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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원망했던 엄마가 시한부...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까요

입력
2018.01.22 04:0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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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영의 화해] Question

칭찬 한번 없이 엄하게 자란 자매

비교 일삼는 엄마 미워했지만

가난, 시댁 차별 견딘 삶 측은해

이젠 그저 살아주기만 바라는데

식사도 않고 침묵하니 가슴 미어져

저희 엄마는 시한부 환자입니다. 재작년 말기암 판정을 받았고 대장에 있던 암이 간과 폐까지 전이돼 수술을 했어요. 지난해 11월 말 병원에서 폐에 전이돼 있던 암이 커졌다며 더 이상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더군요. 3개월에서 6개월 남았다고요. 저희 가족은 이제 엄마를 보내드려야 합니다.

엄마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엄마는 언니와 저를 엄하게 키웠고 칭찬이나 격려를 해준 적은 거의 없습니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늘 입에는 ‘돈돈돈’이었고 다른 집 딸과 우리 자매를 늘 비교했습니다. 둘 다 미대 입시를 준비했다가 지금은 카페 아르바이트와 제과점 직원으로 일하고 있으니 엄마도 속이 터지셨겠지요.

엄마와 관련된 따뜻한 기억은 초등학생 때 옷에 구멍이 났다고 친구들에게 놀림 받고 우는 저를 ‘그랬냐’고 안아주셨던 게 전부예요. 엄마는 남의 기분이나 사정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결과만 놓고 애기하는 사람이었어요. 전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인정받지 못했고 어두운 삶을 살다가 뒤늦게 20대 초에 그게 터지면서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앓았습니다. 엄마에게 ‘우울증인 것 같은데 정신과에서 상담 받아볼까?’ 했더니 엄마는 ‘네가 너를 잘못 관리해서 그런 거다. 밖에 나가서 운동이나 해라’고 면박을 주셨어요 어느 날은 TV에서 가족과 갈등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나왔는데 엄마는 역시 그 사람의 탓인 것처럼 얘기하더군요. 화가 난 저는 ‘정신과에 간다니까 엄마 딸이 정신병자인 것 같아서 싫었냐’고 소리치며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당황한 엄마는 그런 게 아니라며 저를 안고 달래줬지만, 저는 그날 병가를 내고 출근을 안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어두웠던 시절에 대한 모든 원망을 엄마에게 쏟아 부었던 것 같기도 해요. 엄마는 그때마다 그냥 허허 웃어넘겼지만 상처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엄마는 6남매 중 셋째예요. 조부모님은 남아선호가 강했던 분들이라, 삼촌들을 공부 시키기 위해 서울로 보내면서 뒷바라지하라고 큰 이모를 같이 보냈어요. 결국 동생 보는 일과 집안 일은 모두 엄마 차지였죠. 할머니는 엄마가 말을 안 들을 때마다 ‘저걸 어떻게 잡아 죽이지’라고 했대요(실제로 엄마가 우리 자매에게 자주 하시던 욕입니다). 할아버지는 말로는 ‘우리 딸이 최고다’라고 하셨지만, 정작 재산은 다 삼촌들에게만 물려주셨다고 해요. 엄마가 아빠와 결혼하고 아파트를 사려고 할 때도 한 푼도 안 빌려 주셨다고 합니다.

엄마는 평생 부족하지 않게 살려고 발버둥쳤어요. 아프면 병원비가 드니 그냥 죽어야 한다고 자주 말했어요. 아빠와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지만 돈과 시댁 문제가 걸리면 늘 싸우셨어요. 시댁은 딸만 둘을 낳았다고 엄마를 차별했습니다. 엄마가 살아오면서 행복했던 시간이 과연 있었을까 싶어요. 평생을 발버둥쳤지만 결국 내 집 하나 없이 반지하 월세방에 네 식구가 살고 있으니 엄마가 아픈 것도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한때는 엄마에게 사과를 받고 싶기도 했지만 지금은 가족 모두 엄마가 살기를 간절히 바라기에 모든 감정을 내려놓은 상태예요. 저는 엄마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아요. 욕해도 좋고 남들과 비교해도 괜찮으니 그저 살아서 옆에 있어주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집에 차라도 있었으면 엄마 소원이었던 전국일주도 해드릴 텐데 형편상 그것도 힘들고, 편히 가실 수 있게 호스피스를 알아보는데도 대기자가 많아 바로 들어갈 수 없으니 너무 답답합니다.

저희 가족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는 있지만 엄마를 포기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엄마는 모든 치료를 거부하고 챙겨드리는 식사도 거의 안 하세요. 뭘 원하는지, 뭐가 힘든지 물어봐도 도통 얘기해주지를 않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이제 그만 편하게 해달라고만 하세요. 남은 기간 동안 어떻게 하면 엄마를 잘 보내드릴 수 있을까요. 고생만 한 엄마의 인생이 너무 불쌍해서 가슴이 미어집니다.

(하주현, 가명 30세, 제과점 직원)

Answer

미움 덜었지만 화해한 것은 아냐

잘못하면 사후 분노, 죄책감 폭풍

시대상 이해하고 솔직한 대화를

엄마가 뭐라고 대답하든

그건 미안하고 사랑했다는 말

주현씨, 우리는 언제나 가까운 사람을 떠나 보내요. 부모님을 보낼 때도 있지만 그게 형제가 되기도 하고 친구, 때로는 자식이 되기도 하지요. 누군가를 떠나 보내는 건 인생에 있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그러나 익숙하고 자주 보는 풍경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자신의 일로 닥쳤을 땐 잘 실감이 되지 않죠. 주현씨는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엄마를 보며 그저 살아 계시기만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어요. 그러나 엄마와 심정적으로 화해를 한 건 아니에요. 이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으면 엄마가 돌아가신 뒤에 엄청난 마음의 폭풍을 맞을 수 있어요. 제가 해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엄마에 대한 주현씨의 해결되지 않은 분노와 죄책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입니다.

주현씨는 왜 그렇게 엄마한테 사과를 받고 싶을까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났을까요. 주현씨 상처의 가장 큰 원인은 엄마의 억척스럽고 억새풀 같은 특성 때문이에요. 엄마는 본인의 삶 자체가 험하기 그지 없었어요. 딸이란 이유로 너무 많은 희생을 강요 받았고 시댁으로부터는 차별을 받았죠. 부모님이 남자 형제들에게만 재산을 물려주고 어려울 때 10원 한 푼 빌려주지 않은 일은 아마 일평생 가슴에 못으로 박혔을 거예요. 돈이 중요했을 겁니다. 남의 도움 안 받고 살려고 발버둥을 쳤을 거예요.

그런 엄마는 자식에게 부드러운 감정을 표현하는 건 아이를 약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무엇보다 부드럽게 말하면 자기가 약해질까 봐 두려웠을 거예요. 눈물을 보이기라도 하면 자기가 무너질까 봐. 그러니까 자식을 강하게 키운답시고 늘 독한 말, 센 말만 해온 거죠. 그 밑면에 전혀 다른 마음이 있더라도요. ‘돈돈돈’하는 건 ‘돈이 아깝다’가 아니라 ‘아껴 쓰라’는, 다른 집 딸과 비교하는 건 ‘넌 걔만 못해’가 아니라 ‘더 열심히 해보렴’이었을 거예요.

만약 엄마가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했다면 딸들은 훨씬 더 잘 받아들였겠죠. 그러나 엄마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기엔 딸들은 너무 어렸어요. 부모의 마음을 알아차리려면 적어도 마흔은 넘어야 해요. 제가 늘 부모들에게 해주는 말이 있어요. 마흔 넘은 자식을 키우는 게 아니라면 알아듣도록, 좋게 얘기해주라는 거에요. 자식들은 결코 알아듣지 못하거든요. 주현씨 역시 그걸 알기엔 너무 어렸고 게다가 엄마의 따뜻함을 경험한 횟수도 부족했어요. 따뜻함을 많이 느꼈다면 그걸 토대로 엄마의 마음을 잘 해석해냈을 거에요.

아마 주현씨의 엄마는 지금도 착각을 하고 있을 거에요. 자신이 자녀들을 격려하고 지지해줬다고. 잘 되도록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 했노라고요. 물론 그렇기 때문에 주현씨가 엄마를 용서해야 한다는 건 아니에요. 딸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표현을 한 건 엄마의 잘못이 맞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꿈에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한 번쯤 생각은 해볼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어려운 시대를 억새풀처럼 살아온 엄마에 대해 주현씨의 마음에 조금의 틈새는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거예요.

또 하나 해결해야 할 것은 주현씨 마음 안의 죄책감입니다. 주현씨는 엄마가 많이 미웠을 거에요. 하지만 미움만 있진 않았겠죠. 엄마가 표현은 독하게 했지만 그 밑면엔 늘 주현씨를 사랑했던 것처럼, 주현씨도 엄마에 대한 미움이 전부는 아니었던 거예요. 엄마의 삶의 끝자락에서는 엄마가 너무나 불쌍하고 모든 걸 제쳐두고 조금이라도 더 살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 마음은 엄마가 주현씨를 생각하는 마음과 똑같아요.

그런데 지금 엄마가 아프다는 이유로 주현씨가 엄마에 대한 미움을 구석으로 밀어 버리면, 그리고 그 상태에서 엄마가 세상을 떠나 버린다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내가 미워해서 엄마가 세상을 떠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돼요. 그래서 주현씨가 엄마와 이것에 대해 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봐요. 얘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엄마가 돌아가시면 오해를 풀 대상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주현씨는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될 거예요.

주현씨, 엄마에게 말하세요. 내가 때로 엄마를 미워했던 적이 있었다고. 담담하고 솔직하게 엄마를 원망했던 적도,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돌아보니 그런 마음만 있는 게 아니더라, 엄마가 무슨 말을 해도 좋으니 그냥 곁에 더 살아있어 주기만을 바라는 마음이 내 안에 분명히 있다, 엄마가 그토록 원하던 전국일주를 못 시켜주는 나의 경제적 미숙함이 지금은 너무 원망스러울 뿐이다라고요.

엄마가 지금까지 해온 드세고 독한 말들은 본인이 약해질까 봐 했던 측면이 커요. 그러나 지금은 엄마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어요. 수많은 방어기제를 걷어내고 가장 정직한 심정일 가능성이 높아요. 그러니 저에게 사연을 보낸 것처럼 지금 엄마에게 갖고 있는 마음을 전하시라는 거예요. ‘용서해주세요’ 같은 말은 필요 없어요. 지금 주현씨 안에 있는 말을 그대로 하세요.

주현씨가 그렇게 말하면 엄마는 뭐라고 대답할까요. 저는 엄마가 ‘미안했었다’라고 말할 것 같아요. 물론 제가 100% 장담할 순 없겠죠. 그러나 주현씨는 엄마의 말을 해석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왔고, 엄마는 주현씨가 잘 이해하도록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러니 제가 중간에서 통역을 해드릴게요. 엄마가 뭐라고 말하든 그건 미안했다는 말이에요.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설령 엄마를 미워한 적이 있었다는 말이 잘못 받아들여질까 두려워하지 마세요. 엄마도 알아들으실 거예요. 그게 ‘나는 엄마를 믿어요, 엄마 편하게 가세요’ 라는 뜻이라는 걸.

정리=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지면을 통해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신청해 보세요. 사연은 한국일보 사이트(http://interview.hankookilbo.com/store/advice.zip)에서 상담신청서를 내려 받아 작성하신 후 이메일(advice@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에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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