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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 만개 백련사에서 강진만 품은 다산초당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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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 만개 백련사에서 강진만 품은 다산초당까지

입력
2018.03.27 18:0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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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부터 꽃을 피워온 백련사 동백은 절정을 지나 끝물에 다다랐다. 여행객들이 떨어진 동백꽃을 모아 하트 모양으로 장식해 놓았다. 강진=최흥수기자
지난 겨울부터 꽃을 피워온 백련사 동백은 절정을 지나 끝물에 다다랐다. 여행객들이 떨어진 동백꽃을 모아 하트 모양으로 장식해 놓았다. 강진=최흥수기자

전남 강진을 소개할 때마다 ‘남도답사 일번지’라는 수식이 빠지지 않는다. 그 중심에 정약용이 18년간의 강진 유배 생활 중 10년을 보낸 다산초당이 있다. 초당으로 바로 갈 수도 있지만, 만덕산 자락 백련사에서 출발해 조금 에두르는 길을 택했다. 불교와 유교의 아름다운 인연이 오간 조붓한 산길이면서 강진만의 질펀하고 넉넉한 풍경을 굽어볼 수 있는 길이다.

지치고 지쳐 붉게 떨어진 백련사의 봄

전국에 곧 꽃 물결이 일렁일 터인데 백련사의 봄은 끝물로 치닫고 있다. 이 무렵 백련사는 절보다 동백꽃으로 더 유명하다. 일주문에서 사찰에 이르는 언덕에 1,500여그루의 동백나무가 빼곡하게 숲을 이뤘다. 검푸르고 두꺼운 잎이 하늘을 가려 한낮에도 어둑어둑한데, 지난해 11월부터 피기 시작한 꽃송이가 떨어져 바닥을 온통 붉게 물들였다. 절정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새운 4기의 부도가 흩어져 있는 사찰 서편 비탈이다. 행여나 밟을세라 발걸음을 뗄 때마다 조심스럽다. 마음 고운 여행객이 한 송이 두 송이 모아놓은 꽃이 군데군데 하트 장식을 이뤘고, 오래된 옹이와 바위 웅덩이에는 소복소복 꽃 무덤이 만들어졌다.

백련사 주변은 1,500여그루의 동백이 빼곡한 숲을 이뤘다.
백련사 주변은 1,500여그루의 동백이 빼곡한 숲을 이뤘다.
한 여행객이 떨어진 동백꽃으로 부도를 장식하고 있다.
한 여행객이 떨어진 동백꽃으로 부도를 장식하고 있다.

백련사는 신라 문성왕 때 만덕사로 창건했다가 고려 희종 7년(1211)에 원묘국사 요세 스님이 중창했다고 전해진다. 고려 후기 몽골과 왜의 침략으로 나라가 어지러울 때 민중과 함께 참회와 수행으로 정토를 만들어가자는 ‘백련결사’ 운동을 벌인 것을 계기로 백련사(白蓮社)라 부르다가 나중에 ‘절 사(寺)자’로 바뀌었다. 전각이나 사찰 규모가 역사에 비하면 소박한 편이어서 오히려 정감 있다. 대웅전 앞마당의 배롱나무는 매끈하면서도 기품이 넘치고, 홍매화와 백매화가 한두 그루씩 꽃을 피운 경내도 요란스럽지 않다.

백련사 차 밭에 봄 햇살이 내리고 있다. 지난 겨울 냉해를 입어 말라버린 찻잎에도 봄 기운이 오른다.
백련사 차 밭에 봄 햇살이 내리고 있다. 지난 겨울 냉해를 입어 말라버린 찻잎에도 봄 기운이 오른다.
백련사 동백 숲 아래로 강진만이 아련하게 펼쳐진다.
백련사 동백 숲 아래로 강진만이 아련하게 펼쳐진다.

어둑어둑한 동백나무 숲을 빠져나오면 양지바른 비탈에 역시 넓지 않은 차 밭이 조성돼 있다. 지난겨울 혹독한 추위에 냉해를 입어 말라버린 이파리에도 푸르른 봄 기운이 오르는 중이다. 이곳은 그나마 정갈하게 가꿔 다원의 면모를 갖췄을 뿐, 백련사를 중심으로 한 산자락 일대가 오래된 야생 차 밭이다. 눈썰미 좋은 사람이라면 다산초당으로 연결되는 산책로 주변에서도 어렵지 않게 차나무를 발견할 수 있다. 정약용의 호 다산(茶山)도 바로 이곳 차 나무로 덮인 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다산이 백련사 혜장 스님에게 차를 얻기 위해 간청하며 보낸 편지 ‘걸명소(乞茗疏)’에는 차를 즐기는 그의 마음과 유머가 담겨 있다. “나그네는 요즘 차를 탐식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겸하여 약으로 삼고 있소…듣건대 죽은 뒤 고해의 다리를 건너는 데 가장 큰 시주는 명산의 고액이 뭉친 차 한 줌 보내 주시는 일이라 하오. 목마르게 바라는 이 염원, 부디 물리치지 마시고 베풀어 주소서.”

기록의 달인 정약용의 ‘다산출판사’와 ‘다산학원’

차 밭을 지나 쉬엄쉬엄 30여분을 걸어 높지 않은 능선 하나를 넘으면 다산초당에 닿는다. 우측으로는 만덕산의 험준한 바위능선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고, 맞은편으로는 강진만 바다가 넉넉하게 펼쳐진 길이다. 길 양편으로 후박나무 삼나무 대나무 등 사철 푸른 나무들이 낙엽수와 섞여 있고, 간간이 진달래꽃이 환하게 숲을 밝혀 발걸음이 심심하지 않다. 초당에 이르기 직전 언덕 모퉁이에는 천일각(天一閣)이라는 정자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 내려다본 강진만 풍경이 다산의 고향(남양주 조안면)에서 한강을 보는 모습과 비슷할 것으로 추측해 1975년 강진군에서 세운 정자다.

다산초당 동암 옆에 세운 천일각과 강진만. 남양주 다산의 고향에서 본 한강의 모습도 이러했으리라.
다산초당 동암 옆에 세운 천일각과 강진만. 남양주 다산의 고향에서 본 한강의 모습도 이러했으리라.
연지에 비친 다산초당의 모습. 연못 안 돌무더기까지 합해 다산은 ‘연지석가산’이라 이름 붙였다.
연지에 비친 다산초당의 모습. 연못 안 돌무더기까지 합해 다산은 ‘연지석가산’이라 이름 붙였다.
다산초당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에서 집자했다.
다산초당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에서 집자했다.

다산초당은 알려진 대로 조선시대 최고의 천재 정약용이 강진 유배 18년 중 10여년을 기거하며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600여권의 서적을 집대성한 곳이다. 이 때문에 tvN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의 출연자들은 다산초당을 ‘다산출판사’에 비유했다. 초당 주변의 ‘다산사경(茶山四景)’에도 기록의 달인 정약용의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난다. 초당 앞 작고 넓적한 바위는 차 달이는 부뚜막 다조(茶竈)로 표현했고, 뒤쪽 모퉁이의 샘물은 약천(藥泉)이라 불렀다. 왼편 연못 가운데는 동그랗게 돌 더미를 쌓아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라 이름했다. 연못에는 잉어를 길렀는데, 유배에서 풀려난 후 제자들에게 안부를 물을 정도로 애정을 쏟았다고 전해진다. 초당 오른편 바위에는 자신의 성을 따 정석(丁石)이라는 두 글자를 직접 새겼다. 크지도, 도드라지게 모양이 빼어나지도 않은 그저 그런 평범한 바위다. 주변의 작은 것들에 눈길을 주고 의미를 부여하며 소소한 재미를 찾으려 했던 섬세함이 엿보인다. 언제 끝날지 모를 유배 생활의 적적함을 달래는 방편이기도 했으리라.

다산초당 내부의 초상화는 수묵인물화의 대가로 꼽히는 김호석 화백의 작품이다.
다산초당 내부의 초상화는 수묵인물화의 대가로 꼽히는 김호석 화백의 작품이다.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계단 양편은 난대상록수와 대나무 소나무가 어우러져 한겨울에도 늘 푸르고 싱그럽다.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계단 양편은 난대상록수와 대나무 소나무가 어우러져 한겨울에도 늘 푸르고 싱그럽다.
다사초당 초입 귤동마을 민가에 오래된 산수유가 노랗게 꽃을 피웠다.
다사초당 초입 귤동마을 민가에 오래된 산수유가 노랗게 꽃을 피웠다.

초당이 자리 잡은 산세나 숲만 보면 은퇴자가 전원생활 하듯 여유롭고 풍족하게 유배 생활을 즐겼을 것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다산이 이곳에 자리잡기까지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처음엔 읍내 주막에서 4년을 보냈고, 고성암이라는 작은 암자와 제자 이학래의 집에서 3년을 지냈다. 그런 다산에게 초당을 내준 것은 모친과 본이 같은 해남 윤씨 윤단이었다. (모친의 할아버지는 고산 윤선도의 5대조 윤두서다) 추사 김정희의 친필을 집자한 현판이 걸린 지금의 다산초당은 1957년 다산유족보존회에서 기존의 초가를 치우고 기와로 복원한 건물이다. 초당 앞 서암(西庵)도 흔적만 남은 것을 1975년 복원했다. 서암은 윤종기 등 다산의 18 제자가 기거하던 곳으로, 차와 벗하며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한다는 뜻의 다성각(茶星閣)으로도 부른다. 초당이 ‘다산출판사’였다면, 서암은 ‘다산학원’인 셈이다.

가파른 계단 양편으로 대나무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청량한 숲을 빠져나오면 햇살이 따사로운 귤동마을이다. 그 옛날 유자가 흔했다는데 지금은 볼 수 없고, 대신 돌담 너머로 화사한 매화와 노란 산수유가 정겹다.

호남 3대 정원으로 꼽히는 백운동 별서정원. 다산이 월출산을 여행하다 묵어간 곳이다.
호남 3대 정원으로 꼽히는 백운동 별서정원. 다산이 월출산을 여행하다 묵어간 곳이다.
백운동정원에서 본 월출산 바위 봉우리.
백운동정원에서 본 월출산 바위 봉우리.

다산초당에서 약 30km 떨어진 성전면 ‘백운동 별서정원’에도 다산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백운동 정원은 조선 중기 처사 이담로(1627~1701)가 월출산에서 흘러내린 계곡과 인공을 적절히 조화시킨 원림으로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세연정과 함께 호남의 3대 정원으로 평가 받는다. 1812년 이곳을 다녀간 다산은 제자 초의선사에게 ‘백운동도’를 그리게 해 백운동 원림의 12승경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강진=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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