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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들려도 들리지 않는

입력
2016.06.06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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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나는 이모네 집 대청마루 모서리에 걸터앉아, 섬돌 위에 놓인 내 빨강색 쓰레빠(슬리퍼의 일본식 표기) 밑으로 개미들이 줄지어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당으로 내려가서 놀고 싶은데 차마 쓰레빠를 신을 수 없었다. 개미들이 으스러지고 뭉개질 것 같아서. 섬돌 위에 찍혀 있는 검은 점과 붉은 얼룩들이 무심히 밟혀 사라진 개미들의 흔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 쪽 구석에 걸려 있는 괘종시계가 울리기 시작했다. 쇳덩어리로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은 소리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나는 자동차를 타지 못했다. 버스나 기차는 타본 적도 없었고, 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아버지 차에 올라타 기대에 부풀어, 언니들 사이에 끼어 앉아 있을 때까지는 괜찮았다. 막상 자동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비명을 지르면서 울었다. 식구들끼리 차를 타고 나들이를 가거나 멀리 가야 할 일이 생기면, 어머니는 옆 동네에 사는 큰 이모에게 나를 맡겼다. 우리 동네 병원 앞 횡단보도를 건너 기차가 다니는 건널목을 지나면 개천이 나왔다. 개천을 따라 걷다가 ‘생사탕’이라는 간판이 달려있는 가게 옆 골목으로 쭉 들어가면 이모네 집이었다. 생사탕은 사탕이 아니라 뱀을 끓인 것이라고 언니들은 말했다.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서인지 가게 앞에서 김을 뿜어내며 끓고 있는 큰 솥에서는 늘 역겨운 누린내가 났다.

어머니가 이모에게 내일까지 나를 데리고 있어달라고 부탁했다. 문득 걱정스러웠다. 이모네 집이 또 물에 잠기면 어떡하지? 이모네 집은 길에서 계단을 서너 개 내려가면 마당이 있는 작은 한옥이었다. 어느 해 여름에 비가 많이 와서 개천이 넘쳤을 때, 이모네 집이 물에 잠겼다. 그 때 어머니와 나는 길에 서서 이모네 식구들이 물을 퍼내는 것을 구경했다. 양동이와 대야와 냄비까지 동원되었다. 마당에는 책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얘는 차만 타면 멀미를 해서, 데리고 다닐 수가 없어. 어머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멀미를 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움직이는 쇳덩이들이 무서웠고, 빨리 움직이는 것들은 더 무서웠다. 기차는 타본 적도 없지만, 건널목 차단기 뒤에서 쏜살같이 달려가는 쇳덩이를 보기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모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저 건널목에서 며칠 전에 사람이 죽었어. 달리는 기차를 향해 어떤 남자가 뛰어들었대. 아니, 왜?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옅은 노란색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어머니의 얼굴을 살폈다. 오랫동안 폐병을 앓았고, 늙은 어머니가 시장에서 장사를 해서 먹고 살았는데, 낙상을 해서 일어나지도 못하게 됐대. 그런데 말이야. 갑자기 이모의 목소리가 괘종 소리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는 겁이 나서 개미들을 노려보았다.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이 그러는데, 오래 앓아서 뼈만 남은 청년이 엄청나게 큰 고함을 지르며 기차를 향해 뛰어 들었단다… 쯧쯧. 어머니가 양미간을 찡그리며 혀를 찼다.

그게 바로 내가 들은 그 소리였을까. 건널목에서 기차가 지나갈 때 났던 소리.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세상의 모든 억울함과 슬픔이 담겨 있는 것 같은 소리. 왜 그 사람이 살아있을 때는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을까. 왜 그 사람이 죽고 난 뒤에 나에게 그 소리가 들렸을까. 하필이면 개미들을 밟아 죽일까 봐 섬돌 위에 놓인 신발을 신지도 못하는 나에게? 나는 마음을 굳게 다지며 쓰레빠를 신었다. 다시는 건널목 앞에 서 있지 말아야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아무 소리도 듣지 말아야지.

한동안 잊고 있던 소리의 기억을 떠올린다. 어쩌면 지금도 세상의 모든 기차들은 잘 들리지 않는 소리와 함께 빨리, 더 빨리 달려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마음 여린 누군가는 그 소리를 듣고 있을지도 모르고.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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