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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파르테논 신전과 ‘세한도’

입력
2018.07.04 18:37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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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미술교과서 안에서 최고의 작품을 꼽는 놀이를 한 적이 있다. 나는 그때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선택했다. 유네스코의 엠블럼이기도 한 파르테논은 사진 너머에서조차 깊고 강렬한 아우라로 어린 나를 휘감았던 것이다. 그러다 미술 책장이 멈춰선 또 한 곳. 그곳에는 나도 그릴 것 같은 소박한 그림 한 폭이 실려 있었다. 파르테논과 극점으로 대비된 그림은 바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였다. 이런 단순한 그림이 어떻게 국보가 되는지, 어린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화두였다.

이 의문은 수십 년이 지나 동양미학과 화론(畫論)을 공부하면서 풀렸다. 그것은 ‘서권기(書卷氣) 문자향(文字香)’을 내포하는 문인화로서, 동아시아 사유의 특징을 반영하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동아시아 미술에서는 직업화가의 작품보다, 학문하는 문인의 그림을 더 높이 쳐주는 것일까?

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그림 즉 상형문자에서 출발한 한자의 특수성이다. 당나라 장언원의 ‘역대명화기(歷代名畫記)’에는 ‘서화동원(書畫同源)’ 즉 그림과 글씨는 같은 기원을 가진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오늘날 표음문자를 쓰는 우리에게 그림과 글씨는 엄격하게 분절된다. 그러나 표의문자인 한자에는 그림의 요소가 항상 흐르고 있다.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왕희지의 괴짜 친구 이야기는 이 같은 측면을 잘 나타내준다. 왕희지의 친구 중에 요즘으로 치면 룸살롱에서 살다시피 하는 이가 있었다. 그러다 돈이 떨어지면 왕희지에게 반드시 답장할 수밖에 없는 편지를 보냈다. 해서 답장이 오면, 그걸 그대로 저당 잡히고 계속해서 술을 마셔댔다. 즉 왕희지의 필적은 당대에도 백지수표였던 것이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자. 편지란, 특정한 소식을 전하는 글인데 이게 어떻게 다른 사람도 원하는 백지수표가 될 수 있을까? 무슨 말이냐면, 타인의 휴대폰 문자는 전혀 값어치를 가질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부분이 바로 서예(書藝)라는 문자예술, 즉 그림과 통하는 한자만의 특수성이다. 한자의 그림적인 성격 때문에, 현대에도 우리 주변에는 집주인조차 읽지 못하는 한자 표구가 거실에 떡하니 붙어 있곤 한다. 즉 한자에는 글씨를 넘어서는 그림으로서의 기능이 현재까지도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추사의 글씨가 ‘글씨를 넘어선 그림인 동시에 그림을 넘어선 글씨’인 것을 통해서도 자못 분명해진다.

둘째는 글씨 쓰는 붓과 그림 그리는 도구가 한 가지라는 점이다. 서양에서 글씨를 쓰는 펜과 그림을 그리는 붓은 완전히 다르다. 즉 두 영역의 경계가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는 두 도구가 분리되지 않는다. 때문에 글씨를 잘 쓴다는 것은 그림 붓 역시 잘 놀린다는 의미가 된다. 흥선대원군이 난초를 잘 쳤다는 것은 이를 말해주는 것이다.

붓을 잘 놀리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대등관계가 형성된다면, 그다음은 공부한 학자에게 프리미엄이 붙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즉 ‘책의 기운과 문자의 향기’라는 공부인(工夫人)에 대한 존중이 작용하는 셈이다.

당나라 때 활동한 시불(詩佛) 왕유는 문인화의 시조가 되는 인물이다. 왕유가 추구한 것은 형태를 넘어선 정신이었다. 즉 형상에서 형상 없음을 추구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진정한 동양의 정신은 직업적인 작품보다도 오히려 문인화 속에 존재하게 된다.

명나라를 대표하는 최고 화가 동기창은 ‘화안(畵眼)’에서, ‘독만권서 행만리로(讀萬卷書 行萬里路)’ 즉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를 여행하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조차도 공부와 정신에 이끌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파르테논이 형상적인 신전이라면 ‘세한도’는 추사의 정신이 서린 영적인 신전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자현 스님ㆍ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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