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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벨벳 빨간맛, 평양 학생들도 흥얼거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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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벨벳 빨간맛, 평양 학생들도 흥얼거려요

입력
2018.04.25 04:4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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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평화 협력기원 남측예술단이 공연한 지난 1일 고려호텔에서 바라 본 평양시민들의 모습.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남북평화 협력기원 남측예술단이 공연한 지난 1일 고려호텔에서 바라 본 평양시민들의 모습.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드라마 ‘경찰특공대’, ‘유리구두’를 재미있게 봤어요. 영화 ‘님은 먼 곳에’에 나온 배우 수애를 너무 좋아해서 남한 사회에 나와 제일 먼저 한 일이 수애 소속사에 편지를 쓴 것이었어요”(이위력ㆍ30)

‘한류’의 가장 열렬한 팬들이 모인 곳은 어쩌면 북한일지도 모른다. 지난 1일 평양에서 공연한 남한 예술단들은 사실 북한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가수들이었다. 이 무대에서 북한 주민들에게 신인이나 다름없던 그룹 레드벨벳이 공연 이후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당국은 엄격하게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노래를 듣는 것을 금지하고 있지만 이를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북한의 시장인 장마당에서 무엇이든 사고파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당국의 눈을 피해 오늘도 수백 종류의 드라마와 영화, 노래가 북한으로 퍼지는 상황이다.

평양에 봄이 온다. 남북평화 협력기원 남측예술단이 공연한 지난 1일 고려호텔에서 바라 본 평양시민들의 모습.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평양에 봄이 온다. 남북평화 협력기원 남측예술단이 공연한 지난 1일 고려호텔에서 바라 본 평양시민들의 모습.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한국의 문화 콘텐츠를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중국 접경지역 도시다.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방영해주는 중국TV 채널을 시청하거나 드라마와 영화를 CD와 USB에 넣어 밀수하는 방법이 대표적이다. 2007년 탈북한 김웅찬(38ㆍ가명)씨는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직접 한국 드라마와 영화 등이 담긴 CD를 밀수했다. 김씨가 중국 옌지(延吉) CD 대여방에서 영화를 불법 복제한 뒤 북한에 판매하는 식이다. 수요층은 주로 젊은 20~40대다. 김씨는 “한번 중국으로 나가면 영화 500편 정도를 들여왔고 영화 CD 한 장당 600원(약 6,000원)정도 했다”면서 “당시 쌀 1㎏ 정도 가격인데도 쌀은 사 먹지 않고 영화 CD를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2000년대 초중반에는 텔레비전과 연결할 수 있는 ‘CD록화기’를 통해 CD에 담긴 드라마나 영화를 재생해서 봤다. 당시 ‘록화기’ 한대의 값어치는 싼 것은 입쌀 50㎏, 비싼 것은 100㎏에도 달했다. 2010년 탈북한 이위력씨는 “풀죽을 먹던 집도 록화기 한 대씩은 있을 정도였다”며 “당시 친구들끼리 ‘나는 영화 ‘올가미’ 있는데 넌 뭐 있냐’는 식으로 서로가 가진 CD를 바꿔봤는데 CD하나가 온 동네를 돌다 보니 CD가 긁혀 영상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USB가 ‘메모리’라는 이름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컴퓨터나 노트북의 일종인 노트텔에 연결해 재생할 수 있는 USB는 CD보다 월등한 용량에 국가안전보위부(현 국가안전보위성) 단속에도 쉽게 숨길 수 있다는 점이 각광받았다. 2013년 탈북한 한송이(25)씨는 “노래는 중국 돈 50~60위안하는 4기가 USB로 유통이 많이 됐고 드라마 시리즈 하나 정도가 들어간 16기가 USB는 150위안(약 2만 4,000원)정도 했다”며 “북한 사람들도 USB 하나 정도는 다 가지고 있었는데 나도 생일선물로 24기가 USB를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한국 콘텐츠가 북한에서 유통되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는 상황이다. 수 년 전만해도 일주일 정도 걸리던 유통망은 이제 실시간에 버금간다. 이씨는 “최근 탈북한 친구에게 들어보니 드라마 ‘도깨비’ 같은 경우 다음날 바로 받아서 봤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한국 콘텐츠는 기술적으로는 영상에 자막을 입혀야 하고 정서적으로 거리가 있는 미국 등 콘텐츠에 비해 언어가 통하며 문화적 차이가 비교적 적다는 점에서 더 선호된다.

로이터 통신과 이코노미스트에서 각각 서울 주재 특파원을 지낸 제임스 피어슨과 다니엘 튜더가 쓴 ‘조선자본주의공화국’(2017)에서는 북한에서 한국의 과장된 드라마가 인기 있는 이유로 북한 주민들은 전형적인 권선징악 스토리인 북한 방송 프로그램에 대비해 오히려 한국 드라마가 상대적으로 현실감이 높다고 느낀다고 지적했다.

음악의 경우 발라드와 트로트가 인기다. 가수 백지영은 노래 ‘총 맞은 것처럼’과 북한에서도 인기 드라마였던 ‘아이리스’의 삽입곡 ‘잊지말아요’로 인지도가 높다. 이씨는 “북한 음악은 성악적인 특성이 강한 데 비해 남한 노래는 허스키한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며 “북한에서는 가사집에 가사를 적어서 노래를 외우는데 댄스음악의 경우는 영어 때문에 받아 적기가 힘들 때가 많아 사람들이 개사해 부르기도 한다”고 말했다.

물론 북한 당국은 주민들이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이씨는 “내 친구는 영화 ‘올가미’를 본 게 발각돼 교도소 생활을 5년이나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금지할수록 인기는 수그러들지 않고 더 맹렬해지고 있다. 과거 보위부가 단속에 나설 때 정전을 시키기 때문에 ‘록화기’에 들어있는 CD가 적발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씨는 “그러자 중국에서는 건전지를 넣으면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상황에서도 CD를 뺄 수 있는 록화기를 만들어 엄청난 히트를 쳤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은밀히 학교에서 한국 드라마나 영화의 유행을 서로 즐기며 동질감을 확인한다. 한국 프로그램의 유행어였던 “당연하지”가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거나 한국 드라마 배우가 입은 것과 비슷한 옷을 중국에서 밀수해 친구들에게 판매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이렇게 한국 콘텐츠가 이들의 의식에 미친 영향도 크다. 김씨는 “물론 북한에서도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드라마 ‘천국의 계단’의 부잣집 생활을 보는 거나 액션에 재미를 느끼지 정치 상황을 보려 하지는 않는다. 다만 ‘한국은 잘 사는 나라’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고 말했다.

한씨는 “가까운 친구들끼리 교류하면서 ‘천국의 계단’, ‘가을동화’, ‘그 겨울 바람이 분다’, ‘아내의 유혹’ 등 셀 수 없이 많은 드라마를 봤다”며 “북한에서 한국 드라마를 접하면서 한국을 워낙 좋아하게 됐고, 한국 드라마나 노래를 함께 들었던 친구와 탈북했다”고 말했다.

한편 미디어로 남한에 대한 환상과 기대를 키워 온 젊은 탈북자 가운데는 남한에서 미디어를 통해 북한 소식을 알리는 공급자로 변신한 경우도 있다. 이들은 아프리카TV나 유튜브 등 인터넷 동영상 채널을 통해 자신의 탈북 과정이나 북한의 실상을 자신의 경험과 북한의 지인들을 상대로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방송한다. 때로 이들의 방송은 최신 북한 소식을 접할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한씨는 2016년부터 아프리카TV를 통해 자신의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 14일 업로드한 영상에서 한씨는 1일 남한 가수들의 평양 공연 이후 특히 아이돌 그룹 레드벨벳이 북한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소개했다. 북한에 사는 ‘브로커 언니’와 통화를 했다는 한씨는 “청소년들 사이 ‘빨간맛’ 춤이 유행하고 학교에서는 ‘빨간맛’을 암호로 사용한다”며 “김정은 위원장 옆에서 사진을 찍었던 아이린의 인기도 높아 그의 헤어스타일이 ‘빨간맛 머리’라며 유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씨 외에도 손봄향, 이평, 이소율 등 20~30대 탈북자 BJ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방송 소재는 주로 탈북 과정부터 북한 생활, 한국 정착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시청자는 북한에 관심이 많은 중ㆍ노년층부터 10대까지 아우르는데, 2016년 손봄향씨가 자신의 탈북 과정을 설명한 영상은 520만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남북평화 협력기원 남측예술단이 공연한 지난 1일 고려호텔에서 바라 본 평양시민들의 모습.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남북평화 협력기원 남측예술단이 공연한 지난 1일 고려호텔에서 바라 본 평양시민들의 모습.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이혜진 세명대 교양대학 교수는 ‘한류문화콘텐츠가 북한 주민의 정치의식에 미치는 영향’ 연구에서 “탈북 결심의 주된 이유가 한국에 대한 호기심, 동경 또는 통제와 단속이 심한 북한 체제의 획일성에 대한 환멸 등인데, 한류 문화콘텐츠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을 대리만족 시켜주거나 그것을 실현할 기회를 보여주고 있다”며 “북한 청년들의 남한 문화 모방 행위는 단속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만연해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한류 문화콘텐츠가 탈북 열풍현상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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