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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폐지’ 청원 23만명 넘어서... 청와대 묘안 꺼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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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폐지’ 청원 23만명 넘어서... 청와대 묘안 꺼낼까

입력
2017.10.31 04:40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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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폐지 청원. 청와대 홈페이지 캡처
낙태죄 폐지 청원. 청와대 홈페이지 캡처

고1 A양은 올 초 남자친구와 성관계 후 임신을 했다. A양은 꾸중을 들을 것이 염려돼 임신 20주가 되어서야 부모님에게 임신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중절 수술을 해줄 병원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A양 부모는 의료진과 합의해 ‘성폭행을 당해 임신했고, 태아 역시 기형으로 보인다’는 거짓 의료 기록을 남기고서야 수술을 받았다.

공식 통계에 잡히는 합법적인 임신중절수술, 그러니까 낙태는 한 해 약 5,000건 가량. 하지만 실제 이뤄지는 낙태는 최소 10만건을 넘어설 거라는 게 의료계 안팎의 관측이다. 합법적인 낙태는 강간ㆍ준강간으로 인한 임신, 산모 위험, 유전적 이상 등의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한한다. 100건의 낙태 중 기껏해야 5건 정도만 합법이고, 낙태 여성과 수술 의사 등 연간 적어도 20만명 이상의 범법자를 양산하고 있을 정도로 우리 사회에 불법 낙태가 만연해 있다는 얘기다. 2012년 헌법재판소의 합헌 판결로 수면 아래 가라앉아있던 이 오랜 논란은 청와대 홈페이지에 20만명 넘는 이들이 낙태죄 폐지를 청원하고 나서면서 다시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왜 낙태죄 폐지를 원하나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 청원 코너에 등록된 낙태죄 폐지 청원의 참여인은 마감일인 30일 오후 5시 기준으로 23만명을 훌쩍 넘어섰다. 지난달 30일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합법화 및 도입을 부탁드립니다’라는 제목으로 등록된 이 청원은 “원치 않는 출산은 당사자와 태어나는 아이, 그리고 국가 모두에게 비극적인 일”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청원인은 아울러 “현재 119개국에서 합법으로 인정하는 자연 유산 유도약(미프진)을 국내에서도 합법으로 인정하면 원치 않는 임신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라며 ‘미프진’이라는 의약품의 국내 시판 허용도 요청했다.

등록 직후부터 참여 댓글이 빗발쳤다. ‘여성들에게만 책임을 묻는 낙태죄, 폐지되어야 합니다’ ‘사회적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고아 양산국이 된다고 사료됩니다.’ ‘낙태와 출산을 선택하고 결정할 권리는 여성에게 돌려줘야 합니다.’ ‘여성의 인권 회복과 준비된 부모 아래서 커갈 미래의 어린아이들을 위해 낙태죄 폐지 절대 찬성합니다.’ …

여성민우회 등 여성단체들은 “의학적으로 100% 완벽한 피임법은 없기 때문에 합법적이고 안전한 인공 임신중절을 보장해야 한다”며 “임신 중단을 범죄로 규정하고 처벌을 강화하는 행위는 인공임신중절을 근절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한 시술을 더욱 부추기는 방법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세계보건기구(WHO)와 미국 낙태 연구단체 구트마커연구소가 2010~14년 자료를 토대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낙태가 허용된 국가에서는 위험한 시술 비율이 10%에 그친 반면, 낙태 금지 국가에서는 75%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어떤 해법이 나올 수 있을까

청와대는 20만명 이상 추천을 받은 청원에 대해 30일 이내 청와대 수석이나 각 부처 장관 등이 공식 답변을 하도록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이로써 낙태죄 폐지 청원은 소년법 개정 청원에 이어 청와대의 두 번째 공식 답변을 받게 된다.

정부 안팎에서는 이번에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명쾌한 답변이 나올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본다. 한 정부 관계자는 “생명과 관련된 민감한 주제인데다 헌재도 합헌 결정을 한 사안“이라며 “현재로서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정도의 답변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고 전했다. 미프진 시판 허가 여부에 대해서도 안만호 식품의약품안전처 대변인은 “아직 제약사 측에서 허가 신청을 내지 않아 판단 자체를 하기 이전인 상태”라고 말했다.

하지만 청와대가 이번에 뾰족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해도 낙태죄 폐지를 둘러싼 요구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법과 현실의 괴리를 어떤 식으로든 좁혀야 한다는 주장이 여성계는 물론 각계 전반으로 확산돼 있기 때문이다.

실제 불법 낙태수술이 해마다 10만건 이상에 달하는 게 공공연한 사실임에도 정부는 적극적인 단속에 나서지도 않고 있다. 형법상 낙태죄로 기소돼 정식 재판을 받는 건수는 2014년 8건, 2015년 14건 등 연간 10건 안팎에 불과하다. 이에 대해 김형수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조정실장은 “낙태 관련 법 규정은 이미 사문화되어 법과 현실의 괴리가 크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라며 “현행법상 배우자 동의권 존치 여부, 임신 주(週)수에 따라 요건을 달리할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동석 대한산부인과의사회 회장은 “중학생 딸이 임신을 했는데 아이를 낳으라고 할 수 있는 부모가 얼마나 되겠냐”면서 “낙태를 전면 합법화 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무작정 막기만 하면 여성이 피해를 볼 수밖에 없으니 예외 규정을 현실화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낙태 반대 진영에서는 인공 임신중절에 대해 섣불리 손을 대면 생명 경시 풍조가 더 강해질 것이라는 우려를 접지 않는다. 낙태반대운동연합은 이날 의견서를 내고 “낙태의 문을 열면 지금도 심각한 생명경시 풍조가 더 만연할 것”이라며 “낙태 하지 않고 아이를 지키려는 부모 입장에서는 주변에서 낙태를 하라는 요구가 있을 때 법적으로 보호 받거나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기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성택 기자 highnoon@hankookilbo.com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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