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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집 마련 역발상] 1930년 국내 첫 아파트 선봬... ‘강남 아파트’ 욕망의 대상으로

입력
2018.05.12 09:00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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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후반 강남개발 본격화

상가아파트는 쇠락의 길 걸어

90년대 ‘주상복합’으로 재등장

1970년대 서울 한강맨션아파트 전경.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0년대 서울 한강맨션아파트 전경. 한국일보 자료사진

"처음 이 아파트촌을 먼발치에서 보고는 무슨 공장들이 저렇게 한 군데에 빽빽이 몰려있을까 싶었다. 머리 위에서 불을 때고, 그 머리 위에서 또 불을 때고, 오줌똥을 싸고, 그 아래에서 밥을 먹고" (조정래 ‘비탈진 음지’ㆍ1973)

한국에서 아파트는 중산층이 선호하는 주거형태로 전체 주택의 60%(2015년 기준)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1970년대에는 0.77%에 불과했고 호응도 받지 못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등장한 아파트는 1930년 일본 상사 미쿠니(三國)가 서울 거주 직원들의 관사 목적으로 지은 ‘미쿠니 아파트’로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최고 아파트는 1932년 건설된 서울 서대문구 충정아파트이다. 4층 콘크리트 건물 한가운데 삼각형 모양의 중정(中井)이 특징이다. 광복 후 호텔로 이용되다 다시 아파트로 변경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인구 증가와 시민아파트의 보급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아파트는 58년 성북동 산자락에 세워진 종암아파트다. 서울 인구가45년 90만에서 60년 250만으로 급증하며 주택난이 심해지자 공동주택이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다. 종암아파트 세대마다 수세식 변기가 설치됐고 온돌이 깔린 침실은 주방, 거실보다 한 계단 높았다.

61년 5ㆍ16 군사정변 세력은 '군사혁명의 생활혁명으로의 전환'이라는 기치 아래 시민아파트 보급에 박차를 가했다. 62년에는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인 마포아파트가 건설돼 10개 동에 642세대가 들어섰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준공식에서 "이러한 고층아파트의 건립이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바입니다"고 독려했다. 저소득층을 위해 시작된 시민아파트는 대부분 26㎡(약8평) 내외로 좁았지만 단독주택보다 저렴했다. 채석장 부지에 선 창신아파트(63년)나 언덕 위의 홍제아파트(65년)도 이 시기에 모습을 드러냈다.

66년 '불도저'로 불리던 김현옥 서울시장 취임으로 시민아파트 건설은 가속화됐다. 서울 곳곳의 판잣집을 헐고 3년간 2,000동 9만호를 세운다는 야심 찬 계획이 섰다. 그러나 무리한 추진은 화를 불렀고 70년 마포구 와우아파트가 붕괴하며 33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시민아파트 건설은 즉각 중단됐고 서민을 위한 시민형 아파트를 건설한다는 계획도 사실상 막을 내렸다.

1963년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에 건립된 창신 아파트의 입주식 날 풍경.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63년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에 건립된 창신 아파트의 입주식 날 풍경.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영동 개발과 중산층 주거로의 전환

이후 아파트 정책은 70년대 추진된 영동(강남, 서초 일대) 개발과 맞물려 중산층을 위한 주택공급으로 전환했다. 한강 변과 강남이 개발되며 여의도, 잠실, 반포, 압구정 등 매립지에 대규모 택지가 조성됐고 아파트가 빼곡히 채워졌다.

70년 건설된 한강맨션아파트는 중상층을 겨냥한 첫 사례다. 89㎡(약27평)~181㎡(55평) 중대형 규모로만 구성됐고 탤런트 강부자와 가수 패티 김이 입주해 유명세를 탔다. 최초로 중앙공급 보일러가 설치됐고 온수가 상시 공급됐다. 입주금을 선납하는 분양 방식도 이때 처음 도입됐다. 이듬해 지어진 여의도시범아파트는 12층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됐고 단지 내에 야외수영장을 갖췄다. 와우아파트 붕괴로 인한 불안감도 잠시, 아파트는 본격적으로 중산층의 상징이자 선망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현대건설은 75년 공유수면매립공사 대가 형식의 압구정 부지에 중대형 6,000여 세대의 아파트촌을 조성했다.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중ㆍ상류층의 아파트단지로 명성을 떨쳤고, ‘강남 아파트’는 욕망의 대상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60~70년대 아파트에서 주거와 상업용도가 결합된 상가아파트의 존재도 빼놓을 수 없다. 하천변 판자촌을 철거한 부지 위에 선 상가아파트는 하천복개와 도로개설, 불량주택지 철거라는 세 마리 토끼를 쫓은 결과였다. 세운상가아파트(67년)와 낙원상가아파트(68년) 등 을지로, 충무로 일대 도심 상가아파트는 부자들의 전유물이었다. 109㎡(약33평)~224㎡(68평)으로 이뤄진 유진상가아파트(70년)는 분양가가 일반주택의 세 배나 됐다. 그러나 70년대 후반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상가아파트는 쇠락의 길을 걷는다.

90년대 중반 들어 상가아파트는 '주상복합'이란 이름으로 화려하게 재등장했다. 초고층 주상복합은 규제 완화 흐름에 맞춰 상업지역 내 주택공급 방식이 됐고 여의도, 잠실, 도곡동 등 서울 요지에 집중 건설됐다. 높은 분양가와 고급스러운 내부시설로 부유층의 상징으로 새롭게 떠올랐고, 정사각의 초고층 건물 형태는 상업지역이 아닌 일반아파트 재건축에서도 일상적으로 찾아볼 만큼 확산됐다.

송은미기자 mys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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