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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지리아 인권ㆍ환경 ‘비극의 순교자’… 그 아들은 병든 땅을 외면할 수 없었다

입력
2016.11.19 0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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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셸에 맞선 아버지, 사로위와

유전 오염 맞서 부족 운동

군부에 미운 털, 잇따른 투옥

교수형 당하고 시신까지 훼손

▦ 아버지를 부정했던 아들, 위와

엄마ㆍ동생과 9세때 英 유학

새 아내 소식에 개명ㆍ절연

사형선고 뒤 결국 구명 앞장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여정

“내 삶은 미리 정해져 있었다”

나이지리아 정권 자문역 하며

환경조사ㆍ복원사업에 힘 보태

[가만한 당신] 켄 위와

켄 사로위와는 다국적 석유기업 로열더치셸과 나이지리아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다 사법살인 당한 세계적 인권환경운동가였다. 하지만 아내에게 부정한 남편이었고, 자녀들에겐 불성실한 아버지였다. 장남 켄 위와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를 이해하고 용서하기 위해, 마침내 아버지의 빈 자리에 대신 서기 위해 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사진은 95년 수감 중이던 아버지를 대신해 골드만환경상을 탄 켄 위와. goldmanprize.org
켄 사로위와는 다국적 석유기업 로열더치셸과 나이지리아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다 사법살인 당한 세계적 인권환경운동가였다. 하지만 아내에게 부정한 남편이었고, 자녀들에겐 불성실한 아버지였다. 장남 켄 위와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를 이해하고 용서하기 위해, 마침내 아버지의 빈 자리에 대신 서기 위해 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사진은 95년 수감 중이던 아버지를 대신해 골드만환경상을 탄 켄 위와. goldmanprize.org

세상 사람들이 영웅으로 존경하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증오하며 한사코 멀어지고자 했던 아들이 있었다. 나이지리아의 세계적 인권ㆍ환경운동가 켄 사로위와(Ken Saro-Wiwa, 1941~1995)와 그의 장남 켄 위와(Ken Wiwa)의 이야기다.

켄 사로위와는 군사독재정권과 다국적 석유기업에 맞서 자신의 소수부족 오고니(Ogoni)족의 삶터와 생존권을 위해 싸운, 한국에도 꽤 알려진 세계적 인권ㆍ환경운동가다. 켄 위와는 그런 아버지의 삶의 이면, 즉 남편으로서의 부정과 아버지로서의 불성실함을 용납할 수 없었다. 영국서 공부한 그로서는 아버지를 통해 본 부족의 가부장 전통과 축첩 문화 자체가 못마땅했을 것이다. 켄 사로위와는 독재정권에 의해 투옥돼 사법 살인을 당했고, 어쩔 수없이 아버지의 구명운동을 벌여야 했던 켄 위와는 그의 사후, 긴 우회 끝에 역시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빈 자리에 대신 서야 했다. 그 끝에, 아들 켄 위와가 10월 18일 뇌졸중으로 별세했다. 향년 47세.

나이지리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1960년)하기 직전인 1958년, 남부 나이저 강 하구 삼각주 일대에서 방대한 유전이 발견됐다. 인구 50만 명 소수부족 오고니족이 긴 세월 동안 농사짓고 물고기 잡던 곳이었다. 다국적 석유기업들이 몰려 들었고, 경쟁에서 가장 유리했을 영국-네덜란드 합작 기업 ‘로열더치셸’이 알짜 유전을 차지했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신생 독립국의 값진 천연자원은 아프리카 현대사가 보여주듯 비극의 불씨가 되기 쉽다. 다행히 나이지리아 상황은 조금 달랐다. 독립 직후부터 정권의 부패와 쿠데타 등으로 내정이 불안정했고 북부 이슬람권과 남부 기독교권의 종교ㆍ지역 갈등과 부족 분쟁도 있었지만, 유전이 이슬람 과격단체 보코하람의 거점과 사뭇 멀었다. 기독교 정권은 유전 개발의 과실을 독점하며 1억 8,000만 인구의 아프리카 최대 경제ㆍ군사 대국의 위상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지켜올 수 있었다. 석유는 지금도 나이지리아 수출의 90%, 국가 재정의 70%를 점하는 자원이다. 정권과 석유기업의 관계는 중미 바나나 공화국들과 다국적 농산물 회사들의 관계만큼 끈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이저 델타지역은 유출된 기름으로 오염돼갔다. 땅은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됐고, 뻘 바다 어족자원도 씨가 말랐다. 유정 매연으로 공기가 거칠어졌고 공동 우물에서도 석유 냄새가 날 지경이 됐다. 부족은 1990년 비폭력 저항 단체 ‘오고니족 생존권 운동(MOSOP)’을 발족하고, 생존권 요구를 담은 오고니 권리장전을 제정했다. 오염 실태를 조사하고 방지 대책을 마련하라, 원유 개발이익을 주민에게 분배하라, 부족 자치권을 보장하라는 거였다. 그들은 나이지리아 소수부족 인권연대기구(UNPO)와 더불어 평화 집회 및 시위를 벌였다. 93년 1월 평화행진에는 부족 성인 전부라 해도 좋을 30만 명이 참가했다.

그 선봉이 켄 사로위와였다. 나이저 델타의 보니(Bonny) 마을 족장의 장남으로 태어나 이바단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는 60년대 아프리카 신생정부에서 일하던 청년 지식인들처럼 한때 정부와 지역 정부에서 일했고, 70년대 이후 베스트셀러 소설가 겸 드라마 작가로 명성을 날리던 이였다. 그는 92년 스위스 제네바 ‘유엔 원주민 실무그룹회의’에 참석해 부족의 위기를 호소하는 등 국제 환경ㆍ인권단체 등과 연대해 다국적 기업들의 나이저 델타 파괴의 실상을 고발했다.

비폭력저항단체 오고니족 생존권운동(MOSOP)'을 이끌던 무렵의 켄 사로위와. 그는 아프리카의 유명한 작가였고, 국제적인 환경 인권 운동가였다. 그는 운동 못지않게 연애에도 열정적이었다고 한다. 그린피스 촬영, goldmanprize.org.
비폭력저항단체 오고니족 생존권운동(MOSOP)'을 이끌던 무렵의 켄 사로위와. 그는 아프리카의 유명한 작가였고, 국제적인 환경 인권 운동가였다. 그는 운동 못지않게 연애에도 열정적이었다고 한다. 그린피스 촬영, goldmanprize.org.

군부 정권은 92년과 93년 두 차례 그를 연행, 한두 달씩 재판 없이 구금하곤 했다. 사니 아바차(Sani Abacha, 1993~98년 집권)정권은 94년 5월 MOSOP 지도부 8명과 함께 그를 또다시 체포했다. 오고니족 친정부 인사 4명을 살해했다는 게 덮씌워진 혐의였다. 국제 인권ㆍ환경단체와 영국 호주 남아공 등 영연방 정부들까지 나서 나이지리아 군사정부를 성토했다. 그는 옥중에서 대안 노벨평화상으로 불리는 ‘바른 삶 상(Right Livelihood Award)과 골드만 환경상을 타기도 했다. 하지만 군사특별법원은 95년 11월 10일, ‘오고니 나인(Ogoni Nine)’이라 불리는 사로위와 등 9명 전원을 교수했고, 사로위와의 시신에는 산성액까지 뿌려 식별을 불가능하게 한 뒤 매장했다.

켄 위와는 사로위와와 아내 마리아의 1남 2녀의 장남으로 내전 중이던 나이지리아 옛 수도 라고스에서 1968년 11월 28일 태어났다. 정식 이름은 케눌레 보날레 티사로위와(Kenule Bornale Tsaro-Wiwa), 오고니족 카나(Khana)어로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위와의 첫 아들’이라는 의미다.(NYT, 2001.10.21)

그는 아홉 살이던 78년 1월, 어머니와 한 살 된 쌍둥이 여동생 둘과 함께 영국으로 이주했다. 훗날 위와는 그 이주가 유년의 끝이었다고 회고했다. 동시에 부족과 조국, 아프리카인으로서의 정체성과도 멀어지는 시작이었을 것이다. 당시 아버지는 꽤 부유했지만, 가족의 타향살이는 힘겨웠다고 한다. 역시 작가가 된 누이 누(Noo)는 2011년 가디언 인터뷰에서 “우리는 모두 한 방에서 무척 궁핍하게 살았다. 나는 오빠의 옷을 물려 입곤 했다”고 말했다.(가디언, 2011.12.31) 시간이 가면서 부부 사이도 점점 멀어졌다. 아버지에게 다른 아내와 8살 6살 두 딸이 있다는 걸 남매가 알게 된 건 90년 무렵이었다. 그것도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의사인 삼촌(Owens)이 전화로 알린 거였다. 런던의 가족들이 아버지를 멀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92년 켄은 자신의 이름을 ‘위와’로 개명함으로써 가족의 정체성과 부족의 전통을 부정했고, 그 사실을 옥중의 아버지에게 편지로 통보했다. 켄 사로위와는 답장에서 “우리 부족 문화에서 켄 위와가 켄 사로위와의 장남이 될 수는 없다”고 썼다.(가디언, 2016.10.26)

아버지가 독재정권과 다국적기업에 맞서 한창 싸우던 그 무렵, 런던 톤브리지 스쿨을 거쳐 런던대에서 슬라브어와 동유럽학을 전공한 켄은 가디언 온라인 매체 ‘뉴미디어랩’에 취직, 디지털 저널리즘의 가능성을 개척하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는 아버지와 연을 끊고 영국인으로 살고자 했다. 아버지가 사형선고를 받은 게 그 즈음이었다.

‘오고니 나인’의 사연과 그들의 투쟁, 재판 이후 상황과 국제사회의 구명 운동 소식 등이 연일 핫뉴스로 쏟아져 나왔다. 저널리스트로서, 아들로서, 위와는 켄 사로위와라는 그 거대한 질량의 중력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는 95년 초 직장에 사표를 내고 영국 호주 남아공 등 영연방 국가의 영향력 있는 정치인들과 인권ㆍ환경운동 단체 지도자들을 만나 구명을 호소했다. 오고니 나인이 처형되던 날에도 그는 뉴질랜드 오클랜드에 열린 영연방 국가수반회의에서 넬슨 만델라 등을 만나고 있었다. 존 메이저 영국 총리는 “사법 살인”이라며 아바차 정권을 비난했고, 참가국 정상들은 나이지리아의 영연방 회원국 자격을 3년간 박탈했다.

형이 집행된 뒤 켄 위와는, MOSOP 지도부와 국제인권단체의 기대를 외면한 채 나이지리아가 아닌 런던으로 되돌아갔다. 아버지의 홀(笏)이 아닌 자신의 삶을 택한 거였다. 그는 이듬해 영국인 올리비아 버넷과 결혼했고, 두 아이를 낳은 뒤인 99년 더 먼 캐나다로 이주했다. 그는 매시대학, 토론토 대학 등 몇몇 대학과 재단 레지던시 작가로 지내며 캐나다 신문에 다양한 주제로 칼럼을 썼다.

그리고 2001년 ‘성자의 그늘에서: 아버지의 유산을 이해하고자 했던 한 아들의 여정 In the Shadow of a Saint: A Son’s Journey to Understand His Father’s Legacy’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아버지 켄 사로위와에 대한 애증, 그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분투한 이야기. 아버지가 처형된 뒤 배달된 아버지의 마지막 소설을 일 년 넘게 펼쳐보지도 않았다는 이야기…. 책에는 넬슨 만델라가 어머니에게 쓴 위로편지 이야기도 나온다. 장례식을 집전한 데스먼드 투투 주교가 전해준 편지를 받아 든 뒤 일그러지던 어머니의 표정. 봉투에 적힌 수신자는 아버지의 연인 중 한 명의 이름이었다. 켄 위와는 ‘성자의…’의 첫 줄을 이렇게 썼다. “내 아버지. 그의 삶은 어디서 끝나고, 내 삶은 어디서 시작할까? 마치 그의 그림자를 좇아 내 온 생을 보낸 것 같다.(…) 내 삶은 그에 의해 미리 정해져 있던 것일까?’ 뉴욕타임스는 2001년 10월 ‘순교자의 아들 The Martyr’s Son’이라는 제목을 단 서평 기사를 이렇게 맺었다. “토론토의 가족 품으로 돌아온 켄 위와는 정치가 요구하는 바와 다른 또 하나의 이상, 즉 그의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하고픈 충만한 현실의 이상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는 듯하다.” 그의 책은 2002년 허스턴 라이트(Hurston-Wright) 논픽션상을 탔고, BBC와 CBC 다큐멘터리로 제작됐다. 그는 2005년 세계경제포럼(WEF)의 ‘청년세계지도자 Young Global Leader’에 선정되기도 했다.

켄 사로위와와 유년의 켄 위와. 아버지에 대한 위와의 애증에는 권력과 저항, 아프리카 소수부족의 전통과 서구적 교육의 길항하는 여러 힘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goldmanprize.org
켄 사로위와와 유년의 켄 위와. 아버지에 대한 위와의 애증에는 권력과 저항, 아프리카 소수부족의 전통과 서구적 교육의 길항하는 여러 힘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goldmanprize.org

독재자 아바차가 98년 심장마비로 죽고, 70년대 집권 후 민정 이양의 이력이 있는 온건군부 지도자 올루세군 오바산조가 99년 집권했다. 그는 2004년 ‘켄 사로위와 재단’설립을 허용한 데 이어 이듬해 12월 사로위와의 유해를 발굴해 부족 묘역에 격식대로 재매장하게 함으로써 그의 명예를 간접적으로나마 복원했다. 그리고 켄 위와에게 도움을 청했다. 오고니족 복지와 나이저 델타의 환경 복원, 나이지리아 국제 관계 개선 등에 힘을 보태달라는 요구였다. 2006년 6월 ‘The Globe and Mail’에 쓴 켄 위와의 마지막 칼럼 제목은 ‘내 새로운 아이덴티티의 경계를 넘어서며’다. 글에서 그는 “용서와 슬픔에서 벗어나 새로운 평화와 번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이제는 철학적 신념을 실용적 실험을 통해 구현해 볼 때인 것 같다”고 썼다. 그의 가족은 다시 영국으로 이사했고, 이후 켄 위와는 오바산조(1999~2007)- 우마르 야르아두아(2007~2010)- 굿럿 조나단(2010~2015)까지 세 정권의 대통령 자문위원으로 일했다.

나이지리아 정부는 2006년 유엔환경계획(UNEP)에 나이저 델타의 오염실태조사를 의뢰했다. 2011년 보고서는 오염 정화에 최소 30년이 걸리며 비용만도 약 10억 달러가 든다고 밝혔다. 최소 10개 마을 식수가 고농축 탄화수소에 오염됐고, 한 공동우물에서는 발암물질인 벤젠이 WTO 기준치보다 900배 높게 검출됐다. 가디언은 2010년 11월, 셸의 ‘나이지리아 위기관리 홍보전략’ 문건을 폭로한 기사에서 셸이 UNEP 조사 비용으로 1,000만 달러를 댔고, 그 영향으로 보고서 자체가 오염됐을지 모른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앞서 책 출간 직후인 2001년, 위와는 오고니 나인의 유족들과 함께 셸을 상대로 미국 법원에 소송을 걸었다. 사법 살인의 배후에 셸이 있다는 정황이 첨부됐다. 켄 사로위와의 동생 오웬스는 96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형 집행 직전 셸의 경영진을 만난 이야기를 전하며 “형이 MOSOP 명의로 더 이상 환경 이슈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발표를 하지 않는 한 방법이 없다”고 하더라고 한 바도 있었다.(1996.1.26) 그 소송은 유족들이 1,550만 달러 보상에 합의함으로써 2009년 철회됐다. MOSOP 등의 바람과 달리 셸의 법적 책임은 그렇게,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2011년 인터뷰에서 위와는 “소송에는 여러 유족이 가담했고, 그들의 뜻이 나의 뜻보다 덜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완곡하게 자신의 입장을 전했다.

위와는 영국 찰스 왕세자가 2007년 설립한 ‘아프리카 열대우림 보존 포럼(PWRF)’의 자문위원으로도 일했다. 그 포럼의 13개 후원기업 명단 맨 앞에 있는 이름도 셸이었다.

켄 사로위와를 기억하는 이들, 다국적 석유회사의 송유관 파괴 등 적극적인 집단 행동을 벌여온 이들에게 켄 위와의 노선은 불만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켄 위와의 해법은 아버지의 비폭력ㆍ불타협 노선보다 더 온건했다. 오고니족 자치기구인 OCIA 의장 굿럿 디그보(Goodluck Diigbo)는 그의 선택을 ‘조용한 접근법’이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켄 사로위와 20주기였던 2015년 11월, 위와는 가디언에 칼럼을 썼다. “내 아버지가 지금 살아 있다면 여전히 황폐한 오고니랜드의 풍경에 실망하며 다시 저항운동을 시작했을 것 같다.(…) 나이지리아 공식 기록에는 여전히 그가 범죄자로 남아있고, (…)셸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그는 하지만 UNEP의 환경조사와 셸이 오염 정화비용으로 10억 달러를 내놓기로 한 사실 등은 희망의 징후라며, “윤리의 호(弧)는 거대할지 몰라도, 끝내는 정의를 향해 휠 것(The arc of the moral universe may be long, but it still bends towards justice)”이라는 오래된 말로 글을 맺었다. 물론 그는, 그 호가 무지개처럼 저절로 휘는 게 아니라, 불의의 한 자리에 안간힘으로 매달린 수많은 이들의 무게로 간신히 휘는 것임을 말하고자 했을 것이다. 지금도 오고니족 일부는 송유시설 파괴 등 힘으로 그 불의에 맞서고 있고, MOSOP는 지난 10일 21주기 성명을 통해 평화적 저항을 호소했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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