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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고공에서의 외침

입력
2014.12.17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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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5월 29일 새벽. 평원고무공장 여공 강주룡(1901~1932)은 밤새 광목을 찢어 만든 줄을 타고 평양 을밀대 지붕에 올랐다. 살인적인 임금 삭감에 파업과 단식으로 맞서다 공장에서 쫓겨난 뒤였다. “우리는 49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 감하를 크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2,300명 고무공장 직공의 임금 감하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써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그는 8시간 만에 경찰에 끌려 내려왔지만 옥중 단식투쟁을 이어가며 임금 삭감을 막아냈다. 한국노동운동사에 기록된 첫 고공농성이다.

▦ 2014년 12월 13일 새벽.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김정욱과 이창근이 평택공장 70m 높이 굴뚝에 올랐다. 사측의 정리해고에 맞서 싸운 지 6년, 항소심의 ‘해고무효’ 판단을 가볍게 뒤집은 대법원 판결로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어진 뒤다. 이날 또 한 명의 해고노동자가 병마에 스러졌다. 스물여섯 번째 죽음이다. “콧물이 고드름으로 변해 버리는” 혹한에 “육모방망이보다 더 아픈 바람 몽둥이”를 견디며 이들은 외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굴뚝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약하고 무서움 또한 많고 여린 인간인지를 알리기 위해 올랐습니다. 도와주십시오.”

▦ 80여년 세월이 무색하게, 설 땅을 잃고 하늘로 오르는 노동자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회사 분할매각으로 일터를 잃은 원사생산업체 스타케미칼의 차광호씨가 구미공장 굴뚝에 오른 지 오늘로 206일째. 케이블업체 씨앤앰이 도급업체를 바꾸는 과정에서 해고된 하청업체 노동자 임정균, 강성덕씨도 서울 태평로의 대형 전광판에서 37일째 농성 중이다. 이 땅에서 노동자로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아프게 보여준다.

▦ “당신들이 외롭지만 완전히 고립된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쌍용차 고공농성을 응원하기 위해 광화문광장 1인 시위를 시작한 배우 김의성씨의 말이다. 뒤를 이어 웹툰작가 강도하씨가 광장에 섰다. 하늘에 오른 노동자들은 오늘도 칼바람을 견디며 온 몸으로 외치고 있다. “여기, 사람 있소!” 그 안타까운 외침이 허공에 흩어지지 않고 눈꽃처럼 거리에, 광장에 내려 앉을 수 있도록 더 많은 이들이 손을 내밀어야 할 때다.

이희정 논설위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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