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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 성우 거쳐 단역 전전하다 흥행 보증수표로

입력
2020.04.11 04:3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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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 충무로 르네상스 이끈 ‘막동이’ 한석규 

 

 ※ 한국영화가 지난해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며 영화보다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를 통해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서 들려드립니다. 

TV드라마로 스타덤에 오른 한석규는 영화로 연기 영역을 넓혀 한국 영화 르네상스를 견인하는 주역 중 한명으로 활약하게 된다. KM컬쳐 제공
TV드라마로 스타덤에 오른 한석규는 영화로 연기 영역을 넓혀 한국 영화 르네상스를 견인하는 주역 중 한명으로 활약하게 된다. KM컬쳐 제공

한석규가 배우가 되기로 다짐한 건 16세 때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공연에서 윤복희의 연기를 보고 나서다. 동국대 연극영화과 83학번으로 진학할 무렵, 그의 마음은 영화보다는 연극무대에 있었다.

차범석 작가의 희곡 ‘장미의 성’ 초연에 참여하면서 자질을 인정받았고 졸업반 때는 선배 최민식과 함께 아서 밀러의 ‘나의 아들들’ 무대에 서면서 자신감을 가졌다. 가수로서도 실력이 있어 뒷날 ‘휘파람 공주’(2002)를 연출하는 선배 이정황 감독과 손잡고 통기타 중창단 ‘덧마루’를 구성해 1984년 제5회 MBC 강변가요제에서 ‘길 잃은 친구에게’를 불러 장려상을 받기도 했다. ‘8월의 크리스마스’(1998)의 주제가를 직접 부른 건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나 졸업 이후 부딪친 현실의 벽은 만만치 않았다. 국립극단의 오디션에 지원했지만 떨어져 고배를 들이켜야 했고, 대학로의 극단을 전전했지만 주어지는 건 사무실 청소와 포스터 붙이기 등 잡일뿐이었다.

한석규는 MBC 드라마 '서울의 달'에서 출세욕에 눈이 먼 제비족을 연기하며 배우로서 입지를 다졌다. MBC 제공
한석규는 MBC 드라마 '서울의 달'에서 출세욕에 눈이 먼 제비족을 연기하며 배우로서 입지를 다졌다. MBC 제공

대학로를 뛰쳐나온 한석규는 평범한 직장인의 삶을 살고자 취업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이 또한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고, 앞길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 속에서 1년을 보내야 했다. 1989년 12월, 낙담하고 있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KBS 성우 공채시험에 응모해 22기 전속성우로 합격한 것이다. 같은 날 MBC 탤런트 공채시험이 있었음에도 한석규는 성우 시험에 지원했는데, ‘나 같은 평범한 외모로는 탤런트가 되기 어렵’(한석규 글 ‘나의 청춘일기’)고, 군 복무 시절 다친 허리가 낫지 않은 탓에 몸을 많이 움직이는 배우 일은 힘들 것 같다는 생각에 내린 결정이었다. 라디오 드라마에서 주로 활약했던 이 시기의 성우 경험은 생활인으로서 그에게 경제적 안정을 가져다 주기도 했지만, 정확한 발음과 발성을 단련하면서 배우의 자질을 다듬는 시간이기도 했다.

학교 선배로 배우에서 성우로 전업해있던 장세준은 막 입사한 한석규에게 한 마디 조언을 남겼다고 한다. "넌 성우도 어울리지만, 내가 보기엔 배우가 더 어울린다." 이에 자극 받은 한석규는 두 가지 일을 겸업하는 길을 모색하며 선배들의 조언을 구했고, 1년 반을 성우로 일하다 1991년 8월 MBC 탤런트 공채시험에 합격하게 된다. 시험 응시 자격 연령 제한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던 27세 때의 일이었다.

그의 첫 드라마 출연은 MBC 베스트극장의 사극 ‘달’(1991)이었다. 한석규의 배역은 배우 오연수가 탄 가마를 드는 가마꾼 네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대사 한 줄 없고 얼굴도 제대로 비춰주지 않는 단역이었지만, 이때 현장에서 “‘아리랑’(1926)의 나운규 선생님도 처음 맡은 배역은 가마꾼이었단다. 너도 또 아니? 나운규 선생님처럼 큰 스타가 될지?”라는 격려를 듣고 힘을 얻었다고 한다.

한석규는 영화 '닥터 봉'(1995)에서 대학 후배 김혜수와 연기 호흡을 맞춰 성공적인 영화 데뷔식을 치른다. 황기성사단 제공
한석규는 영화 '닥터 봉'(1995)에서 대학 후배 김혜수와 연기 호흡을 맞춰 성공적인 영화 데뷔식을 치른다. 황기성사단 제공

 ◇드라마 ‘아들과 딸’로 스타 발돋움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1990~94) ‘여명의 눈동자’(1991~92) 등에서 단역을 전전하던 한석규는 드라마 ‘아들과 딸’(1993)에서 주인공 이후남(김희애)의 조력자인 한석호로 비중이 큰 역할을 맡게 된다. 원래 이 역할은 문성근에게 제안이 갔다가 일정이 맞지 않아 그에게 돌아갔다고 한다.

극 중에서 얼핏 냉담해 보이지만 이후남에겐 마음을 열고 자상한 면을 보이는 한석호의 페미니스트적 캐릭터는 큰 호응을 얻었고, 드라마가 시청률 61.1%를 기록하면서 한석규는 단숨에 인기 탤런트의 반열에 뛰어올랐다. 이 드라마는 오늘날까지도 그에게 따라붙는 ‘부드러운 남자’ 이미지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항공드라마 ‘파일럿’(1993) 또한 시청률 46.2%라는 성과를 남겼고, ‘서울의 달’(1994)에서는 밑바닥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제비족 홍식 역으로 이미지 변신에 성공하면서 한석규는 전천후 연기자의 면모를 뽐내게 된다.

드라마의 연속적인 성공으로 스타성이 검증된 한석규가 충무로에 진출한다는 말이 돌자 그를 붙잡기 위한 영화사의 러브콜이 이어졌다. 한석규는 동국대 재학 시절 단편영화를 연출하기도 했고, 은사였던 유현목 감독의 유작 ‘엄마와 별과 말미잘’(1995)로 잠시나마 영화현장을 경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는 비중이 거의 없다시피 한 단역이었고 최민식, 채시라와 더불어 스승에 대한 보은의 차원에서 잠시 얼굴을 내비친 수준이었다.

스릴러 영화 ‘손톱’(1994)의 주인공으로 내정되어 진희경과 함께 출연할 예정이었지만, 첫 영화는 대중적으로 쉽고 무난한 작품이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거절했다. 한석규의 영화배우 데뷔는 영화사 황기성사단의 로맨틱 코미디 ‘닥터 봉’(1995ㆍ감독 이광훈)으로 이뤄지게 된다.

‘닥터 봉’은 서울관객 37만 6,000명이 드는 흥행 성공을 거두었고, 제32회 백상예술대상과 제6회 춘사영화제 신인남우상을 안기며 영화배우 한석규의 전성기를 열었다. MBC 미니시리즈 ‘호텔’(1995)에도 겹치기 출연 중이었던 한석규는 이때부터 ‘뿌리 깊은 나무’(2011)의 세종 역으로 방송 복귀하기까지 16년간을 온전히 영화 연기에 전념하게 된다.

“관객의 반응까지 계산하다 보니 연기가 너무 계산적으로 나왔다“(메이킹 다큐멘터리 ‘은행나무 침대의 비밀’)는 아쉬움을 토로하긴 했지만, 다음 작품으로 선택한 강제규 감독의 데뷔작 ‘은행나무 침대’(1996)까지 크게 히트하면서 한석규는 충무로의 ‘흥행보증수표’로 각인되었고, ‘접속’(1997)을 찍을 때 그의 출연료는 당시 최고액이었던 1억5,000만원을 갱신한 2억원까지 치솟았다.

영화 '초록물고기'(1997)는 한석규에게 수 많은 상을 안기며 그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된다. 이스트필름 제공
영화 '초록물고기'(1997)는 한석규에게 수 많은 상을 안기며 그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된다. 이스트필름 제공

이 무렵 충무로는 대기업과 금융권의 투자가 밀려들고, 신진 영화인들이 현장에 유입되면서 활력이 붙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그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한석규는 장윤현 감독의 ‘접속’, 이창동 감독의 데뷔작 ‘초록 물고기’, 조폭 코미디 유행을 선도한 송능한 감독의 ‘넘버 3’, 한국 멜로영화의 걸작으로 기억되는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 (1997) 등 당시로선 신인이었던 감독들의 작품에 참여하며 막 태동한 한국영화의 부흥기를 견인했다. 장르적으로 과장된 캐릭터 연기에서 자연스럽고 잔잔한 일상 연기에 이르기까지, 한석규는 각양각색의 작품을 소화하면서도 톤이 겹치지 않는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과시했다.

영화 '쉬리'로 한석규는 흥행 배우로서의 정점에 오른다. 강제규필름 제공
영화 '쉬리'로 한석규는 흥행 배우로서의 정점에 오른다. 강제규필름 제공

 

 ◇멜로든 코미디든 연기 척척 

특히 ‘초록물고기’에서 막동이가 공중전화를 붙잡고 뇌성마비인 형에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며 오열하는 대목은 청년의 섬세한 감수성과 격정이 뒤섞이며 비극적 페이소스를 자아내는 명장면이다.

‘은행나무 침대’에서 미진했던 연기를 반성하며 온 몸을 내던진 ‘초록물고기’에서의 연기로 한석규는 제35회 대종상, 제13회 청룡영화상을 비롯해 그 해의 남우주연상을 싹쓸이 하다시피 했다. 1999년에는 영화주간지 씨네 21과 손잡고 2010년까지 12회에 걸쳐 영화 시나리오 공모전을 열었는데, 그 이름을 ‘막동이 시나리오 공모전’으로 지을 만큼 ‘초록물고기’가 갖는 의미는 각별한 것이었다.

다시 한 번 강제규 사단에 합류한 ‘쉬리’(1999)로 한석규는 배우 경력의 정점에 도달한다. 한국 상업 영화의 스케일을 갱신한 이 대작은 위험부담이 큰 탓에 제작비 조달에 난항을 겪었는데, 출연이 확정되자마자 23억원의 투자 허가가 떨어질 만큼 한석규의 티켓 파워는 막강한 것이었다.

‘쉬리’ 제작진은 비용 부담을 줄이는 차원에서 배우들의 몸값을 대폭 삭감하는 대신, 흥행 성적에 따라 인센티브를 지불하기로 했다. 한석규는 2,500만원까지 출연료를 깎았지만, ‘쉬리’가 당시 역대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우면서 결과적으로 인센티브 12억원을 받게 된다.

이후 하드고어 스릴러를 표방한 ‘텔 미 썸딩’(1999)을 기점으로 한석규의 전성기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이중간첩’(2002)으로 복귀하기까지 3년의 공백기 동안 한국 영화의 스펙트럼은 다양해졌고, 최민식은 ‘해피 엔드’(1999)와 ‘파이란’(2001), 송강호는 ‘반칙왕’(2000)과 ‘살인의 추억’(2003), 설경구는 ‘박하사탕’(2000)과 ‘공공의 적’(2002)으로 급속히 성장해 주연급 배우의 위상을 공고히 했다. 한석규 홀로 한국 영화를 짊어지던 시절은 마감한 것이다. 한석규가 쌓았던 1990년대의 유산을 발판 삼아, 한국 영화는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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