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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쿠팡, 美의 육류포장… 재난은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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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쿠팡, 美의 육류포장… 재난은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다

입력
2020.06.09 04:3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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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서울 중구 을지로 노가리 골목에 설치된 임시 선별진료소에서 레벨D 방호복을 착용한 의료진이 지역 상인에 대한 코로나19 검사를 진행하고 있다. 코로나19만큼이나 생계도 무섭다. 연합뉴스
5일 서울 중구 을지로 노가리 골목에 설치된 임시 선별진료소에서 레벨D 방호복을 착용한 의료진이 지역 상인에 대한 코로나19 검사를 진행하고 있다. 코로나19만큼이나 생계도 무섭다. 연합뉴스

“그러면 남편도 검사 결과 나올 때까지 출근하지 말아야 하는 건가요.” 확진자가 발생했던 콜센터에서 일하는 여성분이었습니다. 코로나19보다 생계가 더 걱정인 얼굴이었습니다. “많이 힘드시지요.” 투명 플라스틱 유리창 너머 말을 건넸습니다. “예. 선생님, 저 많이 힘들어요.”

저는 4월부터 서울의 한 보건소 코로나19 선별진료소에서 주말마다 일하고 있습니다. 15년 전 교도소에서 공중보건의사로 일했던 것이 임상의사 경력의 전부인 제가 보호복을 입겠다 한 건 지난 3월 발생했던 두 개의 사건 때문입니다.

새벽 2시에 물건을 배송하던 한 택배 노동자가 빌라 계단에서 쓰러진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새벽 5시 30분 여의도에서 녹즙 배달을 하고 구로의 콜센터로 두 번째 출근한 노동자는 확진자가 되자 주변 사람들에게 죄송하다는 문자를 보내야 했습니다. 열악한 삶의 무게를 감당해야 했던 이들이 제일 먼저 아프고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재난은 평등하지 않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더 좋아해서가 아닙니다. 편견과 낙인 속에서 살아가며 기저질환으로 고통받던 이들이 감염에 더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감염이 걱정돼도 일을 거부하거나 병가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축적된 정치적 불평등 상황 속에서 재난은 가장 약한 사람들을 먼저 무너뜨립니다.

미국의 육류포장(meat-packing) 노동자들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소, 돼지, 닭을 도살하고 가공하는 육류포장 공장은 거리두기가 불가능한, 비위생적이고 열악한 근무환경으로 인해 코로나19의 핫스팟(hotspot)이 되었습니다. 4월 27일 미국 질병관리본부 발표에 따르면 감염된 노동자들 숫자가 4,913명에 달했고 공장이 하나 둘 폐쇄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달 20일 미국 시카고 지역 의사들이 육류포장 노동자들의 코로나19 감염을 막기 위해 시카고 일대 육류포장 공장을 다시 폐쇄하거나, 노동 환경을 즉각 개선해달라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시카고=AP 연합뉴스
지난달 20일 미국 시카고 지역 의사들이 육류포장 노동자들의 코로나19 감염을 막기 위해 시카고 일대 육류포장 공장을 다시 폐쇄하거나, 노동 환경을 즉각 개선해달라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시카고=AP 연합뉴스

그러자 고기 값이 폭등했습니다. 고기를 구할 수 없어 햄버거 같은 패스트푸드 판매가 중단되기도 했고, 코스트코 같은 대형 유통매장들은 육류 판매를 제한하기 시작했습니다. 육식이 일상인 미국은 비상이 걸렸지요. 결국 4월 28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전쟁 당시 군수물자 공급을 강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을 이용해 육류포장 작업을 재개하라는 강제 행정명령을 내립니다. 육류포장 공장은 “필수적 국가기반 시설”이라는 게 근거였습니다.

그런 히스패닉 노동자들에게 이주노동자 추방을 공약으로 내건 트럼프 대통령, 그가 내린 강제 행정명령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노동자들은 공장으로 되돌아가라는 명령에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는 예상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시 가동된 아이오와주 페리의 타이슨 푸드공장은 5월 8일 기준, 노동자의 60%인 730명이 코로나19 양성판정을 받았습니다. 5월 말 코로나19 감염 육류포장 노동자의 수는 이미 1만5,000명을 넘었습니다.

한국에도 미국의 육류포장 노동자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위험에 내몰린 채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지난 주 확진자가 발생했던 부천의 쿠팡물류센터에서 일하던 노동자 3,790명 중 2,588명이 일용직이고, 984명이 계약직이었습니다. 정규직은 전체의 2.6%인 98명에 불과했습니다. 일용직 노동자들은 모자와 신발을 함께 써야 하는 노동환경에 불만을 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자 지난달 28일 경기 부천 쿠팡물류센터가 폐쇄됐다. 배우한 기자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자 지난달 28일 경기 부천 쿠팡물류센터가 폐쇄됐다. 배우한 기자

지난달 직장갑질119의 설문조사를 봐도, 작업 환경이 코로나19로부터 안전하지 않다고 응답했던 이들은 상용직 노동자의 경우 35.5%였지만, 일용직 노동자들은 무려 60.7%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쿠팡 같은 곳에서 확진자가 계속 생겨나도 일용직 근무를 원하는 이들은 여전히 많습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이나 영화배우 톰 행크스 같은 유명인들이 코로나19에 걸렸다는 뉴스를 심심치 않게 접합니다. 하지만 전세계 어디에서든 코로나19에 더 많이 노출되고, 더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이들은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입니다. 더 위험한 곳에서 일하고 더 쉽게 해고당합니다. 내일 당장 뭘 먹고 살아야 하는지, 밤잠을 못 이루는 이들입니다. 낭떠러지 앞에 선 사람들의 목소리는, 애써 찾지 않으면 들리지 않습니다. 아프다고 소리치는 데에도 권력이 필요하니까요.

몇 주 전부터 선별진료소를 찾는 분들이 다양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콜센터에서 일하거나 이태원 클럽에 갔던 사람들이 대다수였는데, 이제는 PC방, 노래방, 교회, 학원, 학교 등 다양한 곳에서 확진자가 발생합니다. 지난 4개월보다 더 고통스러운 시간이 우리 앞에서 기다리는 것 같아 두렵습니다. 힘겨운 이들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부디 함께 살아남았으면 좋겠습니다.

 김승섭 고려대 보건대 교수ㆍ‘아픔이 길이 되려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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