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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남성중심주의의 종언을 향해

입력
2018.03.15 14:32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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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의 유력한 차기 대권후보였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행 의혹이 폭로되면서 미투(#MeToo) 운동이 거대한 변혁의 동력이 되어가고 있다. 개인적 문제라고 폄하되었던 일들이 정치적인 것이 되면서 헤아릴 수 없는 기간 동안 억눌려 왔던 힘이 한국 사회를 커다란 변혁의 길로 인도하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미투 운동의 끝이 어디로 향해 가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안희정, 고은 등 유명인의 행태에 가려진 중요한 진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여성으로 대표되는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폭력은 엄청난 권력을 가진 특권층만의 일탈 행위가 아니다. 여성이라면 누구라도 경험했을 바바리맨, 지하철과 버스에서 여성을 추행하는 평범해 보이는 남성들, 차별과 폭력을 일상적으로 행사하는 선배, 동료, 후배, 친구는 대단한 권력과 명성을 가진 자들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노동시장에서 돈의 위계에 굽신거리며 생계를 꾸려가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아내와 자녀에게 군림하는 남성들은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권력과 명성을 가진 자들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사람들이다.

권력과 명성을 가진 자들에 대한 공개적인 폭로는 그나마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보호와 가해자에 대한 여론의 심판과 처벌이 가능하다. 하지만 삶의 공간에서 ‘권력과 명성 없는’ 평범해 보이는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가했던 일상적 폭력과 차별은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조차 어렵다. 설령 그 실체가 드러난다고 해도 가해자에 대한 심판과 처벌은 더더욱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 때문에 수많은 피해자들이 더 큰 고통을 피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침묵했는지도 모른다.

고은과 안희정은 1945년 해방 이후 조국과 민족을 위한 큰일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당연한 것이라고 여겨왔던 한국 사회가 걸어왔던 압축적 산업화와 민주화의 민낯을 보여주는 일그러진 상징이다. 산업화와 반독재 투쟁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했던 켜켜이 쌓여진 반인권의 역사가 여성과 약자에 대한 폭력이 일상화된 지금의 한국 사회를 만들었다. 가해자들의 비겁한 변명처럼 여성에 대한 폭력이 관행처럼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 사회가 ‘조국과 민족’을 위한 그 ‘큰 일’에 비해 일상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사적인 사소한 문제일 뿐이라고 집단 최면을 걸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방선거 운운하며 진영논리에 입각해 현재 사태를 해석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진보진영의 타격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물론이고,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않고, 과거를 잊은 듯 행동하는 자유한국당의 모습은 경악을 금할 수 없다. 진영논리는 사태 본질을 감추는 반동적 반격일 뿐이다. 좌우도, 진보와 보수도 없다. 가해자와 피해자만이 있을 뿐이다.

안희정의 성폭력 사건으로 다가올 지방선거에서 여당의 입지가 축소되고, 설령 문재인 정부가 곤경에 처한다고 해도, 그것이 국민의 판단이라면 담대하게 받아들어야 한다. 아니 어쩌면 기뻐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전국 선거의 핵심 쟁점이 되고, 선거 결과를 좌우할 수 있다면 그 사회는 미래가 있다. 그런 사회에서는 약자에 대한 폭력이 구조화될 수 없고, 반민주적 준동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에 대한 미투 운동으로 시작된 변혁의 물결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이름으로 남성중심주의를 당연시해온 지극히 평범한 우리 모두를 흔들어 깨우고 있다.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되겠지만, 거대한 변혁의 물결이 남성중심주의를 종식시키길 고대한다. 그리고 기억하자. 기득권을 가진 그 누구도 기득권을 순순히 내려놓은 적이 없다는 것을. 기득권 집단의 끈질긴 저항을 물리치고 나서야 비로소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것을. 미투 운동이 한국 사회의 변혁을 이끄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 사회 도처에서 기득권 집단의 반격(backlash)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윤홍식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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