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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신학 아닌 사회학으로 만나다

입력
2017.03.0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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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前 종교가 가진 의미

사회를 하나로 묶는 가치 부여

제후부터 농민ㆍ여성까지 참여

종교개혁 통해 사회개혁 이뤄

*종교개혁 토대 만든 루터

교황ㆍ가톨릭 신학자와 갈등 등

루터, 종교개혁 설명하는 열쇠

그의 활동에 초점을 맞춰 연재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부속 교회당 건물에다 '95개조 반박문'을 못박은 마르틴 루터. 근대는 이 못질에서 탄생했다. 페르디난트 포웰스 1872년작.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부속 교회당 건물에다 '95개조 반박문'을 못박은 마르틴 루터. 근대는 이 못질에서 탄생했다. 페르디난트 포웰스 1872년작.

의아할 것이다. 종교개혁 500주년과 같이 중차대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연재를 신학자나 종교학자 또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사회학자가 맡다니? 마르틴 루터의 면죄부 비판과 더불어 일어난 저 거대한 개혁은 ‘종교’개혁이 아니던가?

그러나 종교개혁은 단순히 종교적 측면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사회 전반에 걸쳐 깊은 변화를 가져온 개혁, 그러니까 ‘사회’개혁이었다. 종교개혁의 종교적 측면은 그보다 포괄적인 사회적 측면의 일부분으로 보아야 한다. 당시 종교가 사회와 갖는 관계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종교가 정치, 경제, 과학, 예술 등과 더불어 사회의 한 특정한 영역을 구성하고 있고 그 사회적 의미와 기능이 점점 더 축소되어가고 있는 반면, 종교개혁 시대에는 종교가 사회를 하나로 묶는 끈으로서 모든 사회적 영역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사회적 통일성을 창출하는 기제였다.

종교의 이러한 사회적 위상은 이성이 인간 사고와 행위의 최상 원리가 되는 계몽주의 시대까지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종교와 상극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 과학도 종교적 정당성을 필요로 했다. 예컨대 근대 과학혁명을 완성한 아이작 뉴턴은 신이 창조한 우주의 원리를 밝혀내는 것을 자신의 과학적 임무로 보았다. 그 이후 과학이 종교적 토대를 벗어나 하나의 독립적인 사회적 영역으로 자리매김하면서 과학이 종교와 갈등하고 투쟁하게 되었다. 막스 베버와 같은 사회학의 비조(鼻祖)가 그토록 종교 연구에 심혈을 기울인 이유이기도 하다.

종교개혁의 논의 방식은 이런 배경 속에서 나온다. 첫째 종교개혁은 단순히 신학적 또는 종교적 관점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종교와 사회의 관계라는 사회학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둘째 종교개혁은 단순히 역사적 사건으로 다루어서는 안 되고 그것이 근대에 대해 갖는 문화적 의의를 따져야 한다. 다시 말해 종교가 사회의 끈이던 종교개혁 시대가 종교가 더 이상 사회의 끈이 아닌 근대에 대해 갖는 의미를 물어야 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사회학자인 필자가 종교개혁 500주년에 대한 연재를 꾸리게 됐다.

물론 종교개혁의 신학적 또는 종교적 측면과 역사적 측면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종교개혁은 일차적으로 종교적 차원에서의 개혁이었고 장기간에 걸친 역사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 연재는 종교개혁의 신학적 측면과 역사적 측면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설명하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이 연재의 대상은 어디까지로 할 것인가?

종교개혁은 루터와 그가 활동한 도시 비텐베르크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츠빙글리와 칼뱅을 비롯한 수많은 개혁가들과 그들이 활동한 취리히와 제네바 등 수많은 도시가 없었다면 종교개혁은 완성될 수 없었다. 또한 ‘제후들의 종교개혁’과 ‘도시들의 종교개혁’이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로 제후들과 도시들도 종교개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루터의 영향으로 일어난 농민전쟁도 종교개혁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각인했다. 예술가들과 여성들도 종교개혁의 역사에서 일정한 지분을 갖는다.

마지막으로 가톨릭을 언급할 수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적 신학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로마 교황 및 가톨릭 신학자들과의 갈등과 투쟁을 결코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루터의 개혁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가톨릭의 개혁도 역시 종교개혁의 일환으로 볼 수 있고, 또 보아야 한다. 시기적으로 종교개혁은 짧게 잡아도 개인들의 종교적 자유가 허용되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까지 이른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종교개혁은 다양한 개인과 사회집단이 직ㆍ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장기간에 걸쳐 유럽 사회 전체를 뿌리 채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종교개혁이라는 풍경화가 완성될 것이다.

1519년 12월 10일. 교황의 파문 압박을 받은 마르틴 루터는 교황의 교서를 불태우는 화형식으로 결연히 맞선다. 파울 투만 1872년작.
1519년 12월 10일. 교황의 파문 압박을 받은 마르틴 루터는 교황의 교서를 불태우는 화형식으로 결연히 맞선다. 파울 투만 1872년작.

하지만 이 연재는 루터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다른 개혁가들이나 종교개혁의 다른 요소들을 언급하는 경우에도 일차적으로 루터와의 관계 속에서 논할 것이다. 비록 종교개혁은 루터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지만, 루터가 이 거대한 개혁운동에 시동을 걸었고 루터가 그 토대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은, 그것이 어떤 방향과 어떤 형태를 취하더라도, 루터라는 인물과 그의 저작 및 활동에서 준거점을 찾았다. 그러므로 루터는 종교개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열쇠이자 핵심이다. 이 연재의 제목이 ‘루터와 종교개혁 500년’인 이유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연재는 종교와 사회의 관계를 따지고 종교의 사회적 의미를 따지는 ‘사회학적’ 글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관점이 아니라 과학적 관점을 취하는 가치중립적인 글이다. 물론 신앙인도 이 연재의 독자가 될 수 있다. 다만 몇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첫째 개신교와 가톨릭의 대결이라는 틀에서 이 연재를 접하면 안 된다. 오늘날의 가톨릭은 루터가 개혁의 대상으로 삼았던 16세기 초의 가톨릭이 더 이상 아니다. 가톨릭도 끊임없이 개혁을 해왔기 때문이다. 둘째 특정한 교파나 분파를 옹호하거나 비판하기 위해 이 연재를 읽어서는 안 된다. 셋째 이 연재에서는 같은 용어를 신학이나 교회에서 사용하는 것과 달리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예컨대 문맥에 따라서 ‘하나님’ 대신에 ‘신’이라는 말을 쓸 수 있고 존칭을 생략할 수 있다.

김덕영 독일 카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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