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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회 칼럼] ‘다음’을 사유하는 힘

입력
2017.12.25 13:46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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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랬듯이 ‘어느덧’ 세밑이다. 올해가 졸지에 헌 해로 갈무리되고 새해가 시나브로 다가서는 때다. 아무리 소중해도 떠나 보내고 별로 설레지 않아도 맞이해야 하는 송구영신의 즈음이다.

대자연의 섭리를 따라야 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옛 시인이 “하늘의 섭리는 그저 맞닥뜨릴 뿐/ 그 변화를 어찌할 수는 없나니”(장구령ㆍ張九齡, ‘감회’)라 노래했듯이 인간은 세밑이 되면 올해를 헌 해들의 세계로 떠나 보내고, 정초가 되면 새해를 올해로 맞이할 수밖에 없다. 물론 ‘자기 주도적’으로 보내고 맞을 수도 있다.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 보낼 것들을 선택할 수 있고, 다가오는 미래를 뜻대로 기획할 수도 있다. 이른바 ‘자율의지’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사회는 개개인의 자율의지대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과거보다는 미래 기획이 더욱 그러한데, 상이한 욕망을 지닌 개인들이 모여 사는 사회서 개개인의 삶이 동시에 펼쳐지기에 그렇다. 개인적으론 자신이 애쓴다면 잊고 싶은 것을 헌 해, 곧 과거로 보냄으로써 지워갈 수도 있다. 그러나 새해맞이, 그러니까 미래 설계는 본인이 힘껏 노력한다고 하여 실현되는 건 아니다. 혹 온 우주가 나서 세상을 나를 중심으로 돌려준다면 모르겠지만, 온갖 권력을 대를 거듭하여 다 쥔다 해도 세상을 자기 중심으로 돌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인 차원서 수행되는 미래 기획은 무의미한 것일까. 역사는 절대 그렇지 않았음을 밝히 말해준다. 다만 개인이 미래를 기획했을 때 그 실현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 두 조건이 충족돼야 함을 함께 일러준다.

첫째, 국가사회의 미래가 예측 가능해야 한다. 그 근거는 공자의 “이름값이 바로잡혀 있지 못하면 말이 순통하지 못하게 된다. 말이 순통하지 못하면 일이 완성되질 못한다. 그러면 예악이 흥하지 못하게 되고 그 결과 형벌이 중심을 잡지 못하게 된다. 그리 되면 백성은 손발 둘 데가 없어진다”(논어)는 언명이다. 여기서 ‘예악’은 사회제도를 뜻한다. 예악이 흥하지 못하다는 것은 따라서 사회제도가 온전히 작동되지 못함을 의미한다. ‘백성’은 지금으로 치자면 서민에 해당된다. “백성이 손발 둘 데가 없어진다”는 그래서 서민이 기준으로 삼을 바가 없어 불안해한다는 상황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이는 뒤집어 읽으면, 법 집행이 일관되게 이뤄지고 사회제도가 원칙에 맞게 작동됐을 때, 그래서 사법제도를 비롯한 제반 사회제도의 운용이 예측 가능해졌을 때 서민의 안정적 삶이 비로소 실현 가능케 된다는 뜻이 된다. 사회적으로 상대적 약자인 서민이 공적 신뢰를 갖춘 사회제도를 기반으로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면 그만큼 실현 가능성이 높아지기에 그렇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국가사회의 예측 가능한 미래에 맞추어 자기 미래를 기획하면 그만큼 실현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얘기다. 큰 성공을 보장한다는 뜻이 아니다. 적어도 실패 확률을 낮출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둘째, 개인이 ‘다음’을 사유하는 힘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당장의 현실을 기반으로 사유해야 함은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매몰되면 그만큼 설계한 미래의 실현 가능성은 낮아지게 된다. 당대의 한 시인이 “밤이 다 새기 전부터 바다 밑의 해는 떠오르고/ 한 해가 다 가기 전부터 강에는 새봄이 스며든다”(왕만ㆍ王灣, ‘북고산 밑에 묵다’)고 통찰했듯이, 현실에는 장차 그렇게 전개될 미래가 이미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하여 실현되어 드러나 있는 것들에만 눈길을 준다면 거기에 함께 존재하는, 아직 드러나진 않았지만 반드시 실현될 바를 놓치게 된다. 미래 설계의 실현 가능성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까닭이다. 물론 밤에 집중하느라 떠오를 해를 보지 못하고, 겨울 추위에 고생하느라 새해 들어 찾아올 봄을 생각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밤이 가면 새벽이 옴은, 겨울이 가면 새봄이 옴은 대자연의 정해진 섭리다. 아무리 짙은 어둠 속일지라도, 그리도 지독한 추위 속일지라도 너끈히 예측 가능한 미래다. 이를 동시에 사유하지 못한다면 어둠 그 다음을, 추위 그 다음을 야무지게 설계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다.

송대의 대문호 소동파(蘇東坡)는 “세상 환난 가운데 가장 처리하기 어려운 것이, 겉으론 태평무사하지만 이면에는 크나큰 우환이 잠재되어 있는 상태다. 그 변고에 주목하지 않아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를까 두렵다”(‘조조론ㆍ晁錯論’)고 고백했다. 문제가 이미 발생한 다음에 조치하는 것만으론 부족하다는 견해다. 미래의 우환은 반드시 오늘의 현실을 구성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늘 현상을 통해 이면을 통찰하고, 현재를 통해 미래를 대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권고다.

이는 단지 국가사회 경영에 참여코자 하는 지식인, 관리에게만 유효한 당부가 아니다. 오히려 ‘다음’을 사유하는 힘은 사회적 약자에게 더욱 절실한 삶의 태도이자 필히 갖춰야 하는 역량일 수 있다. 나의 미래를 조금이라도 더 바람대로 실현하기 위해선 말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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