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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조선 탈출" 복권방에 N포세대가 몰린다

입력
2015.12.03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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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주거난에 몰린 청춘

복권 판매점의 새 단골로

2030세대 82%가 구매 경험

아저씨들의 전유물은 옛말

#서울 ‘로또 명당’으로 유명한 서울 노원구의 한 복권판매점. 로또 추첨일인 지난달 28일 영하로 뚝 떨어진 수은주에 살을 에는 추위가 매섭게 불었지만 로또를 사기 위한 줄은 문턱을 지나 도로변까지 이어져 있었다. 가게 입구 ‘XX번째 1등 당첨! 다음 주인공은 당신입니다!’라고 쓰여진 현수막이 세차게 펄럭이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잡았다. ‘명당’이란 소문에 일부러 동작구 신대방동에서 한 시간 반 걸려 이곳을 찾았다는 강모(29)씨의 손에도 6자리 숫자가 5줄 찍힌 로또 복권이 들려있었다. 며칠 전 지방직 7급 공무원 필기시험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는 김씨는 “3년째 뒷바라지 해 주신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어 로또에라도 희망을 걸고자 찾아왔다”며 “당첨된다면 돈 걱정 없이 마음 편하게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공무원 시험 합격이나 1등 당첨이나 둘 다 한 번에 내 인생을 걸어야 하는 ‘로또’이긴 마찬가지”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불과 십여년 전만 해도 복권은 40, 50대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피곤한 얼굴의 가장이 퇴근길 복권방에서 즉석복권을 긁으며 한숨을 내쉬는 모습은 종종 드라마나 영화 속 한 장면을 장식하곤 했다. 하지만 최근 복권방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중장년 남성들이 몰리던 복권방에는 이제 연애, 결혼, 출산을 넘어 인간관계와 내 집 마련, 꿈까지 포기해야만 하는 N포 세대들이 몰리고 있다. ‘복권’은 높은 취업문턱과 주거난 등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벽 앞에 놓인 2030세대의 심리적 탈출구인 셈이다.

벼랑 끝 도피 “로또 말고 방법이 없다”

#공인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는 대학생 강민수(25ㆍ가명)씨는 주변 친구들과 종종 “로또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말을 하곤 한다. 농반진반 꺼내는 말이지만 용돈 외에 수입이 없는 강씨에게 로또는 일주일에 한 번씩 1,000원짜리 한 장이면 살 수 있는 ‘희망’이다. 강씨는 “애초부터 로또로 인생을 확 바꿔보겠다는 목표는 없다”면서도 “힘들게 취업을 한다 해도 월급으로 집이나 차를 마련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꿈이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기대로 로또를 사게 된다”고 말했다.

2013년 기획재정부 복권위원회의 ‘연령별 복권 구입 경험률’ 조사에 따르면 20대의 복권 구입 비율은 53%, 30대는 61.4%로, 2009년 조사(20대 43.8%, 30대 58%)와 비교할 때 크게 늘어났다. 한국일보가 지난달 29, 30일 양일간 2030세대 200명(20대 107명, 30대 93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81.5%(163명)가 복권 구매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로또가 76%(124명)로 압도적 1위를 차지했고 연금복권(14.72%)이 뒤를 이었다. 1회 평균 복권 구매 금액은 1,000원~5,000원 미만이 57.67%(94명), 5,000원~1만원 미만이 37.42%(61명)로 대다수를 차지했다. 강남역 인근에서 로또 판매점을 운영하는 박모(54)씨는 “예전엔 인근 직장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몇 년 전부터는 젊은 사람들이 손님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귀띔했다.

이 같은 2030 세대의 복권 구입률 증가는 최근 청년들의 좌절이 담긴 ‘헬조선’(Hellㆍ지옥과 조선의 합성어)이란 유행어와 맞닿아 있다. 복권은 사회 불평등 지수가 높아지고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고된 일상의 탈출구를 찾을 수 없을 때 많이 팔린다. 복권의 소비층이 20, 30대로 확산되고 있는 것은 생계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이 젊은층으로 번지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설문조사에 참여한 직장인 김새미(28ㆍ가명)씨는 “더 이상 ‘헬조선’에서는 개천에서 용날 방법이 없으니 로또밖에 답이 없다”며 “당첨되면 집을 사고 싶은데 기본적인 주거조차 로또라는 꿈에 기대야만 살 수 있는 현실이 슬프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승협 대구대 사회학과 교수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어려움 등 반복적인 학습효과를 겪은 2030세대가 ‘출구가 없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됐고, 이는 ‘최소자본 최대효과’가 가능한 복권 구매 상승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확률 높인다는 믿음에 또 꾹꾹

긁어서 당첨여부를 알 수 있는 인쇄복권(즉석복권)과 달리 숫자를 선택해야 하는 로또에는 ‘스스로 당첨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기대 심리가 작용한다. 발버둥쳐도 금수저가 될 수 없는 현실에서 자신의 판단 한 번으로 ‘미생’이 ‘완생’으로 거듭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로또는 이 믿음의 틈을 파고 든다. 특히 결혼, 육아 등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한 20, 30대가 주요 타깃이다. ‘당첨 확률을 높여준다’는 자문 서비스를 판매하는 복권 정보 제공 사이트에는 20, 30대 소비자를 현혹하는 문구들이 넘쳐난다. ‘23세 청년에게 찾아온 화려한 기회’, ‘30대 워킹맘의 당첨 사연’ 등의 제목으로 클릭을 유도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약간의 정보’만 있으면 인생역전이 꿈은 아니다”라며 부추긴다.

사실 당첨 사연이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N포 세대라는 단어에 응축돼 있는 2030세대의 현실이 담겨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20대 당첨자 A씨는 “대학을 다니던 중 집안 사정이 어려워져 학업을 포기했다. 그런데 로또 2등에 당첨되는 덕분에 다시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게 됐다”는 식이다. 세 아들을 둔 30대 워킹맘 B씨의 “애들은 커가고 들어갈 돈은 많고, 남편 아침밥도 못 차려줘”라는 한탄 역시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익숙한 이야기다. ‘포기’라는 선택지 외에 돌파구가 없는 세대에게 로또는 마치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그려지는 것이 당첨 사연 대부분의 스토리 라인이다. 말 그대로 ‘기승전로또’인 셈이다.

전문가들은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과 환상을 경계한다. 조현섭 총신대 중독재활상담학과 교수는 “노력으로 성공하는 것보다 쉽다는 생각 때문에 복권에 과도하게 의존할 수 있다”고 지적했고 이승협 교수는 “로또는 번호를 본인이 찍기 때문에 ‘스스로 통제할 수 있고 확률을 유리하게 바꿀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며 “일확천금의 환상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허경주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이현주기자 memory@hankookilbo.com

이채윤 인턴기자(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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