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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부 여성운동의 전투적 개척자

입력
2017.06.17 0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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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당신] 록시 볼턴

록시 볼턴은 미국 남부의 차별 전통 속에서 성장해, 그 불모지에서 페미니즘의 기틀을 닦고 역사를 개척한 여성으로 평가 받았다. '핏불'같았다는 그의 스타일은, 절차적으로 결코 민주주의적이었다고 말하긴 힘들었지만, 그런 덕에 차별 현실이 빠르게 개선된 면도 적지 않았다. 그가 앞장서 낸 길을 법과 제도가, 시민들의 의식이 뒤따랐다. floridamemory.com
록시 볼턴은 미국 남부의 차별 전통 속에서 성장해, 그 불모지에서 페미니즘의 기틀을 닦고 역사를 개척한 여성으로 평가 받았다. '핏불'같았다는 그의 스타일은, 절차적으로 결코 민주주의적이었다고 말하긴 힘들었지만, 그런 덕에 차별 현실이 빠르게 개선된 면도 적지 않았다. 그가 앞장서 낸 길을 법과 제도가, 시민들의 의식이 뒤따랐다. floridamemory.com

록시 볼턴(Roxcy Bolton)은 미국 남부 플로리다의 ‘평범한’ 여성이었다. 가난한 시골 농부를 부모로 만나 간신히 고등학교를 마쳤고, 도시로 나와 이런저런 일을 하며 결혼했다가 한 차례 이혼을 했다. 재혼한 남편 역시 해군 중령으로 예편한 평범한 시민이었다. 그는 주부였고, 세 아이의 어머니였다. 무슨 대단한 전문직종에 종사한 적도, 정치를 하겠다고 선거에 입후보한 적도 없었다.

볼턴은 페미니스트였다. 1966년 출범한 전미여성연맹(NOW) 창립멤버로 그 해 플로리다 지부를 설립해 지부회장을 지냈고, 3년 뒤 비상근 본부 부회장을 잠깐 맡기도 했다. 인종ㆍ성 등 온갖 차별을 전통으로 알던 1960, 70년대 미국 남부의 여성운동 여건이 어떠했으리라는 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열렬한 민주당원이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플로리다는 공화당 표밭이다.

그런 상황과 조건에서, 수많은 역대 정치인과 시장 등 행정가, 대학 총장, 주 검찰총장까지, 그의 이름만 들어도 긴장하며 꼬리를 사렸다는 건 쉽게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몇몇 일화를 먼저 보자.

60년대 마이애미 도심의 식당들은 남성 전용 룸과 테이블을 두는 게 관행이었다고 한다. 직장인(주로 남성)들이 짧은 점심시간 동안 기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여성들은 직장인이어도, 빈 자리를 보며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게 예사였다. 에미상 수상 경력의 저명 앵커로, 당시 마이애미 방송사(WPGL-TV) 초년 리포터였던 몰리 터너(Molly Turner, 1923~2016)가 록시 볼턴을 처음 본 게 1969년 한 식당에서였다. 볼턴은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지배인을 부르더니 ‘핏불’처럼 덤벼들었다고 한다. “남자는 여자들과 잠은 함께 자면서, 밥은 왜 함께 못 먹는다는 거냐?” 터너는 94년 한 에세이에서 그 일을 소개하며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자부하던 나를 뼈아프게 한 장면이었다”고 썼다. “볼턴은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주부였지만, 나처럼 일하는 여성들이 겪는 차별을 없애기 위해 우리를 대신해 싸운 거였다.” 70년 볼턴이 고용 및 직장 성차별을 없애자는 취지로 설립된 연방기구인 남녀고용평등위원회(EEOC) 플로리다 지부에 찾아가 “위원장도 차별 조사요원도 전원 남성인 평등위원회”를 묵사발 내던 장면도 터너는 기자로서 현장 취재했다.

71년 11월 갓 문을 연 마이애미비치의 ‘플레이보이 플라자 호텔’이 컨벤션홀 판촉용 단체우편물을 NOW의 간부인 볼턴에게도 보냈다고 한다. 휴 헤프너의 ‘플레이보이 클럽’ 자체를 못마땅해 하던 볼턴은 그냥 우편물을 찢어버리고 말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호텔 대표에게 분노의 답장을 썼다. “당신부터 엉덩이에 솜 뭉치를 달고 다녀보는 건 어떠냐?”

72년 1월 플로리다 미국허리케인센터(NHC) 책임자에게 허리케인에 여성 이름을 붙이는 관행의 개선을 요구하는 록시 볼턴. 그 관행에 처음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게 60년대의 그였다.
72년 1월 플로리다 미국허리케인센터(NHC) 책임자에게 허리케인에 여성 이름을 붙이는 관행의 개선을 요구하는 록시 볼턴. 그 관행에 처음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게 60년대의 그였다.

허리케인 등 열대성저기압에 남녀 이름이 번갈아 붙게 된 건 1979년부터였다. 70년대 NOW의 페미니스트들 덕에 여성 이름만 붙이던 관행이 바뀌었다는 건 꽤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싸움의 진앙지가 플로리다였고 선봉이 록시 볼턴이었다는 걸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베티 프리댄은 68년 NOW 회장 시절 볼턴이 “허리케인이 여성 이름으로 불리는 관행에 분통이 터진다”며 편지를 보낸 일을 2000년 출간한 회고록 ‘Life So Far’에 소개했다.(nyt, 2017.5.21) 그걸 계기로 NOW가 조직적으로 나섰지만, 볼턴은 그 전부터 미국해양대기청(NOAA, 70년 설립)과 허리케인센터(NHC)에 사실상 혼자 맞섰다. ‘불운하게도’ NHC 본부가 핏불 볼턴의 앞마당 플로리다 데이드카운티(Dade County)에 있었다.

허리케인이 하나하나 개별 이름을 갖게 된 건 2차 대전 직후인 45년 미국기상국(NWB, 현 미국기상서비스 NWS)이 설립된 뒤부터였다. 알파- 브라보- 찰리로 이어지는 군용 알파벳 명칭이 53년 무렵 소진되자, 기상국은 전쟁 중 해군 병사들이 자기 애인이나 아내 이름으로 태풍을 부르던 농담 같은 관행을 채택했다. 왜 그랬는지 밝혀놓은 자료는 없다. “전장에서 연인이 그리워서, 또 여신처럼 존중하는 의미에서”였다는 설(werehistoty.org), “태풍이 여성처럼 변덕스럽고, 성미 사나워서”라는 설이 있다. “허리케인이 여성처럼 순하고 부드러웠으면 해서”라는 설도 있지만, 그냥 생각 없는 희롱쯤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건 여성들에겐, 특히 그 이름의 당사자거나 태풍이 특히 모질기라도 한 때엔 더욱, 모욕적이었을 것이다.

72년 AP뉴스는 마이애미의 페미니스트들이 NWS 당국자들과 벌인 설전을 보도했다.(newspapers.com) 볼턴이 ‘허리케인(Her-icane)’이란 이름부터 못마땅하니 앞으론 ‘히미케인(Him-icane)’이라 부르라며 포문을 열었다는 이야기. 그는 “베시(Betsy)가 한 마을을 휩쓸어버렸다는 역겹고 짜증나는 말을 언제까지 들어야 하느냐”며 “(그리 여성을 존중하고 싶으면) 상원의원 이름들을 차례로 붙이라”고 말했다. “’골드워터(Goldwater)가 플로리다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는 어떠냐?” 배리 골드워터(1909~1998)는 64년 대선 후보를 지낸 유력 공화당 상원의원이었다. NWS 당국자가 “한 해씩 남성과 여성 명을 번갈아 쓰는 건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볼턴이 “우린 이미 18년 동안 ‘축복 받았으니 blessed’ 그걸로 충분하다”고 일축했다고 한다.

대개의 경우 그가 한 건 협상이 아니라 싸움이었고, 그가 원한 건 타협이 아니라 승리였다. 플로리다 코럴 게이블스(Coral Gables) 전 시장 짐 케이슨(Jim Cason)의 말처럼 볼턴은 “뼛속까지 싸움꾼(inveterate fighter)”이었다. 사안이 크든 작든, 자기 일이든 아니든, 그는 불의라고 여기는 일에 앞뒤 물불 안 가리고 덤볐다. 대개는 그가 옳았고, 이치로나 기세로나 그를 당해낼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의 상대는 정치인과 행정가, 교육자, 기업체나 단체 대표 등이었고 대부분 남성이었지만, 여성이거나 동지일 때도 있었다.

볼턴의 공을 기리는 이들조차 “그를 한결같이 사랑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같은 전제를 다는 것도, 아마 저마다 사연이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를 “핏불 같다”고 한 것도 케이슨 전 시장이었다. “일단 한 번 이빨을 박으면 살점을 삼키기 전엔 놓는 법이 없었다”는 미국 남부 페미니스트 운동의 개척자 록시 볼턴(Roxcy O’neal Bolton)이 5월 17일 별세했다. 향년 90세.

볼턴은 1926년 6월 3일 남부 미시시피 덕힐(Duck Hill)이라는, 인구 500명도 채 안 되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농부였다. 10남매 중 7명이 어려서 숨진 건 가난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갓 학교를 다니던 8살 무렵 그는 정치인(의회 의원)이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비만 오면 길이 끊겨 학교를 못 가는 게 싫어서, 정치인이 돼서 튼튼한 다리를 놓기 위해서”였다. 37년 4월, 온 마을 주민들이 모인 자리에서 백인들이 흑인 두 명을 때려 숨지게 하는, 셜리 잭슨의 소설 같은 충격적인 일이 있었는데, 10살의 그도 그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 장남 데이비드는 ”그런 기억들이 어머니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말했다.(miamiherald.com)

그는 고교를 졸업한 뒤 플로리다로 혼자 나와 이런저런 사무직 일을 했고, 해안경비대원과 결혼해 5년 만에 이혼했다. 그는 20대 초반부터 민주당 청년조직원으로 활동했다. 34세 때인 60년, 2차 대전 태평양전쟁 전범재판 수석검사를 지낸 변호사 출신 해군 중령 데이비드 볼턴(David Bolton)과 재혼했고, 생활이 안정되자 볼턴은 본격적으로 바깥일을 시작했다.

아들 데이비드의 말과 달리 볼턴은 56년 민주당 전당대회의 엘리노어 루스벨트 연설이 삶의 전환점이었다고 말했다. 그날 엘리노어는 “위대한 지도자는 위대한 시민이 만드는 것”이라며 “시민 스스로 위대한 대의를 간직한 위대한 시민이 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볼턴은 이듬해 플로리다 민주당 여성클럽을 조직했다.

74년 플로리다 잭슨메모리얼 병원이 미국 최초 24시간 강간 피해여성 전문 치료센터를 만들게 한 것도 록시 볼턴(오른쪽)이었다.
74년 플로리다 잭슨메모리얼 병원이 미국 최초 24시간 강간 피해여성 전문 치료센터를 만들게 한 것도 록시 볼턴(오른쪽)이었다.

볼턴이 이룬 크고 작은 업적과 일화들은 나열만 하기에도 벅찰 정도다. “강간이란 말을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조차 꺼렸고 피해자에게 동조하는 이들은 더 드물었다”는 71년, 그는 여성 사업가와 정치인, 활동가, 주부, 소수의 남성 등 100명을 모아 마이에미 플래글러 스트리트에서 법원까지 미국 최초 ‘강간 반대 행진’을 벌였다. 이듬해에는 역시 미국 최초의 여성 쉼터인 ‘위기의 여성들 Women in Distress’을 설립해 학대 당하는 여성들의 자활 및 법률 지원 등 운영을 도맡았고(현재는 적십자사가 운영), 주 정부와 함께 여성 대상 범죄 실태를 점검하는 ‘Crime Watch in Florida’를 조직했다. 주 정부와 데이드ㆍ팜비치카운티에 ‘여성지위 향상위원회’를 설립한 것도, 플로리다 아틀랜틱대학에 여성위원회를 만든 것도, 잭슨 메모리얼 병원 내에 미국 최초 강간 전문 치료센터를 개설한 것도, 그가 앞장서 밀어붙인 덕이었다.(floridamemory.com)

여승무원이 임신을 하면 당연히 해고하는 것으로 알던 미국 내셔널항공(NA)이 70년대 초 출산휴가제를 도입한 일부터, 미 의회와 닉슨 행정부가 72년 ‘여성평등의 날(8월 26일)’을 제정하게 된 것까지, 배후에 그가 있었다. 72년 9월 플로리다 주 상원의원 에드워드 거니(Edward Gurney)는 닉슨의 서명이 담긴 ‘여성평등의 날’ 포고령 사본을 동봉해 볼턴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의 제안과 활약(pushing)이 없었다면 ‘여성 평등의 날’은 없었을 것입니다.” ‘푸싱’은 물론, 정치적으로 점잖게 선택된 어휘였을 것이다. 몰리 터너는 “록시는 그 자체로 ‘여성1인위원회’였다. 그는 가정과 더불어 그 조직을 혼자 운영했다”고 썼다.

38개 주의회의 반대로 82년 폐기되긴 했지만, 미국 수정헌법 양성평등조항(Equal Rights Amendment, ERA)이 72년 연방의회를 통과한 것은 물론 NOW를 비롯한 여성단체 모두의 공이다. 하지만 당시 민주당 상원의원 버치 베이(Birch Bayh)를 설득해 70년 의회 첫 공청회를 열도록 한 것은 록시 볼턴이었다. ERA 채택을 저지시킨 일등 공신(?)은 볼턴의 라이벌이라 할 만한 보수 여성 정치비평가 겸 운동가 필리스 슐레플리(1924~2016)였다. 그는 “20세기 미국의 적은 페미니즘과 신마르크시즘”이라는 슬로건으로 유명한 반 페미니스트였다.

여성 등 약자가 억울한 일을 겪으면 경찰서나 시청 민원창구보다 먼저 찾아가는 곳이 볼턴의 집이었다는 말은 그래서 과장이 아니었다. 75년 플로리다 마이에미대 핸리 킹 스탠퍼드(Henry King Stanford) 총장 집무실을 ‘점거’한 사건도 그렇게 시작됐다. 간호대를 제외한 모든 단과대 학장이 남성이고, 대학이사회에 단 한 명의 여성도 없는 현실을, 누군가 그에게 하소연했을 것이다. 그는 총장에게 즉각 편지를 썼다. 30일 시한을 줄 테니 성불평등 시정계획을 마련하라는 거였다. 대학 측은 그 요구를 묵살했고, 총장은 그의 전화조차 피했다. 볼턴은 젊은 여성 페미니스트 6명을 이끌고 침낭과 음식을 담은 쿨러(cooler)까지 챙겨 총장실에 들이닥쳤다. 빈 총장실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볼턴은 대학 관계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난 이미 30일을 줬다. 딱 24시간을 더 주겠다.” 그날 농성에 동참했던 훗날의 상원의원 로버타 폭스(Roberta Fox)는 99년 에세이에 이렇게 썼다. “당시 20대 햇병아리 변호사였던 내게 록시는 ‘마음 독하게 먹으라(Be Strong)’고 연신 말했지만,(…), 나는 겁이 나서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sun-sentinel.com) 스탠퍼드 총장은 얼마 뒤 나타났고, 록시는 그날 여성 교원승진 및 차등 급여 시정 약속을 받아냈다. 록시는 “여성들이 담대해져야 한다. 뒤에서 말만 하고 끙끙대기만 해서는 안 된다. 해병처럼, 곧장 돌격해서 해안을 급습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런 강한 기질과 요지부동의 자기확신이 패착으로 이어진 적도 없지 않았다. 76년 NOW가 레즈비언 기구를 설립하자 그는 NOW를 탈퇴했다. 그에게 동성애는 모성을 거부하는 거였다. 77년 5월 마이애미헤럴드 인터뷰에서 그는 “여성 해방이 일부 여성들을 망쳐놓았다. 그들은 가족과 자녀들에 대한 책임을 망각했다. 새로운 역할을 수용한다고 해서 오래된 역할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은 세상의 미래다”라고 말했다. 골수 민주당원인 그였지만, 남북전쟁 남군의 아내와 딸들이 남부의 전통과 품위를 지키자는 취지로 19세기말 결성한 세습 보수여성단체 ‘딸들의 연합 Daughters of the Confederacy’ 정회원이라는 사실도 그는 자랑스러워했다.

NOW와 결별한 이후로도 그는 플로리다 매춘여성들의 재활 프로그램과 수감자 교육, 마약 근절운동 등 활동을 혼자 지속했다. 90년대 중반, 발작과 심장질환으로 말이 어눌해진 뒤로도 문제를 삼아야 할 사안에는 말 대신 편지로 개입했고, 말년까지 코럴 게이블스 시 자문위원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56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장의 엘리노어 루스벨트와 록시 볼턴(왼쪽). 볼턴은 당시 민주당 열성 청년조직원이었지만, 남부 보수 세습 여성단체 '딸들의 연맹' 정회원이기도 했다.
56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장의 엘리노어 루스벨트와 록시 볼턴(왼쪽). 볼턴은 당시 민주당 열성 청년조직원이었지만, 남부 보수 세습 여성단체 '딸들의 연맹' 정회원이기도 했다.

70년대 초 어느 날, 젊은 주부 몇 명이 마이애미 파크에서 아이 젖을 먹이다가 경범죄로 체포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볼턴은 곧장 밥 셰빈(Bob Shevin) 주 검찰총장실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자기 이름을 대며 “긴급 상황이니 총장을 곧장 바꾸라”고 했고, 회의 도중 부랴부랴 달려온 셰빈에게 대뜸 “당신은 엄마 젖을 안 먹고 컸냐”고 따져 물었다고 한다. 물론 여성들은 즉각 풀려났다. 그로선 사소한 승리였을 그 일을 볼턴은 잊지 않았다. 1992년 마이애미 시는 볼턴의 건의(?)를 수용, 플래글러 거리에 ‘마이애미 여성 공원(Women’s Park)’을 조성했다.

볼턴은 ‘2014 미국 여성사프로젝트 어워드’ 등 수많은 영예로운 자리에 이름을 남겼다. 그는 유년의 꿈이던 정치인이 되지는 못했지만, ‘여성’이라는 아이덴터티 하나로 수많은 이들을 움직여 어느 정치인 못지 않게 세상을 바꾸는 데 기여했다. 마이애미 시립묘지에 선 그의 묘비에는 이름과 생몰년 외에 딱 한 마디 ‘여성 Woman’이라는 단어만 새겨졌다고 한다. 마이애미헤럴드는 그의 부고에서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썼지만, 그렇다고 시립묘지 전체를 덮을 만큼 커다란 비석을 세울 수도 없는 일이다. 볼턴은 그걸로 흡족했을 것이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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