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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인간수업’으로 청소년 이해하기

입력
2020.05.25 04:3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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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에서 제작한 10부작 드라마 ‘인간수업’.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10부작 드라마 ‘인간수업’. 넷플릭스 제공

사람 간의 사회적 거리가 멀어질수록 집에서 영화나 드라마를 자주 보게 된다. 바이러스가 지배하는 세상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성찰을 하게 되는 좋은 기회이며, 조용히 글을 읽는 것 못지않게 시각적인 매체를 통한 접근 또한 뇌를 자극하는 데 괜찮은 것 같다.

“참 부끄러운 생애를 보냈습니다.” 이 말은 일본 근대문학의 대표적인 작가인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에 나온 본인 스스로에 대한 고백이며, 최근 그의 자전적 소설 ‘인간 실격’이 영화로 재해석되었다. 그는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인간에 대한 불신과 공포로 인해 사람들과 의미 있는 관계 형성에 거듭 실패하였다. 소설 역시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가는 과정을 묘사한 내용으로 인생의 의미에 대한 많은 고민을 던져주고 있다.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은 어린 시절에 이미 어느 정도 완성된다고 한다. 대상관계이론의 대가인 마거릿 말러(Margaret Mahler)는 분리 개별화에 대한 개념을 통해 어머니와의 정상적인 분리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성장하면서 사람들과의 관계 형성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다자이 오사무’처럼 주위 사람과의 관계를 잘 맺지 못해서 정신건강의학과 외래를 방문하는 청소년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가정 내에 심각한 갈등이 있거나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호소하는 증상들은 다양하지만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감정적인 교류가 원활하지 못하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2020년을 사는 청소년의 심리를 이해하는데 또 다른 흥미로운 작품은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Netflix) 오리지널 시리즈 ‘인간수업’이다. 성매매 알선 브로커인 ‘지수’와 연예기획사 사장의 외동딸인 ‘규리’는 학교에서는 모범생이지만 실제로는 범죄에 대한 죄의식을 별로 느끼지 못하는 이중적인 인격을 가진 인간들로 묘사된다. 물론, 드라마의 연출이 의도한 바가 있겠지만 주인공들이 보이는 복잡한 감정과 인지 구조 그리고 일탈 행동에 대한 연결고리가 청소년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포인트이다.

‘지수’는 도박중독자인 아버지와 도망간 어머니를 둔 불우한 가정환경의 피해자로 볼 수 있다. 반면 경제적으로 유복하고 부모의 관심이 지극한 ‘규리’는 소위 ‘인싸’ 의 전형에 해당된다. 성매매의 알선을 통해 돈을 벌려고 하는 그들의 집착이 쉽게 납득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두 주인공이 일반적인 청소년과 다소 다르다고 할지라도 권위적이지 않은 교사나 정의로운 경찰 모두 깊게 숨겨진 그들의 정서를 굳이 이해하려고 들지는 않는다.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모든 어른들은 청소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청소년들 역시 사람 간의 관계를 맺어가는 방법이 서툴고 미숙하기만 하다.

만남에 아무런 즐거움도, 이별에 진한 슬픔도 없는 황량한 인간관계야말로 인간 실격의 삶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는 것은 기본적인 신뢰에서 출발하는 것인데 ‘인간수업’에 등장하는 청소년들에게는 격렬한 감정의 배출만 있을 뿐 믿음에 대한 양가감정의 몸부림이 그림자에 그치고 있다. 에릭 에릭슨(Eric Erikson)은 인간의 가장 밑바탕에서 버팀목이 되는 덕목을 기본 신뢰(basic trust)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을 때 청소년기의 과제인 정체성은 완성되기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청소년의 일탈을 어른의 시각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을 인정받기 위한 절규로 보기 시작할 때 비로소 그들과의 대화가 열릴 수 있다. 인지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neman)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만족감이다’라고 했다. 어른들이 행복을 강요할 때 청소년들이 만족감을 느끼는 세상은 저 멀리에 있을 것이다.

박종익 강원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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