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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 “성 불평등에 메스” 홍은원, 여성주의 계몽운동 물꼬 트다

입력
2019.09.28 04:4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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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다재다능 2호 여성 영화감독 홍은원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한국일보>는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를 통해 매주 토요일 들려드립니다.

홍은원 감독이 촬영장에서 카메라를 들여다 보고 있다.
홍은원 감독이 촬영장에서 카메라를 들여다 보고 있다.

‘미망인’(1955)의 박남옥 감독이 여성 영화감독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지만, 여성 영화인의 입지를 다져놓은 건 단연 ‘여판사’(1962)의 홍은원(1922~1999) 감독이었다. 배우 말고는 영화판에서 활동하는 여성 인력 자체가 드물었던 시대에 홍은원은 스크립터와 조감독, 시나리오 작가의 단계를 차례차례 밟으며 능력을 입증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고, ‘홀어머니’(1964), ‘오해가 남긴 것’(1966)을 포함한 세 편의 영화를 연출하며 지워지지 않는 발자취를 남겼다. 감독을 그만둔 뒤에도 홍진아 또는 홍설아라는 필명을 사용하며 여러 작품의 각본과 각색에 나섰고, 동아방송의 구성작가로도 활동을 이어간 진취적인 면모의 소유자였다.

 ◇프랑스 영화 즐겼던 ‘영화 소녀’ 

홍 감독은 1922년 9월 24일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유년기와 학창시절을 보냈다. 어머니는 일제강점기의 와중에 함남 함흥 영생고, 광주 수피아여고에서 교사로 재직했는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내용의 강연을 수 차례 하다 일제 순사에게 붙잡혀 요주의 인물로 분류될 정도로 의기 강한 여성이었다고 한다. 인종과 희생을 미덕으로 아는 전통적 여성상을 벗어나 개척자의 길로 들어서는 데는 그런 어머니로부터 받은 영향이 컸다고 한다. 영화와의 인연은 경기여고 재학 시절부터 싹을 틔웠다. 여고생 홍은원은 영화 관람을 금지하는 교칙을 어기면서 몰래 극장을 드나들었고, 멜로드라마와 서부극, 일본 검객물 등 여러 장르의 영화를 골고루 섭렵한 조숙한 영화광이었다.

그러나 홍 감독을 영화의 길로 이끈 건 외화로 수입된 프랑스 영화들이었다. 인상 깊게 보았던 작품으로 장 가방 주연의 ‘망향’(1937), 줄리앙 뒤뒤비에 감독의 ‘무도회의 수첩’(1941)과 마르셀 카르네 감독의 ‘천국의 아이들’(1945), 시장 부인을 중심으로 뭉친 일군의 여성들이 침략군을 몰아낸다는 내용의 시대극 ‘여자만의 도시’(1935) 등을 꼽았는데, 젊은 영화광으로 하여금 영화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일깨워준 영화들이었다. 학교를 졸업한 홍 감독은 마루젠(丸善) 주식회사 서적부에 입사한다. 한동안 독서에 몰두하며 문학적 소양을 키우는 한편, 틈을 내어 영화를 챙겨 보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1년 3개월간의 서점 직원 생활을 마친 홍 감독은 만주국의 반관반민 기업으로 이직하자마자 회사 내의 합창단 신경음악단에 들었는데, 노래에도 재능을 보여 입단 1년 만에 일본인 단원들을 제치고 솔로가수가 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져 오던 시기, 어용 선전노래를 부를 걸 강요받고 가수에 흥미를 잃어가던 홍 감독은 여름휴가로 서울에 내려와 조선영화사에서 음악감독 일을 하던 김준영을 통해 최인규 감독(한국영화 초창기의 베테랑이자 친일 감독)을 소개받는다. 최인규는 ‘태양의 아이들’(1944)의 배역을 맡아주길 권했지만, 연기에 관심이 없었던 홍은원은 짐을 싸들고 도로 만주로 돌아갔다. 그랬던 그가 본격적으로 영화인의 첩경에 들어선 건 해방 이후, 신사참배를 거부한 함재경 목사의 실화를 다룬 ‘죄 없는 죄인’(1948)의 스크립터로 추천받으면서였다. 그러나 영화 현장의 현실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불합리함 투성이였고, 회의감을 품게 된 홍 감독은 한동안 영화계와는 거리를 두게 된다.

홍은원 감독이 영화 촬영장에서 연출 지시를 내리고 있다.
홍은원 감독이 영화 촬영장에서 연출 지시를 내리고 있다.

 ◇스크립터, 조감독 거쳐 감독으로 

5년의 공백기 동안 홍 감독은 양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하의 극작가와 파격적인 연애결혼을 했지만, 그 사이에 딸 하나를 남긴 채 파경을 맞는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노라의 집’(헨리크 입센의 희곡)의 인형”과 다를 바 없는 결혼 생활이었다고 한다. 홍 감독이 영화계로 복귀한 건 당시 촬영기사로 활동하던 한형모 감독의 권유를 받고서였다. 조정호 감독의 다큐멘터리 ‘여군’(1954)에서 조감독 겸 스크립터를 맡으며 자연스럽게 현장에 재적응했고, 연이어 전창근 감독의 ‘불사조의 언덕’(1955), ‘단종애사’(1956), ‘수정탑’(1958) 등에 참여하고, 유두연 감독의 ‘사랑의 십자가’(1959)와 ‘조춘’(1959)에서는 제1 조감독을 맡는 등 베테랑으로 거듭난다. 입봉작 ‘유혹의 강’(1958) 외에는 현장 경험이 일천했던 유두연 감독은 현장에서 많은 부분을 홍 감독에게 의지했는데, 감독 몫의 업무까지 떠맡아야 했기에 고생했지만, 영화판에서 실무능력을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시대극인 관계로 공감할 수 있는 요소가 적은데다, 고증도 자신 있게 해내지 못했다”(세대, 1976년 1월호 ‘여류 영화감독의 비애’)고 아쉬움을 남기긴 했지만 윤봉춘 감독의 신뢰를 얻으며 ‘여인천하’(1962), ‘애정 300년’(1963) 같은 대작에서도 거뜬히 몫을 해냈다.

수십 편의 영화에서 스크립터와 조감독을 맡으면서 유능하다는 평판을 얻은 홍은원은 조금씩 감독에 도전할 준비를 쌓고 있었다. 특유의 문학적 재능을 살려 이강천 감독의 ‘백치 아다다’(1956)와 ‘사랑’(1957)의 주제가를 작사하는가 하면, 틈이 나는 대로 시나리오 습작을 하곤 했는데, 축첩으로 인한 여성의 비극을 다룬 신경균 감독의 ‘유정무정’(1959)이 바로 홍 감독의 시나리오였다. 준비된 감독에게 기회는 곧 찾아왔다. ‘사랑의 십자가’를 함께한 장환 촬영감독이 시나리오 한 권을 들고 와 연출을 제안한 것이다. 한국 최초의 여성판사 황윤석의 죽음, 세칭 ‘황윤석 판사 변사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어 번안화한 이야기로 제목은 ‘여판사’였다. 박남옥 감독에 이은 한국영화사에 두 번째 여성 감독이 데뷔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받아 든 시나리오 초고는 홍 감독의 눈에 탐탁하지 않았다. 언론에 대서특필된 사건을 다뤄 당장에 화제를 끌려는 상업적 의도 외에는, 드라마의 개연성과 문제의식의 깊이가 떨어져 보였던 것이다. “남편보다 우월의식을 가진 직장여성을 그려보겠다고 한다. 여성만이 알고 있는 여성의 심리와 남성의 관찰을 영상화하겠다는 의욕”(동아일보 1962년 7월 1일)을 품었다고 당시 보도됐다. 시나리오의 수정을 조건으로 연출을 수락한 홍 감독은 아내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남편의 열등감,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압력에 시달리면서도 법조인의 책임감을 잊지 않으려는 인텔리 여성의 내적 갈등에 주안점을 두고 각본을 뜯어고쳤다. “오랜 세월을 두고 불행했던 이 나라 여성들의 숙환을 메스로 수술하는 의사 못지않게 다루고 싶었다”는 주인공 허진숙의 대사에서처럼, 홍 감독은 ‘여판사’를 여성주의적 관점이 투영된 계몽영화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홍은원(뒷줄 왼쪽 세번째) 감독이 영화 '오해가 남긴 것'(추정) 촬영장에서 배우, 스태프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홍은원(뒷줄 왼쪽 세번째) 감독이 영화 '오해가 남긴 것'(추정) 촬영장에서 배우, 스태프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출작 3편에 여성주의 관점 투영 

문정숙을 주연으로 기용하고, 가정법원 권순영 판사의 자문을 받으며 서울 원효로 세트장에서 첫 촬영에 들어간 ‘여판사’는 명보극장에서 상영되자마자 “빠른 템포의 카팅(편집)과 요령있는 스토리텔링에 전편을 통해 남성 연출자에게서는 자주 볼 수 없는 데리게이트(섬세)한 디테일이 눈에 띠고”(조선일보 1962년 11월 9일), “여감독다운 섬세한 플롯의 전개에 명확한 커팅은 몇 사람의 중견감독을 조감독으로서 오히려 길러낸 숨은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경향신문, 새영화 ‘여판사’)라는 호평을 받았다. 다음 작품인 ‘홀어머니’는 돈암동 개울가에 로케이션 헌팅을 해둔 낡은 집이 양옥으로 재건축되는 바람에 세트를 급조하는가 하면, 제작비가 끊기는 위기를 한진흥업 한갑진 회장의 지원으로 넘기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숭고한 어머니상을 리얼하게 그렸다”는 평을 들었다. ‘오해가 낳은 것’ 또한 당시의 풍조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는 찬사를 얻었다. 평론가 겸 영화감독 유두연은 “홍은원은 환갑이 지나도 다람쥐처럼 영화계를 누비고 다닐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감독 홍은원의 필모그래피는 이 세 편에서 그치고 만다.

충무로는 침체기에 접어들었고, 여성 연출가가 설 자리는 더더욱 좁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작가정신마저 꺾인 건 아니었다. 시나리오 작가로 돌아간 홍 감독은 이형표 감독의 ‘소문난 여자’, 이성구 감독의 ‘댁의 부인은 어떠십니까?’(1966), 강대진 감독의 ‘흐느끼는 백조’(1968) 등 여러 각본을 다듬었고, 이종기 감독의 ‘이별의 모정’(1969)에 오리지널 각본을 집필했으며, 1975년엔 영화진흥공사(영화진흥위원회 전신) 공모 입선작 ‘피안의 연인’을 쓰고, 1977년에 마지막 시나리오로 ‘호반의 환상곡’을 남기는데, 여성의 심리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섬세한 묘사, 핍박받는 여성의 현실을 다루고자 한 문제의식이 꾸준하게 드러난다. 1999년 1월 5일 홍 감독은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작품에서건, 삶에서건 인습에 굴하지 않은 당당한 여성영화인의 생애였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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