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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다산의 제자라면 반드시 ‘이것’이 있었다

입력
2018.05.24 04:40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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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껴 쓴 책 묶은 총서의 유무로

다산 제자인지 아닌지 알 수 있어

다산이 잃어버렸다고 애석해 한

‘거가사본’도 총서 더미서 발견

다산이 제시한 매뉴얼ㆍ목차대로

제자들이 챕터별 카드 작성 후

정리해서 엮으면 완벽한 책 둔갑

다산의 제자 황상, 황경 형제가 작업한 ‘치원총서’와 ‘양포총서’ 등 문헌. 최근 발굴된 이 자료에서 잃어버린 줄 알았던 다산의 책 '거가사본'을 찾아냈다. 황한석 소장, 정민 촬영.
다산의 제자 황상, 황경 형제가 작업한 ‘치원총서’와 ‘양포총서’ 등 문헌. 최근 발굴된 이 자료에서 잃어버린 줄 알았던 다산의 책 '거가사본'을 찾아냈다. 황한석 소장, 정민 촬영.

‘거가사본’의 출현

다산의 강진 시절 제자 황상(黃裳)과 황경(黃褧) 형제가 평생을 베껴 쓴 ‘치원총서(巵園叢書)’와 ‘양포총서(蘘圃叢書)’ 및 ‘양포일록(蘘圃日錄)’ 수십 권이 몇 해 전 세상에 나왔다. 광주 황한석 선생이 소장한 책이다. 그 길로 광주로 달려가서 자료를 열람했다. 책상 위에 수십 책을 한꺼번에 펼쳐놓자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다산은 제자 학습법으로 초서(鈔書) 공부를 강조했다. 초서란 책을 베껴 쓰는 것을 말한다. 책이 귀하던 사정도 있지만, 가까이에 두고 읽어야 할 텍스트를 통째로 베끼면서 자기화의 과정을 경험케 하는 공부법이었다. 베껴 쓴 책은 각자 자신의 이름을 딴 총서(叢書)로 정리시켰다.

다산의 제자인지 아닌지는 베껴 쓴 책을 묶은 총서가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하면 된다. 이강회의 ‘유암총서(柳菴叢書)’와 ‘운곡총서(雲谷叢書)’, 윤종진의 ‘순암총서(淳菴叢書)’와 ‘순암수초(淳菴手鈔)’, 윤종삼의 ‘춘각총서(春閣叢書)’와 ‘춘각수초(春閣手鈔)’가 각각 남아있고, 손병조의 ‘선암총서(船菴叢書)’와 초의의 ‘초의수초(艸衣手鈔)’, 아들 정학연의 ‘유산총서(酉山叢書)’도 따로 전한다. 여기에 다시 황상의 ‘치원총서’와 황경의 ‘양포총서’, ‘양포일록’ 등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것이다.

15세에 스승과 처음 만났던 황상은 60년이 지난 75세 때도 날마다 깨알 같은 글씨로 초서 작업을 계속해서, 베껴 쓴 책이 키를 훨씬 넘겼다. 이날 본 자료는 이 중 일부였다. 두근대며 한 권 한 권 펼쳐 살피는데, 그 중 한 책에 놀랍게도 ‘거가사본(居家四本)’이 들어 있었다. 이 책은 다산이 아들에게 부친 편지 ‘기양아(寄兩兒)’에 구체적인 작업 매뉴얼만 나와 있고 실물이 전하지 않던 책이다. 지시만 남고 미처 진행하지 못한 책으로 알았는데, ‘양포일록’ 속에서 ‘거가사본’의 원본이 불쑥 튀어 나온 것이다. 책을 보다 말고 나는 기함을 하고 놀랐다. 다산의 사라졌던 책 한 권이 이렇게 다시 세상에 나왔다.

‘거가사본’ 편집 매뉴얼

거가사본이란 주자(朱子)가 ‘화순(和順)은 제가(齊家)의 근본이요, 근검(勤儉)은 치가(治家)의 근본이며, 독서(讀書)는 기가(起家)의 근본이요, 순리(順理)는 보가(保家)의 근본이다’라고 한 말에서 나왔다. 집안 생활을 가족관계, 경제활동, 학문활동, 인격수양으로 갈래를 나눠 여러 책에서 발췌한 명언과 일화를 들어 예시한 책이었다. 가족 간에는 화목과 순종이 필요하고, 근면과 검소라야 가계를 꾸려갈 수 있다. 집안을 일으키려면 책을 읽어야만 하고, 매사에 순리를 따르는 것이 집안을 보전하는 바탕이 된다는 뜻이다.

거가사본 표지와 첫 장. 집안을 이끌어나가는 원리와 구체적 사례들을 적어둔 책이다. 황한석 소장, 정민 촬영
거가사본 표지와 첫 장. 집안을 이끌어나가는 원리와 구체적 사례들을 적어둔 책이다. 황한석 소장, 정민 촬영

다산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기양아’에서 이렇게 썼다. “얼마 전 어떤 사람이 옛 사람의 격언을 청하더구나. 유배지에 서적이 없어 4,5종의 책에서 명언과 귀한 말씀을 옮겨 적어 목차를 정해 책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 사람은 이를 고리타분하게 여겨 내던져 버렸다. 흐린 풍속을 웃을 만하다. 덕분에 이 책이 사라지고 말았으니 가석하다. 너희가 이 목차에 따라 여러 서적에서 가려 뽑아 서너 권의 책으로 만든다면 또한 한 부의 훌륭한 저술이 될 것이다.” ‘거가사본’은 다산이 잃어버렸다고 애석해한 바로 그 책이었다.

다산은 같은 편지에서 사본(四本)의 차례에 따라 정자(程子)나 주자(朱子)의 책과 ‘성리대전(性理大全)’ㆍ’퇴계집(退溪集)’의 언행록(言行錄), ‘율곡집’ㆍ’송명신록(宋名臣錄)’ㆍ’설령(說鈴)’ㆍ’작비암일찬(昨非菴日纂)’ㆍ’완위여편(宛委餘篇)’ 등의 책에서 관련 내용을 초록해 3~4권 분량으로 엮을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는 네 가지 분류에 해당하는 항목 내용들을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항목 카드 작업 과정

예를 들어 ‘제가지본(齊家之本)’에는 가족 구성원간의 효도와 공경, 부부 생활, 친척들과의 화목, 하인을 대하는 태도 등과 관련된 내용을 포함시키고, ‘치가지본(治家之本)’에는 밭 갈고 길쌈하는 일, 의식(衣食)과 농사 및 가축 기르기 등 전원(田園) 생활에 관한 내용을 넣으라고 지시했다.

다산은 이에 앞서 ‘제경(弟經)’의 편집을 지시할 때는 8장으로 목차를 구성하고, 각 장마다 12항목으로 엮게 했다. 또 ‘주자전서(朱子全書)’ 중에서 늘 가까이에 두고 외울만한 내용을 간추린 ‘주서여패(朱書餘佩)’란 책도 12장의 목차를 제시한 뒤 매장마다 12항목씩만 소화하게 했다. 특별히 한 항목이 120자를 넘지 않게 하고, 긴 내용을 압축하는 시범까지 직접 보여주었다.

제자들은 작업의 핵심가치를 숙지한 바탕 위에 스승이 제시해준 매뉴얼에 따라 카드 작업을 진행했다. 카드마다 목차의 어느 항목에 속하는지를 표시한 숫자가 적혀 있고, 이어 120자에 맞춰 본문을 간추려 베낀 뒤 끝에 그 책의 출전을 밝혔다. 이 작업은 성격에 따라 때로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동시에 달려들어야 했다. ‘목민심서’처럼 방대한 작업일 경우, 카드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과 카드의 숫자도 딱 그만큼 늘어났다.

막상 검토해야 할 책이 많아도 책 한 권 중에서 꼭 필요한 카드는 몇 장 나오지 않았으므로, 여럿이 집중 작업을 진행하면 항목 카드 추출 작업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카드의 일관성 확보를 위한 장치들

설정 항목에 따른 카드 작업이 끝나면 분류 작업으로 이어졌다. 번호 별로 카드를 분류하고, 카드의 순서를 조정해서 작은 묶음들이 하나 둘 완성된다. 하지만 분류를 마쳤을 때 어떤 항목은 카드가 너무 많고, 어떤 항목은 거의 없어 난감한 경우도 있었다. 특정 항목에 추출 카드가 부족할 경우 다산은 자신의 실제 경험을 적은 카드를 끼워 넣기도 했다. ‘목민심서’ 곳곳에 들어있는 자신의 체험을 적은 카드가 그래서 들어갔다.

치원총서 필사기. 제자 황상이 스승 다산의 지시에 따라 무엇을 어떻게 작업했는지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 황한석 소장, 정민 촬영.
치원총서 필사기. 제자 황상이 스승 다산의 지시에 따라 무엇을 어떻게 작업했는지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 황한석 소장, 정민 촬영.

단 각 항목별로 들어가는 카드의 숫자는 챕터별로 균형을 맞추는 것을 잊지 않았다. 카드가 많다 해서 그 부분의 분량이 그에 비례하여 확대되는 경우는 없었다. 그때그때 책에서 꺼낸 카드들이 분류 작업을 거쳐 순서를 매겨 공책에 필사되고 나면, 카드 작업을 할 때는 미처 알 수 없었던 질서가 일목요연하게 드러나 작업자 스스로 놀랐다. 그제서야 그들은 카드 작업의 위력을 실감했다. 흩어져 있던 정보들이 하나의 벼리로 꿰어져 쑥 들어 올려져서 한 그물 속에 쏙 들어오는 신통한 경험이었다.

선순환 구조

나는 서울로 돌아와 자료를 검토한 뒤에 ‘거가사본’의 번역 작업을 서둘러 진행했다. 원 출전과 비교해보니, 다산의 지시대로 긴 내용은 간결하게 추려졌고, 원래 짧은 것은 그 상태 그대로였다. ‘제가지본’의 항목 세 개를 이 지면을 빌어 소개한다. 전체 완역을 마친 원고는 따로 갈무리해 출간할 예정이다.

“양성재(楊誠齋)의 처 나부인(羅夫人)은 나이가 70여세였다. 겨울철 동틀 무렵이면 일어나자마자 부엌으로 가서 죽을 쑤었다. 노비들에게 모두 이를 먹게 한 뒤에야 일을 시켰다. 그 아들이 말했다. ‘날씨도 추운데 어찌 몸소 이처럼 수고롭게 하십니까?’ 부인이 말했다. ‘노비 또한 사람의 자식이니라. 새벽이라 추우니 모름지기 배에 뜨듯한 기운이 있어야 일을 할 수가 있다.’”

다음 항목은 또 이렇다. “노비 또한 사람의 자식이다. 나보다 부족한 것은 돈일 뿐이다. 재물이 부족해서 부모를 떠나 주인에게 몸을 내맡겨 시켜 부리는 대로 일하며 명령을 따른다. 그런데 이들에게 가혹하게 하고 포학하게 굴어, 못 견딜 정도로 나무란다. 또 주리고 춥게 하면서 가둬놓고 나오지 못하게 하기까지 하니, 어쩌면 이다지도 생각이 없는가? 어찌 내가 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지 않는가?” 노비의 자리에 아래 사람을 넣으면, 갑질하는 대기업 오너들이 바로 새겨들어야 할 얘기다.

자식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는 주자의 다음 말을 인용했다. “재물을 널리 쌓아둠은 자식을 가르침만 못하다. 부형이 자제를 독려하여 가르침은 다만 사귀는 벗을 삼가 선택하고, 단정하고 방정함을 널리 확장시키는데 달려있다.” 돈만 주고 바르게 안 가르치니 자식의 버릇만 나빠진다. 자식보다 한 수 더 뜨는 부모라면 답이 없다. 다산의 이 ‘거가사본’은 오늘날의 가정 교육서로도 효용이 살아있다.

카드 작업 진행을 위해 제자들은 스승이 제시한 책을 다 훑어보아야 했다. 먼저 독서의 이익이 적지 않다. 항목을 옮기면서 내용을 새기는 사이에 각인의 효과가 더해진다. 다시 이것을 정리해 엮는 과정에서 편집의 노하우를 익힐 수 있다. 이 방법을 확장해 향후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추출하여 재배열하는 응용이 쉬워진다. 다산의 이 같은 작업 방식은 선순환(善循環)으로 확장되는 지식 경영의 실례를 잘 보여준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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