하철도 움직여야 하고 공장도 돌려야 한다. 그렇기는 해도 5,000만 인구 모두가 에어컨 하나씩을 돌릴 수 있는 정도의 전력은 어마어마한 양이다. 아무리 낭비벽이 심한 가정이라도 이런 식으로 여름을 나진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다.

참 이상하지 않은가? 가족 수대로 에어컨을 돌릴 수 있는 나라에서 여름마다 전력난이 예상된다며 각 가정에서 전기를 아껴 쓰자고 하다니. 이런 요구가 제도로 정착된 것이 전기요금 누진제이다. 누진제 폐지나 완화를 반대하는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전력난이다. 그러나 전기요금 부담이 줄어든다고 해서 에어컨 한 대를 돌리던 가정이 에어컨 두 대 이상 돌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애초에 각 가정이 에어컨을 사용하기 전부터 이미 많은 전력을 다른 곳에서 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갖게 된다. 컵에 물을 조금밖에 붓지 않았는데 물이 넘친다면 원래 컵 속에 물이 많이 담겨 있었을 거란 얘기다. 실제 가정용 전력소비 비율은 전체의 13%에 불과하다. 공공ㆍ상업용은 32%, 산업용은 52%로 단연 높다. 이미 많이 알려진 대로 누진제는 가정용에만 적용된다. 요금도 산업용이 훨씬 싸다. 에너지 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에너지를 아껴 쓰는 것은 미덕이다. 하지만 사회 전체가 고루 그 부담을 지지 않는 구조는 옳지 않다.

그렇게 비싼 전기요금을 내는 사람들은 정작 직장에서 오랜 시간 일을 많이 해도 월급이 누진제마냥 폭발적으로 증가하진 않는다. ‘전기요금 폭탄’이 두려운 우리는 에어컨을 상전 모시듯 할 수밖에 없다. 누진제 존속이냐 폐지냐가 핵심이 아니라, 이 나라에서 평범한 국민들이 사람 대접받고 사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한 문제다. 일시적인 전기요금 경감이나 여론에 떠밀린 누진제 졸속 개편은 “이거나 먹고 떨어져. 개ㆍ돼지들아”라고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축으로서 개와 돼지가 하는 일 중엔 특별한 식재료를 찾는 일도 있다. 땅 속에서 독특한 향을 내며 자라는 송로버섯을 찾는 데에 개와 돼지가 동원된다. 지난 11일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신임 지도부 오찬 자리에 올랐다는 송로버섯도 그렇게 채취했는지 모르겠다. 마침 그날 전기요금 제도개선에 관한 얘기가 오갔고 18일에는 당정 태스크포스가 출범했다니 기다려 볼 일이다.

하지만 유례없는 폭염과 경제난, 사드 문제 등으로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국민을 생각했다면 보는 사람이 더울 정도의 복장까지 갖춰 입고 그렇게 비싼 음식을 꼭 먹었어야 했을까 싶다. 전기요금 폭탄이 두려워서 라면 하나 끓일 때도 땀을 뻘뻘 흘려야 하는 평범한 가정집의 사정은 잘 알고 있을지. 주권자로서의 우리는 절대권력으로서의 대통령이라는 송로버섯을 누군가에게 갖다 바치는 개·돼지가 아니다. 대통령은 ‘아랫것’들 사정은 좀 몰라도 되는 상전이 아니다. 상전은 집구석 에어컨만으로도 충분하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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