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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한 노인들의 고통, 100세 시대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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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한 노인들의 고통, 100세 시대의 비극

입력
2016.03.04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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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독거 고령자 수가 600만명에 육박했다. 전기가 끊어진 집에서 걸식하는 수많은 노인들은 “차라리 죽고 싶다”고 말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일본은 독거 고령자 수가 600만명에 육박했다. 전기가 끊어진 집에서 걸식하는 수많은 노인들은 “차라리 죽고 싶다”고 말한다. 게티이미지뱅크

노후파산: 장수의 악몽

NHK스페셜 제작팀 지음ㆍ김정환 옮김

다산북스 발행ㆍ316쪽ㆍ1만5,000원

日 NHK 다큐멘터리 보완한 르포

생활보호 대상 독거 고령자 수백만

불완전 규정에 수혜자 절반도 안 돼

80대 노인 하루 식비 5000원 불과

연금으로 자녀 부양하다 공멸하기도

‘노인 빈곤율 50%’ 한국에도 시사점

“솔직히 말하면 빨리 죽고 싶습니다. 죽어버리면 돈 걱정을 할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누굴 위해서 살고 있는 건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이제 정말 지쳤습니다.”

도쿄 미나토구에 거주하는 83세 다시로 다카시의 하루 식비는 5,000원이다. 약값이나 수도세 등 필수 지출항목을 제외하면 그나마 줄일 수 있는 것이 식비뿐이라 최대한 적게 먹으며 살고 있다. 연금 지급일이 다가올 즈음엔 하루 5,000원도 쓸 수 없어 두 다발에 1,000원짜리 냉국수를 사놓고 아껴 먹는다. 전기는 끊어진 지 오래. 고급 외제차가 즐비한 저택가 맞은편의 낡은 집에서 다시로는 부엌 개수대에서 주방세제를 뿌려 손빨래를 한다.

‘노후파산: 장수의 악몽’은 2013년 11월 일본 NHK에서 방영한 ‘치매환자 800만명 시대’의 후속편이다.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치매 노인들을 찾아 다니던 제작진은 일본 고령자 상당수가 파산 상태라는 것을 알고 이듬해 9월 ‘노인표류사회-‘노후파산’의 현실’을 제작해 내보냈다. 책은 방송에 미처 담지 못했던 노인들의 사연까지 합쳐 새로 쓴 르포르타주다.

노후 파산의 공포는 개미처럼 일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사태가 아니라는 데 있다. 다시로는 젊은 시절 맥주회사에서 일했다. 화려한 긴자 거리 복판에 위치한 회사는 경제사정으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다시로에게 그야말로 폼 나는 직장으로 느껴졌고, 그는 빳빳한 양복을 자랑스러워하며 12년 간 그 회사의 직원으로 일했다. 문제는 40세 이후 자신의 맥줏집을 운영하겠다고 회사를 나오면서부터다. 예금, 퇴직금에 대출 받은 돈까지 부어 차린 맥줏집은 경기 악화로 10년 만에 도산했고 다시로에겐 노후 파산의 악몽이 시작됐다.

그가 받는 연금은 국민연금 최고액인 65만원에 직장 시절 적립한 후생연금을 합쳐 월 100만원 정도다. 독거 고령자의 절반 정도가 연금 수입이 월 100만원에 못 미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언뜻 살 만해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60만원이 집세로 나가고 공과금, 보험료 따위를 납부하고 나면 생활비로 떨어지는 건 20만원이다. 이발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고 이사비가 없어 더 저렴한 집으로 옮길 수도 없다. 병이라도 걸렸다가는 그대로 자리 보전하고 죽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결혼을 하지 않은 다시로는 초라한 사정을 감추느라 가족, 친구와도 거의 연락이 단절된 상태다. 밤이 되면 전기가 끊어져 암흑으로 뒤덮인 방 안에서 그는 건전지로 돌아가는 라디오를 듣는다.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싶은 마음과 이제 그만 사라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끊임없이 교차한다.

일본의 독거 고령자는 현재 600만명에 육박한다. 이중 연수입이 생활보호 수준인 1,200만원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절반 이상이지만 정부로부터 생활보호를 받는 사람은 70만명뿐이다. 이들이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유는 집이나 예금이 있을 경우 생활보호를 신청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이다. 80세의 기무라 사치에는 국민연금으로 나오는 60만원 전부를 집세로 낸다. 생활보호를 받으려고 구청에 갔으나 수중의 예금 수백 만원 때문에 “예금이 없어지면 그때 다시 오라”는 말을 들었다. ‘예금이 다 떨어지면 반드시 생활보호를 해주겠다’가 아니라 ‘그때 가서 얘기해보자’는 뉘앙스 때문에 기무라는 남은 돈을 쥐어짜듯이 생활하며 불안에 떨고 있다. “만약 어떤 사정이 있어서 생활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된다면 저는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금을 다 써버리면 된다고 쉽게 말하지만, 예금이 조금씩 줄어드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에요.”

노인들이 쥐고 있는 비상금의 용도는 암에 걸렸을 때의 수술비 혹은 자신의 장례식비로, 그야말로 최후의 보루다. 피보호자들의 불안감을 헤아리지 못하는 규정은 노후파산을 보편 사태로 확산시키는 주범이다. 제작진은 ‘노후파산의 계승’으로 이 묵시록의 정점을 찍는다. 일본에서는 지난 20년 동안 일하는 세대의 평균 수입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는데, 저소득층 자녀가 부모의 연금에 기대 살다가 공멸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사정은 어떨까. 노인빈곤율은 49.6%로 OECD 국가 중 1위다. 노인 자살률 역시 1위로, 한해 3,500명의 노인이 목숨을 끊는다. 부실한 노후정책을 생각할 때 일본보다 사정이 나으리란 보장이 없다. 비정규직 확대, 빈부격차 심화, 저출산, 고령화의 순환고리를 굴리며 벼랑 끝에 선 일본 사회가 한국의 근미래를 거울처럼 비춘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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