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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텔레비전의 기억

입력
2015.11.26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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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쓰던 브라운관 텔레비전이 고장이 나는 바람에 결국 새로 사게 되었다. 기왕 사는 거 조금 큰 놈으로 장만하자는 마음을 먹고 매장에 들렀더니 내가 사려고 했던 40인치는 큰 축에도 끼지 못했다. 집에서 보는 텔레비전이 왜들 그렇게 큰지, 하긴 집이 넓으면 큰 게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새로 산 텔레비전을 연결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몇 개의 채널을 삭제하는 것이었다.

내가 지우는 것은 식당이나 부모님 집에 들를 때 보게 되는 종편 채널들이다. 볼 때마다 눈과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방송들이 혹여 채널을 돌리다가 나올까봐 두려워서 아예 삭제를 하는 것이다. 나는 뉴스 정도 외에는 아예 텔레비전을 보지 않기 때문에 그저 시큰둥한데 드라마를 즐겨 보는 아내는 꽤나 기쁜 눈치다. 전에 보던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질이 좋은 것은 분명하다. 아내도 기뻐하고 전기도 훨씬 덜 먹는다니 잘 산 셈이다.

우리 집에 처음 텔레비전이 들어온 때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76년이었다. 깊은 시골 마을이라 마을 전체에 새마을지도자네 집에 텔레비전이 한 대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집이 두 번째였는데 서울에서 장사를 하던 이모가 선물해준 것이었다. 15인치쯤 되는 화면에 당연히 흑백이었다. 하지만 얼마나 기쁘고 설레었던가. 그것에 비하면 새로 산 텔레비전은 하늘과 땅 차이지만 기쁨의 강도 역시 하늘과 땅 차이다. 두 번째로 기뻤던 것은 컬러텔레비전을 장만한 80년대 중엽이었다. 그 때의 신기함이라니.

우리나라의 컬러텔레비전에는 특이한 역사가 숨어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70년대 중반 이후에 컬러텔레비전을 다량 생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국내에는 팔지 않고 전량 해외에 수출만 하고 있었다. 충분한 기술력을 갖추고 생산까지 하고 있었는데 왜 우리나라는 80년에 들어서야 컬러 시대를 열게 되었을까.

그것은 대통령 박정희의 지시 때문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1,000달러가 될 때까지 방송을 미루라는 명령이었다. 국민소득 운운보다 더 큰 이유는 국민들 간의 위화감 조성이었다. 흑백텔레비전도 없는 사람들이 많은데 컬러까지 보급된다면 빈부 격차에 대한 반발이 커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특별히 농민과 빈민을 언급하며 내린 이 같은 지시는 뜻밖의 효과를 가져왔다. 대통령이 가난하고 없는 사람들 편에 서서 정치를 한다는 이상한 감격 같은 게 국민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던 것이다. 지금도 나이든 농민들이 기억하는 박정희에 대한 향수는 그와 같이 농민들 편에 섰던 대통령이라는 신화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오늘날 피폐해지다 못해 붕괴의 위기에 처한 농촌 현실은 그 때 이미 잉태되었다. 급격한 이농(離農)과 농산물 가격 폭락으로 우리가 처음으로 텔레비전을 사던 무렵엔 이미 농가의 1인당 평균 소득은 도시 근로자 소득의 66%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새마을운동으로 농촌이 살기 좋아졌다는 선전은 거짓 신화였다. 당시에 거의 보도되지 않았지만 농민들은 전국 곳곳에서 정부의 농업 정책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정부의 대응은 언제나 폭력으로 짓밟는 것이었다. 모든 게 은폐되고 방송이나 언론은 재갈이 물려져 거짓을 사실처럼 선전할 뿐이었다. 농촌이 살기 좋아졌다면 왜 그토록 많은 농민들이 줄지어 살기 좋은 농촌을 떠났단 말인가.

텔레비전 한 대를 사며 든 소회치고는 중구난방이 되어버렸지만 요즘의 종편이나 뜬금없이 새마을운동 운운하는 세태를 보며 든 생각이다. 과거를 돌아보려면 앵무새처럼 남의 말을 되풀이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제대로 들여다 보아야 한다. 과연 그 시절에 누가 피눈물을 흘리고 땀을 쏟았는지, 누가 거짓과 협잡으로 단물을, 아니 백성의 등골을 빼먹었는지 말이다.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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