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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영 기자

김혜영 기자

등록 : 2018.04.15 14:00
수정 : 2018.04.15 14:27

“알뜰살뜰 모아 자식에게? NO!… 우린 다 쓰고 가련다”

아낌 없이 쓰고 가는 '쓰죽회'

등록 : 2018.04.15 14:00
수정 : 2018.04.15 14:27

돈, 재능, 사랑 등 평생 일궈온 자산을 죽기 전까지 기꺼이 쓰고 나누고 환원하며 삶을 누리기로 의기투합한 노인들이 있다.경북 안동의 쓰죽회 회원들이다. 유산 한 푼 더 물려주겠다는 고정관념을 벗어던지자 노년의 인생은 그 자체로 충만했다.

경북 안동에 사는 최준걸(77)씨는 2015년 가을, 친구 13명과 지중해 여행을 다녀왔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남프랑스를 훑는 10박 12일 여정이었다. 2년간 회비를 모아 저축하고, 매달 모여 점심을 먹으며 준비한 여행은 빠듯한 일정이었지만 즐거웠다. 바르셀로나 구엘공원, 톨레도 요새, 코르도바의 골목과 꽃길부터 프로방스의 아를과 아비뇽에 이르기까지, 명승지를 둘러보고, 사진을 찍고, 그곳 문화와 역사에 대해 공부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한 친구는 기차 안에서 여행기를 쓰거나 시상(詩想)을 끼적이기도 했다. 여행자 명단을 보고 ‘나 죽었다’ 걱정했다는 가이드가 90세까지는 거뜬히 여행하겠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을 정도로 열정적이고 유쾌한 모임이었다. 회원 14명인 이 모임의 이름은 ‘쓰죽회’. 남은 여생 아끼지 말고 다 ‘쓰’고 ‘죽’자는 의미다. 최씨는 이 모임의 회장이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여행 중 쓰죽회 멤버가 쓴 여행기. 안동 쓰죽회 제공

“10년 전 안동병원에 생긴 리더스포럼이라는 노인교육기관 1기 졸업생들이에요. 안동 초대 민선시장도 있고, 뉴질랜드 총영사를 지낸 사람도 있고, 각계각층의 다양한 친구들이 모였죠. 그런데 같이 모여 점심 먹고 어울리다 보니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 이러지 말고 매월 회비를 내서 우의를 돈독히 하며 여행도 다니고, 주변에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보살피기도 하자, 결의를 맺었어요. 그게 쓰죽회가 된 거죠.”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장크트 길겐 마을을 여행 중인 쓰죽회 멤버들. 안동 쓰죽회 제공

알뜰살뜰 모아 자식에게? NO!

알뜰살뜰 모은 재산을 자식에게 남겨주고 떠나겠다는 생각은 한국의 부모라면 응당 지니게 마련인 상식적 판단이자 문화였다. 자식이 윤택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더 기반을 닦아주고 싶다는 바람이 부모 된 모든 이들의 인지상정이었다. 하지만 수명은 점점 길어지고, 은퇴는 점점 빨라진다. 자식에게 무언가 남기기 위해선 허리띠를 더 길게 졸라매야 하는데, 대가족으로 함께 살며 자녀 봉양을 받던 시절은 끝났다. 재산이란 ‘자식한테 안 주면 맞아 죽고, 다 줘버리면 굶어 죽고, 조금씩 주면 (더 달라고) 쪼여 죽는 것’이란 우스개 아닌 우스개가 장노년층에 상식으로 자리잡고 있는 시대다.

“쓰죽회 회원들은 자식들에게 뭘 물려주겠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이미 개체독립을 했잖아요.” 61학번으로 서울서 대학을 다니다 귀향해 자영업을 했던 최 회장은 일찍이 사업을 정리하면서부터 여생을 즐겁고 아름답게 살겠다는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자식은 만 19세가 넘으면 저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거예요. 자식에게 얽매여 재산 물려주고 시간 뺏기고 하지 않아요, 우리는. 저희에게 주어진 시간은 최대한 우리끼리 주고 받으면서 활용합니다.”

자식들로서는 섭섭할 만도 하다. 부모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딛고 일어서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게 현실이다. “우리 아이들은 기꺼이 이해를 합니다. 불평이나 간섭도 전혀 없고요. 제가 딸이 둘인데, 모두 서울로 출가해 살고 있죠. 다 성장했고, 부모한테 뭘 더 바랄 게 있나요? 서로 기대지 말고 각자의 삶을 살자, 어릴 때부터 교육도 그렇게 시켰어요.”

오스트리아 장크트 길겐 성당 뒤편의 창가에서 포즈를 취한 쓰죽회 멤버들. 안동 쓰죽회 제공

안동 쓰죽회는 2010년 중국 항주, 상해, 2011년 일본 북해도, 2012년 독일과 헝가리, 폴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등 동유럽 6개국, 2013년 괌 등 매년 다양한 곳으로 해외여행을 다녔다. 국내여행도 자주 다녀 최근에는 경북 봉화군으로 기차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내가 밥을 살 테니 회장이 시간, 장소 좀 잡아달라’는 자발적이고도 비정기적인 점심 모임도 끊이지 않고 이어져 안동 일대 여러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사고 있다고.

‘다 쓰고 죽겠다’의 목적어가 항상 돈인 것은 아니다. 재능을 기부하고 사회에 봉사하는 것도 다 쓰고 가야 할 이들의 자산이다. “가진 돈이 많아 다 쓰고 죽자는 게 아니니까요. 물질적으로만 다 쓰자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가진 것을 작은 부분이라도 사회에 환원하고, 남에게 베풀자는 의미라고 쓰죽회를 정의합니다. 기회 될 때마다 불우이웃시설을 방문해 조금씩 도움을 주기도 하고 그러죠.”

자식 위해 행복 미루지 않아

올해 환갑인 전업주부 임형숙(가명)씨는 멋쟁이로 친구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알렉산드로 미켈레가 혁신시킨 구찌의 신상 핸드백과 7㎝ 하이힐을 여전히 근사하게 소화하고, 피부과 시술도 종종 받는다. 고위공무원으로 정년 퇴직한 남편의 연금과 재취업한 직장에서 받아오는 월급으로 생활은 꽤 풍족한 편이다. 회계사인 아들 내외가 2층에 살고 있지만, 손주를 돌보는 시간보다 친구나 형제자매들과 어울려 밖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다. 아직 자기집 마련을 못한 아들네가 곧 분가할 예정이지만, 돈을 보태줄 계획은 없다.

“자식들 물려주려고 나 쓰고 싶은 걸 못 쓰며 살고 싶진 않아요. 지금도 하고 싶은 건 다 하면서 사는 편이고요. 좀 더 나이가 들면 서울 근교에 언니네랑 합쳐 전원주택 짓고 텃밭 가꾸며 사는 게 꿈이에요. 자식에게 미리 재산을 물려주고 아등바등 살 생각은 전혀 없어요.” 임씨는 친구들을 만나나 형제들을 만나나 요새는 다들 똑같은 얘기를 한다고 말했다. “내 재산은 내가 다 쓰고 죽는 거지, 자식 물려줄 생각은 하지 말자는 거죠. 우리가 아무리 늙었어도 지금 내 삶이, 내 행복이 가장 중요한 거지, 자식들 위해 희생하며 생을 마치고 싶진 않아요. 자식들에게는 그때그때 마음을 표현하며 정을 나누는 걸로 충분하니까.” 가끔 옷 한 벌씩 사주거나 작년 봄 아들 손자 며느리를 데리고 유럽 여행을 다녀오는 식이다.

대신 “자식한테 무거운 부양의 짐을 지우지 않는 것이 부모가 줄 수 있는 선물 아니냐”고 임씨는 말한다. 시장조사전문기업 마크로밀 엠브레인이 올 2월 19~59세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실시한 ‘노후생활 불안 및 노후 준비’에 관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아무리 어려워도 힘든 시대를 보내야 하는 자녀들에게 부양의무를 지우고 싶지 않다는 응답이 83.8%에 달했다. 자녀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연령이 높을수록 많아 50대는 91.6%, 40대는 85.2%, 30대는 81.2%, 20대는 77.2% 순이었다. 자녀에게 기대지 않겠다는 이 같은 의지는 자연히 나 가진 것을 대책 없이 물려줄 순 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써도 써도 남을 만큼 재산이 많은 슈퍼리치가 아니라면 내 재산은 내가 쓰다 갈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고도 불가피한 것이다.

부자가 아니어도 ‘다 쓰고 가리’

선박 기관장으로 일하다 은퇴한 부산의 강표노(74)씨는 3억3,000만원짜리 아파트 한 채가 전 재산이다. 5년 전 한 채뿐인 이 집을 담보로 주택연금에 가입한 그는 종신 지급 형식으로 매달 100만원을 수령하고 있다. 국민연금 15만원에, 기초연금 20만원, 여기에 은행에 들어둔 사적 연금 40만원 정도가 나오니 한 달 생활비로는 충분하다. 다만 2남 1녀의 자녀들에게 남길 게 아무것도 없다.

“우리 애들이 어디서 얘기를 듣고 와선 먼저 건의를 하더라고요. 지들이 용돈은 수시로 줄 수가 있는데, 정기적인 생활비는 쉽지 않다는 거예요. 집은 아버지가 이제껏 힘들게 모아 마련한 거니까 원하면 이런 데 가입해서 마음 놓고 써도 된다 하더라고요.”

강씨는 주택연금에 가입한 그날부터 “재벌이 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회원 9,800명의 부산 남구노인복지관에 다니는 그는 7년째 노인대학 회장을 맡고 있어 대외 활동이 많고, 용돈도 제법 많이 필요했다. 형편 어려운 회원들에게는 식권도 나눠주고, 막걸리도 사면서 회장 노릇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말년에 용돈 때문에 기죽는 일 없이 쓰고, 남으면 손주들 용돈도 주고 그럽니다. 좋은 점이 억수로 많지요.”

강씨처럼 주택을 자녀에게 상속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노인은 4명 중 1명으로 크게 늘었다. 한국주택금융공사가 지난해 말 55~84세의 노인 3,000가구, 주택연금 이용 600가구를 대상으로 실시한 ‘2016년 주택연금 수요실태조사’에 따르면, 주택을 소유한 60~84세 노인 중 25.2%가 보유 주택을 자녀에게 상속할 의향이 없다고 답했다. 2008년 12.7%에 비하면 두 배나 늘어난 수치다. 특히 55~59세는 10명 중 4명(39.1%)이 비상속 의향으로 나타나 젊을수록 자녀에게 집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학력이 높을수록 주택 비상속 의향이 높아지는 것도 특징이었다.

주택연금을 선택한 이유로는 ‘자녀들에게 생활비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아서’(89.8%)가 가장 많이 꼽혔다. ‘노후생활에 필요한 돈을 준비할 다른 방법이 없어서’(69.1%)가 그 뒤를 이었고, ‘좀 더 풍족한 삶을 누리고 싶어서’(62%)로 세 번째였다.

‘백세시대’ 행복의 조건

아무것도 남길 게 없어 자녀들한테 미안함을 느낄 때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안함보다는 고마움이 크다. “젊어서 만날 배를 타고 나다니다 보니 남들처럼 재테크를 하거나 돈을 모으지는 못했거든요. 마지막에는 선박회사 감독까지 하면서 열심히 모아 월급만으로 집을 석 채까지 샀었죠. 그때만 해도 삶이 괜찮았어요. 그러다 외환위기(IMF) 때 친척이랑 아는 장로님한테 집 담보를 잡혀줬다 두 채를 날렸죠. 집이 한 채만 남았을 때는 막막하다 싶었는데, 연금 들어서 생활비로 쓰자고 마음 먹고 난 뒤로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요.”

유산 분배 문제가 아예 없다 보니 오히려 형제들 사이도 좋아졌다. 자식들이 나쁜 마음을 먹어서가 아니라 사업을 하다 보면 부득이 담보가 필요할 때가 있다는 걸 강씨는 잘 안다. 누구는 해 주고 누구는 안 해주고 분란이 생길 수도 있고, 일이 마음대로 잘 안 돼 집이 넘어가 버릴 수도 있다. 자식들도 부모가 집 끌어안고 아등바등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는다. “아이들이 ‘그건 아버지 몫이에요’ 미리 해놓으니까 아예 바라보질 않아요. ‘저건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다 쓰고 가는 것이다’라고 스스로들 생각하는 거죠.”

강씨가 다니는 복지관에는 3억짜리 아파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금이 없어 200원짜리 자판기 커피도 못 사먹는 사람들이 많다. “저는 그렇게 안 합니다. ‘옛날에 하도 없이 산 게 한이 돼서 자식한테 이거 한 채는 물려줘야 한다’고 버티는 분들이 많아요. 하지만 정작 자식들 마음은 안 그래요. 엄마, 아버지가 행복해 하는 걸 자식, 며느리, 사위가 더 환영하는 거죠. 부부끼리 사이 좋게 살고, 손잡고 여행도 같이 다니니까. 부모님 생활비 걱정할 필요도 없고요.”

돈 문제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끊임없이 현재를 유예하며 훗날로 행복을 미뤄두는 견인주의(堅忍主義)적 세계관은 오랜 세월 한국인의 정신구조를 지배해왔지만, 거대한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한번뿐인 인생, 지금 행복하겠다는 욜로(YOLOㆍYou live only once)의 정신이 젊은이들의 전유물일 수는 없다.

“저는 사는 게 엄청 재밌어요. 남들이 다 30ㆍ40대처럼 뛰어다닌다고들 하죠. 노인정에서 치매예방 강의도 하고, 요양보호사, 노인심리상담사 같은 자격증도 열 개나 땄거든요. 마라톤이랑 탁구도 열심히 하고 등산도 자주 다니고요.”

주택연금은 2007년 출시된 이래 올 1분기 가입자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64.7%가 증가한 3,927명이 신규 가입했다. 107세에 가입해 최고령 가입기록을 세운 어르신은 매월 168만원을 받는다. 현재 주택연금을 받고 있는 총 4만4,000여명 중 100세 이상 수령자가 총 17명. 이 중 최고령이 111세니 ‘백세시대’가 과장된 수사만은 아니다. 쓰죽회는 이미 당도한 미래이자 시대정신이다. 부모도 독립하고 자식도 독립하는 각자 독립의 시대를 모두가 미리 준비해야 할 때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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