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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팜므파탈과 김치녀의 닮은점과 차이점

입력
2016.01.22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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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기린원,2008)는 마태복음 14장 6~11절이 원전이다. 기원 후 30년, 갈릴리 지역의 분봉왕 헤로데가 형 빌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자 세례 요한은 그들의 결혼이 모세 율법에 어긋난다고 저주한다. 헤로디아와 전 남편 사이에는 살로메라는 딸이 있었는데, 유대왕으로 등극한 헤로데의 생일잔치에서 이 의붓딸이 춤으로 잔치의 흥을 돋우었다. 그러자 헤로데는 살로메에게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했고, 이에 살로메는 어머니 헤로디아가 사주한 대로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했다.

1891년부터 쓰기 시작한 이 희곡에서 오스카 와일드는 마태복음의 설정을 완전히 뒤엎었다. 마태가 쓴 대로라면 살로메로 하여금 춤의 대가로 요한에게 복수를 한 사람은 헤로디아였고, 살로메는 그저 어머니의 말에 순응하는 효녀일 뿐이다. 자신의 문학 속에서 자기실현을 끈질기게 추구했던 오스카 와일드에게 살로메의 자기실현 욕망이 거세된 원전이 만족스러울 리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가 시킨 게 아니라, 살로메가 세례 요한의 목을 원했던 것으로 이야기를 바꾸었다.

마른 우물에 갇힌 세례 요한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살로메는 그의 예언이나 복음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잘 생긴 그의 얼굴에 매혹되었고, 그와 입맞춤하기만을 원했다. 세례 요한이 그 요청을 거부하자, 살로메는 의붓 아버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관능적인 춤을 추었다. 그 뒤의 이야기는 앞서 나온 대로다. 소원을 말해보라는 헤로데에게 살로메는 세례 요한의 목을 달라고 했고, 은쟁반에 담아온 그의 머리를 받아 들고 입맞춤을 한다.

이명옥의 ‘팜므 파탈’(다빈치,2003)은 19세기에 들어 도시의 비대화와 물질주의가 팽배하면서, 순종적인 여성 대신 자아를 추구하는 맹렬 신여성도 따라 등장했다고 말한다. 기존의 가치관이 붕괴되면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정면으로 도전을 받게 되자 거기에 두려움을 느낀 남성들이 제어되지 않는 여성에 대한 혐오, 증오심, 공포와 그녀들의 매혹을 동시에 투사한 모순적인 이미지가 치명적으로 아름답고 사악한 팜므 파탈(famme fataleㆍ요부)이다. 19세기 말에 확립된 서양의 팜므 파탈과 한국의 ‘김치녀’는 유사한 역사 현상이다. 유별나게 다른 점이라면, 한국 남성들은 요부로부터 육체적 매력을 지우고 김치녀의 반대편에 온순하고 복종적이며 귀여운 여성상을 내세운다.

영화 ‘팜므 파탈’의 한 장면.
영화 ‘팜므 파탈’의 한 장면.

많은 평자들은 오스카 와일드가 성서의 인물을 팜므 파탈로 내세워, 가식적인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을 전복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그런 해석을 유지하면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사항은, 살로메의 죽음충동(death drive)이다. 극중의 살로메는 극이 시작되자 말자 그녀의 자기실현을 금지하려는 주변 인물들의 설득과 중지하지 않으면 필히 맞이하게 될 파멸에 대한 경고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그녀의 경쟁자가 있다면, 단연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미하엘 콜하스 밖에 없다. 하지만 살로메는 의미로 가득한 그런 인물들과 조금도 같지 않다.

슬라보예 지젝은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새물결,2008)에서 안티고네나 미하엘 콜하스 같은 인물을 “법률에 자구대로 집착하는 사람”으로 폄하하면서, 이들은 법을 만드는(정초) 사람이 아니라, 법을 지키려는(보존)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지젝이 보기에 이런 인물들에게 세계란 ‘법이 지켜지기만 하면 완벽한 것’으로 간주되며, 그들의 투쟁은 고작 법이라는 “상징계적 등록소”에 자신을 기입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죽음 직전까지 단식투쟁을 했던 대광고등학교 학생 강의석, 309일 동안 크레인 농성을 했던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 ‘석궁 교수’ 김명호도 기껏 준법 투쟁을 통해 체제를 보존하는 일에 자신의 생명을 바치고자 했다는 말인가. 지젝이 재수 없고 밉상스럽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투쟁가들이나 국민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정치가들이 ‘의미’를 획득하고자 하는 것은 사실이다. 반면 살로메는 ‘화냥년’ 혹은 ‘배설물’과 같은 아무 의미 없는 의미만을 얻었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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