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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외면 소년법] “야속한 소년법… 내 딸 지영이는 오늘도 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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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외면 소년법] “야속한 소년법… 내 딸 지영이는 오늘도 웁니다”

입력
2018.05.05 09:0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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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적장애 딸 성폭행ㆍ협박당해

가해자 부모, 합의 요구하며 괴롭혀

소년재판 선고ㆍ가해자 정보 비공개

처벌도 소년원 2년 처분이 최대

#2

우리는 가해자 정보 전혀 몰라도

그 놈은 우리 가정 속속들이 알아

“언제 나타나 무슨 일 벌일지…”

#3

딸을 집단 폭행한 악마들

수사 받는 동안엔 한마디 없더니

법정에선 “용서해달라” 억지 사과

형사재판 아닌 소년재판 넘겨져

서울의 한 공원. 끔찍한 청소년 범죄의 피해자가 된 딸을 둔 김모씨는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4일 오후 아무런 근심 없이 뛰노는 아이들을 지켜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밝고 건강한 아이인데….” 가해자 보호에 치우친 소년법 때문에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딸 걱정으로 김씨의 5월은 싸늘하기만 하다. 류효진 기자
서울의 한 공원. 끔찍한 청소년 범죄의 피해자가 된 딸을 둔 김모씨는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4일 오후 아무런 근심 없이 뛰노는 아이들을 지켜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밝고 건강한 아이인데….” 가해자 보호에 치우친 소년법 때문에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딸 걱정으로 김씨의 5월은 싸늘하기만 하다. 류효진 기자

“아빠, 할 얘기가 있어. 나, 너무 힘들어”

지난해 6월 어느 밤. 늦게 귀가한 내게 딸 아이가 그날의 일을 털어놨다. 딸은 스마트폰 채팅앱으로 만난 그놈의 협박이 계속돼 괴롭다고 입을 열었다. 나는 귀를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그러길래 왜 모르는 사람에게 (나체)사진을 보내고 집 문을 열어줬냐.” 호통치는 내 앞에 딸은 울음을 터트렸지만 이토록 끔찍한 악몽을 한 달 넘게 혼자 끙끙 앓았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침착할 수 없었다. 딸이 손에 쥔 휴대폰을 빼앗아 메신저를 살폈다. 여느 성인 범죄자를 능가하는 놈의 치밀한 범행 수법에 치가 떨렸다.

지영(15ㆍ가명)이는 또래들 사이 도덕심이 강하고 의리가 넘치는 아이였다. 가끔 학교에서 친구를 보호하느라 자기가 덤터기를 쓰기도 하고, 엇나가는 친구에 쓴소리를 했다 미움을 살 정도다. 담임 교사가 “선생님들이 원하는 학생이다”고 말할 정도지만, 반대로 올곧은 딸의 품성이 약점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나체 사진 협박하며 성폭력

딸을 노린 그놈은 아이의 이러한 특징을 사전에 파악하고 교묘하게 이용했다. 지영이 친구 수진(가명)이의 나체 사진을 온라인에 유포하겠다고 접근해 “대신 네 사진을 주면 수진이 사진을 지우겠다”고 했다. 거절하는 딸을 녀석은 거듭 페이스북 메신저와 휴대폰 메시지로 괴롭혔다. 친구를 끔찍이 위하는 딸을 이용하며 수진이에겐 “친구 지영이가 네 사진을 뿌리란다”고 이간질까지 했다.

기어이 주소를 알아내 지영이가 혼자 있는 시간을 노려 그놈은 나타났다. “문을 안 열어주면, 네 나체사진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했다. 이어진 주거침입 강간. “신고하면 네 사진을 뿌리겠다”는 말도 남겼다. 사진을 볼모로 한 놈은 변태적 행위를 요구하며 폭력을 이어갔다.

[저작권 한국일보] 보호소년 김군과 지영이의 대화 재구성. 당초 채팅앱을 통해 연락하던 보호소년 김군은 지영이가 연락을 받지 않자 페이스북 메신저 등으로 접근했다. 송정근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보호소년 김군과 지영이의 대화 재구성. 당초 채팅앱을 통해 연락하던 보호소년 김군은 지영이가 연락을 받지 않자 페이스북 메신저 등으로 접근했다. 송정근 기자

억장이 무너졌다. 애초부터 지영이와 친구를 범행 목적으로 특정한 ‘동갑’ 남자의 행각이었다.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지만 검거는 쉽지 않았다. 딸이 알고 있던 놈의 이름은 가명이었고 동갑이란 말도 거짓이었다. 세 살 위인 놈은 집안에 들어와서야 마스크를 벗고, 범행 후 거리로 나설 때 다시 얼굴을 가리며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치밀했다.

경찰이 놈을 집으로 유인해 잡자고 했다. 녀석은 집에 아무도 없는지 알아야겠다며 지영이에게 영상통화를 요구했다. 택시로 돌며 주변을 탐색하다가 경찰차가 없는 걸 확인한 뒤 내렸다. 범행준비를 마친 녀석은 그제야 몹쓸 짓을 함께할 다른 친구를 불러냈다. 그러는 사이 잠복해있던 경찰이 붙잡았다. 수개월에 걸친 조사 끝에 놈은 구속됐다.

‘합의’ 요구하며 불쑥 나타난 가해자 가족

범인을 잡았지만 힘든 시간은 이때부터였다. 놈이 구속되고서야 나타난 그의 어머니는 합의를 요구하며 밤중 집을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지영이는 놈이 몹쓸 짓을 한 그날을 떠올리며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딸을 안아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였다. 무엇이 당당했을까. 만남을 요구하는 가해자 부모의 이기심은 우리 부녀를 집안에 가뒀다.

가해자 어머니가 자리를 떠난 후 대문 밖에는 음료 상자와 편지가 놓여있었다. ‘아들의 인생을 생각해 한 번만 사과를 받아달라’는 내용이었다. 혹시나 이웃이 딸의 피해사실을 눈치챌까 노심초사한 내 마음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파트 주차장에도 예고 없이 나타나 지영이에게 “네가 지영이니? 저분이 너희 아빠니?”라고 말을 걸어왔다. 겁에 질린 딸은 발을 떼지도 못한 채 울었다. “돌아가달라”는 말도 부질없었다. 가해자들은 아파트 복도에서 ‘사과’를 쩌렁쩌렁 부르짖고서야 돌아갔다. 생채기는 오로지 우리 부녀의 것이었다.

지영이에게 지적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학습능력이 떨어지지만 장애라 생각한 적 없었는데. 변호사가 지영이와 대화를 나눠보더니 지적장애를 알아차렸다. 해바라기센터에서 확인한 지영이의 지능지수는 61. 지적장애 3급이었다. 사건 당시 협박받은 지영이가 비장애인과 같은 수준의 방어를 하지 못하고 문을 열어준 이유가 설명이 됐다. 지영이의 국선변호인은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7조를 적용해달라는 의견서를 검찰에 냈다. 신체ㆍ정신장애가 있는 사람을 상대로 폭행이나 협박으로 성폭력을 저지른 사람에 대해 5년 이상 징역에 처하도록 정한 조항이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중앙 홀에 놓인 ‘정의의 여신상’. 로마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 유스티치아와 달리, 이 청동상은 눈을 가리지 않았고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있다. 형평을 따지는 저울은 그러나 보호소년의 교화에 방점을 둔 나머지 피해자 보호를 잊고 있는 건 아닐까. 고영권 기자.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중앙 홀에 놓인 ‘정의의 여신상’. 로마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 유스티치아와 달리, 이 청동상은 눈을 가리지 않았고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있다. 형평을 따지는 저울은 그러나 보호소년의 교화에 방점을 둔 나머지 피해자 보호를 잊고 있는 건 아닐까. 고영권 기자.

“눈물의 반성문 쓰며 뉘우친다” 비공개 소년재판부로

끝인 줄 알았다. 아동ㆍ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제7조(아동ㆍ청소년에 대한 강간) 위반과 주거침입죄라는 무시무시한 범죄를 저지른 놈이 당초 법원 정식재판부로 넘겨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렸다. “어린 피고인은 초범이고 매일 눈물로 반성문을 쓰며 뉘우치고 법정에서 자백을 했다”는 이유로 사건이 소년재판부로 넘어간 것이다. 소년부 심리와 선고(처분)는 비공개로 진행됐다. 정식재판에 회부되면 형사처벌을 받지만, 소년보호사건으로 넘겨지면 형사처벌 대신 보호처분을 받는다. 소년보호사건은 가장 중한 벌이 최대 소년원 2년이다. 그다음은 소년원 6월. 시설위탁이나 가정위탁을 받으면 보호관찰소에 다니게 된다. 그놈이 끝내 어떤 처분을 받았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지영이가 “나쁜 놈 어떻게 됐어?”라고 묻는데 차마 ‘모른다’고 할 수가 없다. “몇 년간 나오지 못할 거야. 걱정마”라고 했더니 “나오면 어떻게 하지”라고 불안해한다. “아빠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라고 안심시켰지만, 원수 같은 녀석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무력감에 피눈물이 났다.

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와 달리 가해자는 지영이의 모든 것을 안다. 학교와 집은 물론 가정사정으로 엄마와 언니가 지방에 떨어져 산다는 사연도 안다. 내가 일 나가면 집에는 지영이 뿐이라는 것. 지적장애 3급이라는 소견도 이미 알려졌다. 우리가 모르는 새 사회로 돌아온 녀석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를 일이다. “아빠 언제 와? 무서워” 지영이는 수시로 전화를 한다. 갑자기 가해자 가족이 나타나 다시 삶을 위협할까 두려운 모습이 역력하다. 얼마 전 하굣길 오토바이를 탄 오빠들이 자기를 노려봤다고도 했다. 그놈이 어느새 소년원을 나왔나. 가슴이 철렁했다. 이해 못할 소년법 탓에 우리 부녀는 하루도 편히 잘 수가 없다. 이제 지영이는 우울증약에 기대 일상을 이어간다. 반성문은 녀석을 살렸고, 대신 우리를 죽이고 있다.

소년법은 청소년기 일탈을 바로 잡아 올바른 사회 구성원으로 자라도록 하려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이 때문에 가해자인 ‘보호소년’을 교화하는 데에 초점을 둘 뿐 피해자 보호나 지원 등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피해자가 두 번 우는 이유다. 일러스트=박구원기자
소년법은 청소년기 일탈을 바로 잡아 올바른 사회 구성원으로 자라도록 하려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이 때문에 가해자인 ‘보호소년’을 교화하는 데에 초점을 둘 뿐 피해자 보호나 지원 등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피해자가 두 번 우는 이유다. 일러스트=박구원기자

딸은 끔찍한 기억이 담긴 집을 떠나고 싶어 한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놈이 어디 사는지를 알아야 가급적 멀리 이사 갈 것 아닌가. 경찰서에 그의 주소지를 물었지만 소년법에 근거해 ‘개인정보’를 운운하며 공개할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자영업으로 다진 터전을 포기하는 것도 쉽지 않다. 도대체 왜 우리가 떠나야 하는가. ‘소년’이라는 이유로 가해자에 관대한 법. 우리 부녀는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다. 합당한 처벌이 이뤄져야 분노를 누를 수 있을 것이다.

피투성이로 온 딸, 법은 가해자 편에 섰나

반성의 기미도 없는 애들이 판결도 아닌 보호처분을 받고 ‘죄 없는’ 애들로 내 앞에 멀쩡히 섰다. 또래들에게 죽을 듯이 맞고선 피투성이가 되어 들어온 딸 은희(14ㆍ가명)의 모습에 먼저 아연실색했고 가해 학생들과 그들의 부모, 국선변호인의 뻔뻔한 태도에 엄마인 나는 할 말을 잃었다. 2시간 가까이 몽둥이와 소주병으로 딸을 때린 악마들은 수사받는 동안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 부모들도 그랬다.

그런 애들이 소년재판에 넘겨졌다. 법을 잘 모르지만, 이러면 가해자가 가해자가 아닌 게 된단다. 내가 법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가해자들이 합당한 처벌을 안 받는 것일까? 아니면 원래 법은 청소년들에게 관대한 것일까? 법원에 “가해자들을 만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지만 판사는 강제로 그들을 만나 뒤늦은 사과를 듣게 했다. 법원은 “법정진술권을 보장하려는 것이니 다음 기일에 은희를 데려오라”며 “강제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지만 재차 요구하니 도리가 없었다.

은희는 다시 일상을 되찾았지만 밤에 잠을 설친다. 폭력으로 멍든 마음은 언제쯤 치유될까. 게티이미지뱅크
은희는 다시 일상을 되찾았지만 밤에 잠을 설친다. 폭력으로 멍든 마음은 언제쯤 치유될까. 게티이미지뱅크

상처들이 채 아물지도 않은 은희는 자신을 병으로 찢은 아이들의 사과를 들으러 법정에 출석해야 했다. 법정에 들어선 순간부터 가해자들 얼굴을 본 뒤 집에 올 때까지 2시간 넘도록 딸은 멈추지 않고 울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 은희가 고개를 푹 숙이고 울었다.

악마들은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를 반복할 뿐이었다. 진심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억지사과’ 탓인지, 아니면 재판에 넘겨진 뒤 가해 학생들이 낸 100여통의 반성문 때문인지, 가해자들은 형사재판이 아닌 소년재판에 넘겨졌다. 글쎄, 가장 무거운 벌이 소년원 2년이란다. ‘반성하고 있다’며 감형이라도 받는다면 2년도 채 안 살고 나올 거고, 사회에선 죄 없는 애들이 되는 거다.

가해자 측 국선변호인은 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를 걸어왔다. 그 일을 다시 떠올리고 용서를 강요받는 일은 괴로웠다. “얘네 부모들, 자식들 범행이 알려져 시장에도 못 나간다”며 합의를 해달란다. 그 어떤 고상한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웃기지 말라”고 했다. 미안함이라는 걸 아는 사람들이 재판 때마다 법정에 나갔는데 아는 척도 않고 사과도 하지 않았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은희는 밤에 잠을 설친다. 강한 아이라 학교에 잘 다니고 외부활동도 해서 이겨내는 줄 알았는데. 상처를 꿰매느라 삭발한 머리가 더디게 자라는 걸 보면 마음이 찢어진다. 은희의 멍든 마음을 생각해 눈물을 참아야지. 내일은 해줄 말이 생각나면 좋겠다.

박지연 기자 jyp@hankookilbo.com

※이 기사는 인터뷰를 통해 주거침입 강간 피해자 지영(15ㆍ가명)이 아버지와 집단폭행 피해자 은희(14ㆍ가명) 어머니의 목소리로 재구성하였습니다. 한국일보는 피해자들을 보호하고 소년보호 사건 보도금지를 규정한 소년법 제68조를 준수하기 위해 부득이 가명을 사용하고 사건을 특정하거나 유추할 수 없도록 발생 시점 및 장소를 밝히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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