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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는 지금 '필리핀 민주주의 세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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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는 지금 '필리핀 민주주의 세우기'

입력
2014.09.15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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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아들 아키노 대통령… 마르코스 독재정권 붕괴시키고 일약 국민후보 떠올라 대통령 당선

부정부패 아로요 前 대통령 구속… 감사원장 사퇴시키고 대법원장 탄핵, 예산 착복 거물 상원의원 3명 구속

임기 내 민다나오 내전 종식에 총력… 이슬람 반군과 평화협정 위해 日서 비밀리 만나 1국가 2체제 합의

필리핀 무슬림들이 방사모로 기본법안이 의회에 제출된 지난 10일 필리핀 마닐라의 대통령궁 주변에서 법안에 지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마닐라=AP 연합뉴스
필리핀 무슬림들이 방사모로 기본법안이 의회에 제출된 지난 10일 필리핀 마닐라의 대통령궁 주변에서 법안에 지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마닐라=AP 연합뉴스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제3의 물결: 20세기 후반의 민주주의’란 책에서 아시아 지역 최초로 민주화의 물결을 일으켰던 나라로 필리핀을 소개하고 있다. 1986년 부패한 마르코스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이룩한 필리핀의 황색바람은 1987년 한국의 민주화, 1988년 대만의 민주화, 1989년 천안문 사태로 마무리된 중국의 민주화 운동, 그리고 1990년대 동남아시아 각국에 민주화 운동의 불씨를 제공했다.

그러나 아시아 민주화의 선봉에 서 있던 필리핀은 오늘날 정치적으로 ‘엘리트 민주주의’‘선거 민주주의’‘비자유민주주의’ 등 부정적인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경제적으로는 ‘전 세계로 가정부를 수출하는 국가’‘아시아의 병자’라는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극심한 빈부격차와 높은 빈곤율, 그리고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는 민주주의의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갖게 만드는 사례가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오랜 독재정권의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는 필리핀 국민들은 비록 더디고 굴곡이 많을지라도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 연합뉴스
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 연합뉴스

세계적 민주 투사의 아들이 통치

지난 7월 28일 필리핀 인구가 1억 명을 돌파했다는 뉴스가 조간신문 전면을 장식하던 날, 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은 연례 국정연설(SONA)을 실시했다. 매년 7월 말 실시되는 필리핀 대통령 국정연설은 지난해 국정운영 결과를 국민에게 보고하고 향후 비전을 제시한다.

국정연설이 이루어지는 날이면 하원의회 밖에서 언제나 시민들의 거리시위가 개최된다. 대통령의 국정연설은 오후 4시부터 시작되지만 시위대는 아침 일찍부터 각자 출정식을 갖고 각종 피켓과 시위 장비를 갖춘 채 의회 주변 도로에 집결한다. 대부분 정부의 국정운영 불만사항과 요구사항을 전달하는 내용들이다. 필리핀에서 대통령의 국정연설이 국민들에게 이처럼 큰 관심을 모으는 이유는 대통령이 가지는 막강한 권력 때문이기도 하다. 6년 단임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필리핀 정치체제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의 권력은 다른 어떤 대통령제 국가의 그것보다도 강하다. 필리핀에서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느냐는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키노 대통령은 태생적으로 필리핀 민주주의의 아들이라 칭할 만하다. 그의 아버지는 마르코스 독재체제에 저항하며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1983년 귀국하는 길에 공항에서 암살당한 니노이 아키노 상원의원이다. 어머니는 암살당한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필리핀 황색바람의 주역으로 마르코스 독재정권을 붕괴시키고 대통령이 된 코리 아키노 여사다. 부모의 화려한 명성에 비해 아키노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러나 2009년 8월 1일 필리핀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아 왔던 코리가 지병으로 사망하면서 그를 떠나 보내는 아쉬움 감정이 그가 남긴 유일한 아들에게 고스란히 옮겨갔다. 이로 인해 그는 2010년 대선에서 일약 국민후보로 부상했다. 이렇다 할 정치적 역량을 보여준 바 없는 그가 갑자기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되자 일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기득권층 반발 속 부정부패와 전쟁

아키노 대통령이 집권 이후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 중인 정책은 부정부패 척결과 분쟁으로 얼룩진 민다나오의 평화정착이다. 그는 집권 후 각종 부정부패 사건으로 국민의 분노를 샀던 아로요 전 정권에 대한 심판에 가장 먼저 착수, 결국 아로요 전 대통령을 구속시켰다. 또 아로요 정권을 심판하는데 걸림돌이던 사법부 인사 개혁에 착수해 감사원장을 스스로 물러나게 했으며, 대법원장을 의회에서 탄핵토록 했다. 사법부 개혁에 이어 아키노 대통령은 최근 입법부 내 부정부패 문제를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다. 한 비정부단체(NGO) 직원의 폭로로 시작된 정치인들의 비리사건은 엔릴레 전 상원의장을 포함해 거물급 상원의원 두 명을 구속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매년 정부예산에서 각 의원들에게 지급되어 국가적 혹은 지역적 숙원사업에 사용하도록 한 소위 포크배럴(Pork Barrel)을 서류로만 존재하는 사업을 꾸며 착복한 협의를 받고 있다. 현재 체포돼 조사를 받고 있는 세 명의 상원의원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전ㆍ현직 정치인들이 이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 사건을 두고 일부에서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이 사건은 이미 개인적인 비리척결 차원을 넘어 필리핀 정치인들의 전통적인 부패 관행을 개혁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다. 이에 대해 야권에서는 정치적 탄압이라 비난하면서 행정부의 관행에 대한 헌법적 논란을 불러오기도 했다. 또한 아키노 대통령이 헌법 위에 군림하려 한다며 의회에 대통령 탄핵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최근 아키노 대통령의 개혁정책은 그 동안 필리핀 사회에 뿌리 깊게 내재해 있던 불법적 관행을 척결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민다나오 내전 종식도 과제

아키노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중 완료를 목표로 추진하고 있는 또 다른 역점사업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지속되어 왔던 민다나오 내전을 종식시키는 일이다. 필리핀의 무슬림 인구는 약 5백만 명 정도로 필리핀 전체 인구의 약 5% 정도에 불과하며, 대부분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섬 서부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이들은 가톨릭이 다수를 차지하는 필리핀에서 문화적 소수자로서 온갖 차별과 착취의 대상이 되어 왔다. 1970년대부터 본격화된 무장독립 투쟁은 오늘날까지 약 15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고, 수백만 명의 이재민을 낳았다. 직접적인 인명 피해와 더불어 민다나오가 분쟁지역이라고 하는 대외적 이미지 때문에 입은 경제적 손실은 계산하기 힘들 정도다. 풍부한 자연환경과 온화한 기후, 그리고 막대한 천연자원에도 불구하고 민다나오는 그동안 필리핀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남아 있다.

과거 정권에서도 이슬람 반군단체와의 평화협정이 수 차례 체결되었지만 분쟁을 종식시키는 데는 모두 실패했다. 현 아키노 행정부에서 새롭게 추진된 평화협상은 2011년 8월 아키노 대통령과 최대 반군조직인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LF)의 의장이 일본에서 비밀리에 만나 평화협정에 관한 기본안에 합의하면서 급속히 진전되었다. 이후 양측 협상단은 지속적인 협의를 통해 최종합의안을 도출했으며, 올해 3월 14일 필리핀 대통령궁에서 모든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에 조인했다. 최종합의안에는 필리핀 무슬림 지역에 중국과 홍콩 체제와 흡사한 1국가 2체제를 골격으로 하는 방사모로 정부를 구성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방사모로 정부는 자체적으로 의회를 구성하고, 의회에서 총리를 선발해 행정부를 구성토록 함으로써 준국가 수준의 자치권을 부여 받게 된다. 국방과 외교, 화폐와 같은 필리핀의 기본 주권은 여전히 인정되지만, 행정권의 독립과 이슬람법인 샤리아법의 적용과 같은 이슬람적인 요소가 적극 반영된 자치정부가 들어설 예정이다.

방사모로 정부에 적용될 기본법안은 지난 10일 필리핀 의회에 제출되었으며, 곧 찬반논의와 비준절차가 진행될 예정이다. 이 법안이 필리핀 의회를 통과하면, 최종적으로 방사모로 지역민의 주민투표를 통해 최종 확정될 예정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본 평화협정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이들은 방사모로 정부의 탄생으로 인해 그 동안 자신들이 누리고 있었던 정치·경제적 기득권이 약화될 것을 염려하고 있다. 또한 일부 필리핀 국민들도 방사모로 정부의 탄생이 필리핀 헌법에 위배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 제출된 기본법안에 대한 의회의 찬반 논의가 본격화하면 이러한 논란은 더욱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아키노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부정부패 척결과 내전 종식은 필리핀 경제 번영과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는데 반드시 넘어야 할 장벽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2016년 6월 만료되는 현 정부 임기 내에 그 동안 누적되어 왔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키노 대통령도 이러한 인식 하에 조급히 무언가를 성취하기보다는 올바른 길로 방향을 잡아나간다는 기본 방침을 밝히고 있다. 필리핀의 정치현실에서 대통령 성향에 따라 정책 변화가 심한 점을 감안하면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개혁정책의 방향이 다음 정권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임기 후반부에 접어드는 아키노 행정부가 흔들림 없이 지속적으로 개혁정책을 추진하여 필리핀 민주주의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 넣길 기대해 본다.

김동엽 부산외대 동남아지역원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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