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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그림 어떻게 그려요?” 묻는 한국인들… 마음 따르는 법 잊은 거죠

입력
2018.08.08 04:4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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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해외서 미술치료 공부한 정은혜씨 

 국내 돌아와 뜻밖의 ‘저항’ 겪어 

 맘대로 그리라면 환자들 괴로워해 

 평생 비교당하는 삶 살아온 탓 

 #2 

 고민 말고 일단 표현하면 후련해 

 한계 정해진 컬러링북은 반대 

 백지의 막막함 이겨내면 큰 기쁨 

“빈 종이를 넘어서는 법”을 아는 자만이 누리는 기쁨이 있다. 백지만 보면 당황하는 한국인들에게 정은혜 미술치료사가 그림일기를 권하는 이유다. 제주=김혜영 기자
“빈 종이를 넘어서는 법”을 아는 자만이 누리는 기쁨이 있다. 백지만 보면 당황하는 한국인들에게 정은혜 미술치료사가 그림일기를 권하는 이유다. 제주=김혜영 기자

“우린 모두 예술가로 태어났어요. 자신의 삶 전체를 창조적으로 만들고 싶고, 하루하루의 일상을 통해 자신을 창조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와 함께요. 우리 앞에 주어진 무수한 예술의 기회 앞에서 두려움을 떨칠 일만 남은 거죠.”

이민 1.5세대로 캐나다에서 자란 정은혜(46) 미술치료사는 남다른 이력의 소유자다. 미술 전공자로 한국에 돌아와 아트센터에서 일하다, 치료사의 길을 걷고자 미국 시카고로 향했다. 시카고예술대학에서 미술 치료 석사학위를 받은 뒤 잡은 첫 직장은 시카고의 한 정신병동, 두 번째 직장은 청소년거주치료센터였다. 아프고 가난한 중증 환자들, 학대와 방치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손목을 긋거나 서로 죽이겠다고 덤비는 청소년들과 그림을 매개로 만났다.

한국에 돌아와 치료사이자 문화 예술 기획자로 제주에서 여러 프로그램을 기획 중인 그가 얼마 전부터 마음이 아픈 이들에게 건네는 조언은 “그림일기를 그리라”는 것이다. 지난해엔 그간 숙고한 ‘그림일기론’을 담아낸 저서 ‘변화를 위한 그림 일기’(샨티)까지 펴냈다. 갑자기 그림일기라니. 제주 조천읍 선흘리에 자리한 그의 치료 스튜디오를 찾아 까닭을 물었다.

 -원래 그림일기가 치료에 쓰이나요. 

“한국에 돌아와 처음 치료를 시작할 때 많이 부딪힌 문제에 대한 답을 찾다 보니, 그림일기 이야기를 하게 됐어요. 제가 다양한 재료를 꺼내 놓고 ‘뭐든지, 하고 싶은 걸, 자유롭게 해 보세요’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한결같이 당황했거든요. 굉장한 저항이 있었어요. 심지어 어떤 중년 여성분은 따로 찾아와 ‘제발 뭘 하라는 건지 칠판에 써 주세요’라고 했죠. 하고 싶은 건 없고, 하라는 걸 알려 주면 그걸 할게요. 말 잘 들을게요. 이런 느낌이요. 창조적인 것을, 답이 없는 것을 해 보라고 하는데 왜 자꾸 시험 문제를 풀듯이 응하는 걸까. 그런 고민이 많이 됐죠.”

 -전에 없던 경험인가요. 

“극단적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환자들도 저런 반응은 보인 적이 없거든요. 내가 한국 사회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노력을 많이 했어요. 깊이 이야기도 들어 보고요. 미술은, 예술은, 창조는 답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틀릴 수가 없고. 마음대로 하면 되는데도 틀릴까 봐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거였죠. 학교에 다니고 제도 속에서 늘 평가받고 점수로 판단되고, 비교당하는 상황에 다들 너무 오래 노출됐던 거예요. 저는 판단할 생각도 없고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그리라는데도 ‘몇 호 붓으로 그려요?’ ‘무슨 색으로 그려요?’ 이런 질문을 계속 받았어요.”

 -마음대로 하는 법을 잊은 거네요. 

“그렇죠. 너무 멀리 왔기 때문에 단계적으로 돌아갈 방법이 필요했어요. 한 번도 흔들리지 않은 믿음이 있는데 ‘우린 모두 예술가로 태어났다’는 거예요. 일단은 두려움을 넘도록 도와야 하니까요. 빈 캔버스, 백지, 새 원고지를 마주하면 누구나 두렵잖아요. 막막하잖아요. 그런데 해도 해도 너무 두려워하니까 더 자주, 더 많이 반복적으로 일상을 들여다보는 형태로 시작해 보자는 거죠. 백지가 주는 두려움을 이겨 낸 기쁨, 그 막막함을 통과해 낸 기쁨이야말로 창조가 주는 가장 큰 행복이거든요.”

정은혜 치료사는 “차곡차곡 그림을 그려 쌓다 보면 자신의 감정이 어디로 흘러서 어떻게 쏟아져 내리는지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고 조언한다. 제주=김혜영 기자
정은혜 치료사는 “차곡차곡 그림을 그려 쌓다 보면 자신의 감정이 어디로 흘러서 어떻게 쏟아져 내리는지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고 조언한다. 제주=김혜영 기자

 -글로는 불충분한가요. 

“그림이라는 도구는 나를 굉장히 다채롭게 볼 수 있는 방법이거든요. 우리는 논리나 스토리의 구조에 딱딱 들어맞지 않아요. 삶도 마찬가지고요. 말로 풀어내게 하면 ‘엄마가 어릴 때 나를 때렸어. 그래서 난 실패자야. 난 이럴 수밖에 없어’라는 식의 구조에 빠지는 모습을 많이 봐요. 그림은 논리적이지 않으니 의도하지 않은 걸 그려 버리기도 하고, 감정을 돌아보게 하거든요.

또 미술의 특화된 장점은 한눈에 들어오는 증거가 남는다는 거예요. 얼마 전 1년 넘게 치료받은 청년의 그림을 마당에 깔아 놓고 봤는데 둘 다 너무 놀랐어요. 그간의 감정 기복이 온전히 담겼어요. 글로 썼다면 수백 페이지였을 거예요.”

 -혼자 그리면 해석해 줄 전문가가 없잖아요. 

“우리가 흥분해서 쓴 편지를 나중에 읽으면 우스울 수 있는 것처럼, 감정을 표현한 그림을 시간이 지나 보면 달리 보이거든요. 대단한 훈련이 필요하다기보단, 반복적으로 하다 보면 또 나중에 차분해지면 의도치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해요. 복잡할 필요 없이 하고 싶은 대로 재미있게 그리면 돼요. 그리면 시원하고 후련해요.”

 -감정을 그린다는 게 어렵게 들려요. 

“뭐든 일단 표현하면 시원해요. 우리 안의 감정은 밖으로 나오고 싶어 해요. 그래서 표현되지 못한 감정은 어떻게 해서라도 새어 나오죠. 악몽, 말실수, 표정, 병으로라도 튀어나오는 거죠. 미술은 그 감정의 통로를 만들어 주는 데 굉장히 좋은 매체예요.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이 빠져나와서 그림에 들러붙는다고 생각하면 후련하죠. 감정은 안에 남아 있으면 들여다보기 어렵거든요. 내 안에 있는 분노, 슬픔은 실제보다 너무 크게 느껴져요. 무엇으로든 밖으로 나가야 그때 괜찮아져요.”

 -자주 하면 창조성 회복이 되던가요. 

“되도록 자주 반복하다 보면 도움은 되죠. ‘삶은 숙제가 아니라 축제’라는 말을 좋아해요. 답이 있는 숙제를 풀 듯 심각하게 임할 것이 아니라, 기꺼이 예술가로 일상을 만끽하고 누리자는 거죠. 그런데 지금 많은 사람이 이 축제에 뛰어들어 마음대로 해 볼 생각도 없고 준비가 안 됐다는 거잖아요. 마치 숙제를 해 놓지 않아 축제를 즐길 수 없는 것 같은 상황이라, 그림일기라는 숙제를 통해 막막함을 통과하는 힘을 얻어 보고, 궁극적으로 창조적 일상이라는 축제에 참여하자는 거죠.”

“비교를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런 자신을 부끄러워하게 됐어요. 일기장에 그리고 혼자 볼 건데 뭐 어때요. 다시 예술가가 돼 보세요.” 제주=김혜영 기자
“비교를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런 자신을 부끄러워하게 됐어요. 일기장에 그리고 혼자 볼 건데 뭐 어때요. 다시 예술가가 돼 보세요.” 제주=김혜영 기자

 -컬러링북이 인기잖아요. 

“전 컬러링북에 반대해요. 우리가 뭔가를 창조하고 싶고, 예쁜 걸 해내고 싶은 욕구는 너무 현실적이에요. 그런데 컬러링북은 결과물은 예쁘지만 내 것이 아니에요. 창조적인 작업에서 강조하는 ‘답답함, 막막함, 두려움을 통과해 낸 기쁨’이 없잖아요. 치료 중엔 그런 기쁨을 매일 봐요. 직접 그릴 땐 남들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거여도 내가 직접 미지의 세계를 통과해 낸 결과물이면 소중하거든요. 막막함을 견디고 싶지 않은 사람이 많으니 컬러링북이 인기죠. 미술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사회의 문제 같아요. 더는 불편함을 감수할 에너지와 여력이 없도록,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많은 제도 속에 살아가니까요.”

 -일기 좀 엿봐도 될까요. 

“개인적으로도 용기가 필요한 시기를 살고 있어 가장 최근엔 꽃과 맹수를 그렸어요. 예멘 난민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는데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비난을 받기도 하고, 내가 돕는 이들에게 피해가 갈까 불안하기도 해요. 몇 달 전 용기가 필요할 땐 기운이 불끈불끈한 칼리(인도 신화에 나오는 여신) 그림을 그리고 힘을 얻었는데, 이번엔 가만히 웅크린 맹수를 그린 걸 보고 ‘나도 좀 지쳤구나’라는 생각을 하던 참이에요.”

 -특히 일기를 권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정말 도움을 요하는 상황인데도 돈, 시간, 치료사를 찾을 여유가 없고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분이 썼으면 해요. 내 삶을 다 끄집어 내보여야 할 거 같아 시작을 못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림일기는 혼자 할 수 있어요. 짧게 5분만 들여도 돼요. 누구한테 보여 줄 거 아니잖아요. 못 그려도 돼요. 우리 모두에게 답이 없는 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는 연습이, 힘이 필요한 시기 같아요.”

[저작권 한국일보] 그림일기 김민호기자/2018-08-07(한국일보)
[저작권 한국일보] 그림일기 김민호기자/2018-08-07(한국일보)

제주=글ㆍ사진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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