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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원하는 대로 해라

입력
2018.03.09 15:1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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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is ce que voudra(원하는 대로 해라).’ 담쟁이덩굴로 둘러싸인 수도원 주변에는 오래된 느릅나무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한적하고 고색창연한 건물 입구로 가면 저 문장이 새겨진 음각 목판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고 한다. 프랑수아 라블레의 소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에서 텔렘 수도원 정문에 걸려 있던 구절.

고백하자면 한때 나 역시 그 문장에 매료됐다. 20대 시절 내내 수첩을 바꿀 때마다 맨 앞장에 적어 넣었을 만큼 말이다. 간절히 원하는 것도 없으면서 습관처럼 끄적거린 이유는, 아마 멋져 보여서였을 것이다.

메드멘햄 수도원은, 말하자면 그 시대 귀족들의 은밀한 사교 공간이었다. 회랑과 조각품, 찻잔과 식탁보에 이르기까지 고급스런 취향과 교양미를 구현한 그곳에서 열두 명의 클럽 회원들은 문 앞에 내건 구호대로 ‘원하는 모든 것’을 했다. 잡담을 하며 공적 업무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었다. 곤돌라를 동원해 근처 강가에서 뱃놀이를 하고, 물고기를 잡아 구워먹으며 한여름의 햇살을 쪼였다. 그리고 밤이 되면 회원들은 성 프란시스코를 코스프레한 수도사 복장으로 갈아입고는 자신들만의 갈라 쇼를 벌였다. 이 자리에서 그들은 저장고의 포도주가 바닥날 때까지 질탕한 술판을 벌이고 난장판의 섹스를 하고 신성모독을 했다. 어떤 행동을 해도 용인되었다. 욕망과 일탈을 파괴적으로 감행하고 부추기는 것, 그게 그들만의 카르텔을 강화하는 도구였다.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지던 메드멘햄 수도원이 세상에 알려진 건 역설적이게도 몇몇 회원들 간 감정이 틀어진 게 발단이었다. 상원의원이자 클럽의 핵심 멤버였던 존 윌크스와 샌드위치 백작이 서로를 물어뜯기 위해 이곳에서 벌인 상대의 추잡한 사생활을 폭로한 게 도화선이 됐다. 두 사내의 치졸한 감정싸움은 걷잡을 수 없는 추문이 되어 세상을 순식간에 달구었다. 계몽의 시대를 산다는 자부심에 들떠 있던 당대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더 가관인 건 이 클럽을 조직하고 운영하고 그곳에서 악행을 자행한 사람들이 영국 사회를 이끄는 장관과 의원, 왕자 등 귀족들이라는 점이었다. 언론은 앞다퉈 기사를 쏟아냈다. 확인되지 않은 루머가 대중의 말초적인 상상력과 만나면서 메드멘햄 수도원의 이야기는 더욱 선정적으로 부풀려졌다. 설상가상 이 조직의 비밀주의와 폐쇄성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부채질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클럽 멤버들의 면면이 드러나고 그들이 의회 증언대에 섰다. 낯 뜨거운 행실이 만천하에 공개됐건만, 그들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희대의 난봉꾼 샌드위치 백작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틈틈이 윌크스의 만행을 교묘하게 까발렸다. 반면 자수성가한 흙수저 출신 존 윌크스는 민사법원에서 ‘자유’라는 말을 주워섬기며 일장연설을 했다. ‘그들의 악행을 폭로한 죄’로 자신은 마녀사냥에 내몰리고 자유를 잃는 몸이 됐지만 중산층 그리고 보호가 절실한 기층민에게 자유를 상징하는 인물로 거듭났다며 열변을 토했다. 때로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라 했던가. 그때 그들의 언사는 어찌 그리도 요즘 언론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말과 빼다 박았는지….

하지만 그들은 딱 하나, 바뀐 시대정신을 읽지 못했다. 정의와 평등을 갈망하는 의사, 변호사, 제분업자, 상인, 젊은이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들은 책임과 헌신의 무게를 아는 사람을 새로운 지도자로 앉혔다. 지나간 시대의 낡은 관습을 걷어내고 새로운 규약과 전통을 만들었다. 세상도 사람도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열망, 그게 그들을 움직인 원동력이었다. ‘원하는 대로 해라.’ 과거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욕망을 구현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동일한 명제 앞에 선 느낌이다. 수첩에 라블레의 저 문장을 다시 써넣어야겠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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