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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 충무로 ‘사극왕’ 재테크 달인, 기부가로도 거듭나다

입력
2019.09.07 07:16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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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충무로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신영균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한국일보>는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를 통해 매주 토요일 들려드립니다.

서울 중구에서 명보제과를 운영하던 시절의 신영균. 연기와 사업으로 동분서주 하면서도 시간나는대로 제과점에 나와 손님을 맞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 중구에서 명보제과를 운영하던 시절의 신영균. 연기와 사업으로 동분서주 하면서도 시간나는대로 제과점에 나와 손님을 맞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신영균(91)이 신상옥 감독을 만나게 된 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에 조연으로 참여하면서였다. 이 영화에서 그는 최은희의 오빠 역으로 출연하는데, 이때 신영균을 눈여겨본 신 감독은 신필름에서 준비하던 차기작에 그를 기용하기로 마음먹는다. 장일호 감독의 ‘의적 일지매’(1961)에 주인공 일지매 역으로 발탁한 데 이어 ‘연산군’(1961)의 주연을 맡긴 것이다. 이 작품에 김승호, 김진규, 최무룡 등 당대의 쟁쟁한 배우들이 줄을 섰지만 신상옥은 이들을 제쳐두고 신영균에게 배역을 제안했다. 연극배우 시절 ‘십대군왕’이라는 연극에서 연산군을 연기한 적이 있던 신영균으로선 “꼭 하고 싶은 역할”이었고 “‘연산군’ 만큼은 (대본을) 완전히 외워서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연기에 임했다. 많은 배우들이 현장에 준비된 프롬프터를 보면서 즉석에서 연기를 하고는, 마치자마자 다른 현장으로 바삐 가던 것과는 사뭇 대비되는 연기자의 진정성이었다.

영화 '대원군'(1968)에서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연기하고 있는 신영균.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대원군'(1968)에서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연기하고 있는 신영균. 한국일보 자료사진

 ◇사극영화 바람 주도 

‘연산군’과 ‘폭군연산’(1962)은 구중궁궐을 재현한 대규모 세트, 시대극다운 호화로운 의상을 장대한 스케일의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담아낸 당대의 블록버스터였다. 두 영화의 진정한 스펙터클은 불을 삼킨 듯, 이글거리는 눈빛과 포효로 광폭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신영균의 열연이었다. 데뷔 당시 “오버연기를 한다”는 지적을 듣곤 했던 신영균의 입장에서 사극이란 과장되고 양식화된 연기가 허용되는 연극무대의 연장선상이었고, 세트 공간을 활개치듯 거침없이 누비며 쾌남의 면모를 발휘할 수 있었다. ‘연산군’에서 본래 온화한 천성을 지녔던 연산은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알게 되면서 충격에 휩싸인다. ‘폭군연산’에서 피 묻은 금삼을 불태운 연산은 복수의 피바람을 일으키며 폭정을 일삼다 인생사의 덧없음을 깨닫게 된다. ‘연산군’으로 신영균은 제1회 대종상 영화제, 제6회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고, 이어서 ‘폭군연산’에선 “전편을 훨씬 뛰어넘는 명연기‘(서울신문 1962년 2월 10일)라는 상찬을 받았다. 그가 확립한 연산군의 캐릭터성은 후대의 사극에도 영감을 주어 ’왕의 남자‘(2005)에까지 이어지며 반복 재생산된다.

두 영화의 성공을 발판으로 신영균은 사극전문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지며 사극영화 붐의 한복판에 선다. 조선 25대 임금 철종의 일대기를 코믹신파극으로 그린 ‘강화도령’, ‘철종과 복녀’(1963)에서 임금이지만 촌티를 벗지 못하는 철종의 순박한 성격을 잘 살려내었고, 한국 홍콩 합작영화 ‘달기’(1964)에선 폭군 주왕 역을 맡아 ‘연산군’ 연작에서의 폭군연기를 다시 선보이며 제4회 대종상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사극 속 신영균의 배역은 보이는 외면과는 달리 심지가 깊고 내적인 갈등이 깊은 다층적인 면모의 인물이 주를 이뤘다. 안현철 감독의 ‘주유천하’(1962)에서는 양녕대군을 맡아 아우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양보하고자 기행을 일삼은 속정 깊은 형의 모습을, 이규웅 감독의 ‘세조대왕’(1970)에선 단종복권 운동을 도모한 사육신과 대립하며 권력에 탐닉하지만 종국에는 불법에 귀의해 지난날의 죄업을 뉘우치는 군주의 입체적인 면모를 그려냈다.

특히 ‘대원군’(1968)은 신영균 연기의 입체성을 잘 보여준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얼핏 자유분방한 한량처럼 보이지만, 정색하며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순간, 겉보기와는 달리 심중에 깊은 뜻을 감춘 노련한 정치가의 면모가 드러난다. 박력과 섬세함을 겸비해 배역에 인간적인 깊이를 부여하는 신영균의 연기내공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대원군’은 신영균의 연기경력에 있어 처음으로 동시녹음을 한 영화이기도 하다. “동시녹음이라는 압박감에 긴장과 초조가 굉장”(한국일보 1968년 4월 21일)했지만, 그럼에도 ‘연산군’ 이래 손꼽을만한 호연을 선보이며 “그 건장한 체구 때문에 흥선의 이미지와 약간의 거리감을 주는 듯 했으나, 박력있는 연기로 이를 극복”(중앙일보 1968년 4월 27일)했다는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개화파 김옥균의 실패를 다룬 ‘삼일천하’(1973)에서도 신영균은 근대화의 신념에 차있는 한편으로, 일본과 손잡지만 경계심을 놓지 않는 구한말 지식인의 복잡다단한 내면세계를 소화해낸다.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 '상록수'(1961)에서 신영균이 최은희와 연기 호흡을 맞추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 '상록수'(1961)에서 신영균이 최은희와 연기 호흡을 맞추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반공ㆍ계몽ㆍ근대화의 상징 

신영균의 배역들은 영화가 개봉한 1960~70년대 한국 사회의 이념적 지형도를 사극의 틀 안에서 은연중에 반영하고 있었다. 나라의 혼란을 바로잡고자 하는 흥선대원군, 조선의 근대국가화를 꿈꾸는 김옥균, 삼국통일의 대업에 자기 몸을 내던지는 ‘화랑도’(1962)의 어진랑은 각각 5.16 군사정변을 개혁으로 정당화하는 한 편 조국근대화와 통일을 기치로 내세웠던 박정희 정권의 이념과 부합하는 것이었다. 사극 이외의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5인의 해병’(1961)의 오덕수 소위, ‘빨간 마후라’(1964)의 나관중 소령은 군사주의적 도덕과 반공의 화신이다. 계몽영화 ‘상록수’(1961)에서 농촌 계몽운동에 앞장서는 열정적인 청년 지도자 동혁, 마을의 가난을 타파하고자 물길을 뚫어 논을 개간하려는 ‘쌀’(1963)의 상이용사 차용은 근대화의 역군에 다름 아니다. 신영균의 존재는 한 사람의 배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당대의 이념을 한 몸으로 웅변한 시대의 얼굴이었다.

 ◇극장 인수하며 사업 뛰어들어 

“당시 영화 촬영에 사용되던 말은 요즘처럼 특수 훈련된 말이 아니라 그냥 競馬(경마)였어요. 그러다 보니 등에 올라타기만 하면 뛰는 바람에 죽을 고비를 한두 번 넘긴 게 아닙니다. 경복궁에서 촬영할 때는 타자마자 문간 쪽으로 쏜살처럼 뛰는 바람에 혼이 난 적도 있어요. 순간적으로 머리를 바짝 숙이지 않았다면 아마 목이 부러져서 반신불수가 되거나 죽었을 거예요.“

특수촬영 기술과 안전장비가 낙후해 몸으로 때워야 했던 시절, 신영균 역시 영화촬영 과정에서 생사의 기로를 수 차례 오갔다. 김승호와 공연한 ‘나그네’(1961) 때는 겨울철 팔당호에 빠지는 장면을 찍는데 몸이 얼어붙어 익사할 뻔했고, ‘5인의 해병’에선 발치로 날아드는 실탄을 피해 뛰어야 했으며, ‘빨간 마후라’ 촬영 때는 사수가 뒤에서 실제 총을 쏴서 전투기 유리가 뚫리는 장면을 찍는가 하면, ‘군번 없는 용사’(1966)에선 군용지프에 석유난로를 실은 채 절벽을 굴러야 했다. 영화현장에서 빈발했던 위험천만한 사고가 배우 신영균으로 하여금 사업가로 변신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만약의 일에 대비해 가족의 생계대책을 마련해야겠다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집 한 채가 200만~300만원이던 시기, 신영균이 받던 출연료는 1편당 70만~100만원 선이었다. 이 출연료를 5년 간 차곡차곡 저축한 돈이 사업의 밑천이 되었다. 1963년 동향의 동업자와 6대4로 투자해 동시상영관 금호극장을 인수한 것이 사업가 신영균의 첫 걸음이었다.

원로배우 신영균씨가 2010년 10월 5일 500억원에 달하는 사재 기부 기자회견을 마친 후 부인과 함께 밝은 표정으로 자리를 함께한 영화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원로배우 신영균씨가 2010년 10월 5일 500억원에 달하는 사재 기부 기자회견을 마친 후 부인과 함께 밝은 표정으로 자리를 함께한 영화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 달 수익만으로 1년치 출연료를 넘어설 만큼 극장 운영은 성공적이었다. 여세를 몰아 신영균은 을지로의 명보제과 빌딩을 600만원에 인수한다. 부인이 손수 제과점을 운영했고 명보제과는 태극당, 뉴욕제과, 풍년제과와 함께 4대 제과점으로 불리며 25년간 성업한다. 제과점에서 나온 수익금을 바탕으로 1977년 8월에는 명보극장을 7억5,000만원에 인수해 극장사업의 규모를 확대하게 된다. 영화 촬영을 위해 오가던 대만에서 볼링장의 사업성을 눈여겨본 신영균은 1972년에는 신즈 볼링장을 열었고, 1973년에는 한주흥산 주식회사를 설립해 부동산 임대업에도 손을 댄다. 한국에 패스트푸드 업체 맥도날드를 정착시킨 주역도 신영균이었다. 1992년 54억원을 투자해 미국 맥도날드와의 합자회사 맥신을 출범시킨 것이다. 연기 내공 못지않은 사업 수완의 눈부신 활공이었다.

김수용 감독의 ‘화조’(1978)를 마지막으로 사실상 영화배우를 은퇴했지만, 신영균의 본령은 사업이 아닌 영화였다. 신상옥 감독의 ‘마적’(1967)을 로케이션 촬영할 때 제주도의 풍광에 반해 노후의 땅으로 점찍었던 신영균은 1999년 6월 5일 호텔 부지로 마련해두었던 땅에 대신 신영영화박물관을 세워 평생의 자료와 소품들을 기증했다. 2010년에는 명보극장과 신영박물관을 영화계의 공유재산으로 기증했고, 2011년에 신영균 예술문화재단을 설립해 재단 운영금을 영화예술인 자녀의 장학금과 창작 지원에 쏟았다. 한국영화계에 길이 남을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사례였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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