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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독서의 목적은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기 위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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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독서의 목적은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기 위한 것”

입력
2018.05.11 04:4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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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남의 생각을 좇는게 아니라

자신의 사고체계를 다지는 작업

고전이나 다독에 집착하지 말고

한 권을 읽더라도 제대로 읽어야

책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날 때

자신만의 목소리 낼 수 있어

경기 파주 출판단지에서 책 읽기에 몰두하고 있는 아이들. 책을 읽는 것은 저마다의 생각을 세우기 위함이요, 그것이 곧 민주주의의 밑바탕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경기 파주 출판단지에서 책 읽기에 몰두하고 있는 아이들. 책을 읽는 것은 저마다의 생각을 세우기 위함이요, 그것이 곧 민주주의의 밑바탕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누구든 작가가 되면 전속력으로 아름다움과 교화나 위안을 생산해내야 할 신성한 의무를 지게 된다고 생각해요.” 미국 작가 커트 보니컷의 말이다. 글 쓰는 이들의 아름다운 문장이란 대개 그런 신성한 의무감의 산물이다. 글로 먹고 사는 이들의 상인 정신이라 해도 좋겠다. 작가 고종석도 한마디 덧붙인다. “글보다 사람이 아름다운 경우는 없다.” 마음에 드는 멋진 신발을 살 땐, 구두업체 사장님이 거룩한 성인군자이거나 위대한 아티스트이길 기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하필이면 글과 책만큼은 대체 왜?

더구나 글은 대개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이렇게 저렇게 입은 상처에서 나온다. 글은 그 상처를 가리기 위해 단단하게 올린 가드다. 상처의 ‘승화’란, 상처의 ‘위장’과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화려한 글, 특히나 뻘밭처럼 질척대는 느낌으로 화려한 글은 깊은 상처, 한걸음 더 나아가 위급한 호흡곤란의 징후라 보는 게 옳다. 글과 사람은 반비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 맞아!’라면서 보니컷과 고종석의 촌철살인에 새삼 감탄하고 박수칠 필요까진 없다. 두 작가 또한 글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니 그들의 말 또한 ‘모든 크레타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라는 오래된 역설에 포함되는 문장이다. 그러니 보니컷과 고종석을 두고 ‘저런 말까지 할 줄 아는 멋진 작가’라 감탄하기보다 ‘멋지게 보이려고 억지로 글을 쓴 사람’ 또는 ‘글보다 못난 사람’이라고 자기 고백한 게 아닌지 의심해보는 게 더 적절하다. 책에 대한 신화화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법학자로서 늘 이런 저런 책을 늘 끼고 살았던 김욱이 쓴 ‘책혐 시대의 책 읽기’가 의미 있는 지점은 이런 대목들이다.

‘책에 대한 책’들은 대개 책이란 것이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훌륭한 것인지 강조하다가, 이 좋은 것을 왜 안 읽는지 모르겠다는 한탄으로 내달리다가, 어떻게 하면 억지로라도 책을 읽힐까로 좌충우돌하다, 마침내 자포자기하는 심정을 내비치고는 우리의 미래는 어둡다는 묵시론으로 끝난다. 그런데 이 책은 이런 통상적 접근과 거리를 둔다. 전체 구성에서 이는 확연히 드러난다. 1장 ‘책과 화해하기’, 2장 ‘책과 마주하기’, 3장 ‘책과 사귀기’에 이어 4장, 마지막 장의 이름이 ‘책과 헤어지기’다.

맞다. 궁극적으로는 책과 잘 헤어져야 한다. 그 재미난 걸 평생 맛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것도 아쉬울 법하다. 저자는 3장 ‘책과 사귀기’에서 도덕, 역사, 철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문학, 종교 등 각 분야별로 독서에 도전해보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해 볼만한 책들을 종횡무진 소개하는데, 아마 그렇게 열심히 소개하는 심정이 그런 것일 게다.

하지만 책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도 목불인견이다. 누구의 원전을 읽었느니 못 읽었니, 누구의 진정한 뜻이 무엇이며 옳은 해석은 대체 무엇인지 왈가왈부하는, 필요하되 때론 도를 넘어서는 지루한 싸움들이 그 예다. 왜 그런가. 책은 하나의 일관된 사고 체계여서다. 독서는 나의 사고 체계를 단단하게 만들기 위한 작업이지, 죽도록 읽은 뒤에 고작 남의 사고 체계에 들러리나 서려고 하는 게 아니어서다. 저자는 단언한다. “비용과 시간을 들여 책읽기라는 수고를 하는 독자라면 각 분야 저자가 도달한 뛰어난 생각의 결과물보다 자신의 보잘것없는 하찮은 생각을 더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책과 잘 만나고 잘 헤어지라는 말은 그런 뜻이다.

책혐시대의 책읽기

김욱 지음

개마고원 발행ㆍ296쪽ㆍ1만5,000원

그렇기에 고전의 권위를 신성시할 필요도, 무조건 읽으려 달려들 필요도 없다. 어느 정도 내공이 차 올랐을 때 참고 삼아 읽어볼 만한 것이 고전일 뿐이다. 따지고 보면 무수하게 쏟아지는 석ㆍ박사 학위 논문이나 각종 이론이란 것도 결국 제 나름대로 고전을 읽은 결과물이다.

무조건 많이 읽는 게 좋은 것도 아니다. 제대로 몇 권만 읽어도 책은 책들끼리 통한다. 저자는 되묻는다. “우리 사회는 언제쯤이나 대식가를 부러워하고 찬양하는 수준이 아니라 한 끼라도 제대로 먹는 미식을 논하는 수준으로 진보할 수 있을까.” 읽은 책의 내용을 모두 기억하려 들 필요도 없다. 기억은 잘 보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 꺼내 쓰기 위한 것이다. 전체적인 맥락과 논리를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면 되는 것이지 책의 구체적인 어느 구절에 얽매일 건 아니다.

책에 대한 강박을 이렇게 떨어뜨려놓고 나면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읽어나가면 된다. 책 읽기의 궁극적 목적은 마침내 책에서 해방되어 제 목소리로 말하기 위해서다.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한데, 훌쩍 도약하자면 제 목소리로 말한다는 건 곧 민주주의의 문제여서다.

저자는 “개 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던 한 교육부 고위 관료의 말을 끄집어내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발언에 흥분만 할 일이 아니라 우리가 개 돼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입증”해나가야 한다.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 “중세의 지배 엘리트나 왕들이 감당했던 지적 수고와 책임을 우리 역시 감당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민주시민으로서의 교양을 위한 책 읽기다.” 한마디 더 쏘아붙인다. “민주주의 지배자로서의 ‘책임없는 권력’만을 누리려 한다면 고대ㆍ중세 시대에 책임 없이 권력만 누리려 했던 엘리트 귀족, 승려, 왕들과 뭐가 다르겠는가.”

2018년은 ‘책의 해’다. 1993년 이후 25년 만에 지정됐다. ‘책혐시대’라는 명명은 그 25년의 세월 동안 민주주의가 그 이전의 군부독재보다 훨씬 더 낫다는 점을 우리 스스로 잘 증명했느냐는 질문이기도 하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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