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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나훈아!”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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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나훈아!”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가수

입력
2019.07.06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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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는 1966년 '천리길'로 데뷔해 50년 넘게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최근 11년 간의 공백을 깨고 다시 돌아와 팬들과 교감하며 활발한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공연 티켓은 어르신들은 물론 중장년층들에게도 최고의 선물로 통한다.
나훈아는 1966년 '천리길'로 데뷔해 50년 넘게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최근 11년 간의 공백을 깨고 다시 돌아와 팬들과 교감하며 활발한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공연 티켓은 어르신들은 물론 중장년층들에게도 최고의 선물로 통한다.

100여년 전 조선성악연구회는 특이한 수강생 모집 공고를 냈습니다. 중학 이상의 지원자에게는 판소리를 무료로 강습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건 새로운 시대의 이야기와 감성을 담을 그릇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춘향이 신분의 한계에서 느꼈던 절망은 세대를 초월해 이해될 수 있지만 삶의 환경이 바뀌면서 실감이 덜해졌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신분보다는 식민지 백성으로서 ‘조센징’이라는 모멸 찬 말을 들었을 때 더 아픈 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판소리가 주춤하고 있을 때 신민요와 트롯이 출발했습니다. 당시엔 민요가수 겸 트롯가수가 적지 않았습니다. 트롯은 판소리에 담겨 있지 않은 당대의 삶을 새로운 멜로디와 가사로 민초들의 동감을 얻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식민지의 설움은 ‘목포의 눈물’와 ‘나그네 설움’, ‘비 내리는 고모령’으로, 정치에 대한 염증은 ‘물레방아 도는 내력’을 부르며 토해냈고, ‘물레방아 도는 내력’, ‘고향역’ 같은 노래는 타향살이의 고달픔을 달래주었습니다. 문주란의 ‘공항의 이별’은 간호사로 광부로 일하러 떠난 이들을 그리는 노래였습니다.

트롯에 담긴 삶과 정서를 외면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한국일보 50주년 창립 기념공연에서 저는 나훈아를 추천했습니다. 모두 ‘옛날 가수’라며 손사래를 쳤습니다. ‘오래된’ 가수여서가 아니라 그 시절의 ‘뽕짝’이 우리네 삶을 얼마나 절절하게 담고 있는지 미처 깨닫지 못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조용필이 낙점됐습니다. 그도 훌륭한 가수였지만 구미 시골에서 올라온 저로서는 고향을 노래한 나훈아가 어릴 적부터 더없이 친근한 가수였습니다.

하지만 30년 가까이 생활하면서 수많은 뮤지션들을 만나고 그들의 공연을 봤지만, 나훈아처럼 “정말 프로다”라고 절감하고 격찬이 흘러나온 기억은 없습니다.

나훈아를 만나고, 그의 노래를 듣는 건 언제나 마음이 큰 징 하나를 치는 느낌입니다. 내 안에 그토록 깊은 울림과 떨림이 있었던가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프로정신입니다. 그는 공연 시작에서 끝날 때까지 사소한 것 하나도 가벼이 여기지 않고 관객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감흥을 주기 위해 세심하게 배려하고 애를 씁니다. 보통 관객들은 그저 정말 재밌다고 평가하고 말겠지만, 다양한 공연을 기획하고 진행하고 있는 저로서는 그의 공연을 보고 있노라면 한 파트 한 파트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나도 언젠가는 저런 공연기획을 한번 해야지, 하는 의지와 욕구가 용솟음쳤습니다.

지난달 15, 16일 대구엑스코에 열린 공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웅장한 무대 속에서 한 번도 본적도 없는, 물기둥 같은 LED전광판에 ‘Yesterday’ 팝송을 부르는 옛 영상으로 막을 올린 그의 공연은 언제나처럼 뻔한 형식을 벗어나 예상 밖의 진행으로 흥미와 감동을 배가시켰습니다. 대형 LED스크린에 펼쳐진 영상은 마치 이상향의 세계에 들어온 듯한 황홀한 환상에 젖게 했습니다. 그 영상에서 아름답게 지저귀던 앵무새(?)가 실제 날아 나와 관객석을 한 바퀴 자유롭게 비행한 연출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놀람,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이날 나훈아가 등장하면서 부른 노래는 가수 강진이 리메이크해서 크게 히트시킨 ‘땡벌’이었습니다. 무용수 모두를 땡벌로 분장하게 한 것도 모자라 나훈아 자신도 땡벌 의상으로 등장하자, 7000여 관중들은 일제히 격한 박수와 환호를 질러댔습니다.

이후 2시간20여분 동안 이어진 그의 공연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때론 웃기고 때론 웃기면서 매 순간을 감동의 도가니로 만들었습니다.

‘잊으라 했는데. 잊어 달라 했는데. 그런데도 아직 난 너를 잊지 못하네.’

‘영영’. 한가해지는 오후에 한번씩 저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입니다. 잊으라고 하는 것은 이별한 연인만은 아닐 것입니다. 고향, 친구, 어머니, 젊은 날의 기억들. 바쁜 일상이 잊으라고 강요하는 것들이 새삼 마음에 일어납니다. 그의 멜로디와 노래가 아니면 꽁꽁 숨어 있었을 기억들입니다. 살갗과 코끝으로 추억의 느낌과 향기가 살아나는 독특한 체험의 연속이었습니다.

노래만 듣는다면 굳이 콘서트장을 찾아올 필요가 있을까요. 강산이 일곱 번 변하는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깨달은 삶의 진실을 풀어놓았습니다. 이른바, 나훈아의 인생론 혹은 행복론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수컷 동정론’이 펼쳐졌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박장대소하면서 수긍의 환호를 보탰습니다. 가장 절정의 순간, 다시 기타를 집어 들었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세월을 말로 다 할 수 없으니, 대신 노래로 하겠다”는 말과 함께. 여기저기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새어 나올 때까지 가황(歌皇)의 노래가 이어졌습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지난 삶을 노래를 통해 알뜰하게 회상하고 추억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살다 보면 알게 돼, 일러주지 않아도, 너나 나나 모두 다 어리석다는 것을...”

그의 노래에는 언제나 철학이 있습니다만 특히 ‘공(空)’이라는 노래에는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아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깊은 관(觀)이 담겨 있습니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관객들에게 구수한 입담으로 설파한 삶의 메시지는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였습니다. “절대 자식들에게 불려줄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벌어온 돈은 다 쓰고 떠나라”라는 메시지는, 늘 그러하듯이 눈살 찌푸리게 만드는 세태를 아프게 꼬집었습니다.

‘공’과 함께 나훈아의 행복론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노래를 부르다 이야기 하나 풀어놓고, 노래를 부다가 다시 이야기 하나 풀어놓기를 반복하면서 관객의 박수를 끌어냈습니다.

“자식 걱정에, 마누라, 남편 눈치 보다가 세월 다 보내고 후회해본들 소용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건 나의 행복입니다. 여러분 무조건 행복하십시오!”

뒷자리에 앉았던 아주머니 한 분이 탄식을 쏟듯 말합니다.

“나훈아가 내 맘을 알아주네. 누가 나를 저래 알아주겠노.”

이어진 노래는 ‘청춘을 돌려다오’였습니다.

“지금부터 단디 들어소. 지금부터 내가 청춘을 돌려 드릴 테니, 여러분은 인제 절대로 늙으면 안 됩니다. 자, 청춘을 돌려드립니데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그의 멘트에 이어 노래가 흘러나오자, 관객들은 마치 자신의 처지를 노래하는 양, 손뼉을 치면서 환호했습니다. 관객 모두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아니, 청춘을 돌려받은 듯 다 함께 춤추고 노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가황은 연신 “오늘 밤새도록 놀아야된다”면서 열창에 열창을 이어갔습니다.

“문 걸어 잠가라!”

무대에서 객석까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흥이 넘쳤습니다. 거듭된 앵콜을 모두 소화하고 드디어 무대 뒤로 사라진 가황, 사람들은 가슴을 끓인 감동에 쉬이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다들 소녀처럼 홍조가 오른 얼굴로 가황이 전한 감동을 되새김질하면서 ‘겨우’ 공연장 밖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나훈아 공연을 보고 나오는 관객들의 입에서 불평불만이 나오는 법이 없습니다. 어떤 이는 티켓 가격이 100만원이라고 해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사겠다고 했습니다. 한결같은 감탄사는 “역시 나훈아다”였습니다.

나는 나훈아의 공연을 볼 때마다, 그리고 관객들의 이런 반응을 볼 때마다 우리 모두가 각자 위치에서 이렇게 열심히 산다면, 그리고 프로정신을 발휘한다면 대한민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훌륭한 선진국으로 우뚝 설 텐데 하는 생각을 합니다.

최근 나훈아에 가세해 젊은 가수들이 트롯 열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조용히 읊조리던 우리의 삶을 무대 위로 불러냈습니다. 너무 개인적인 것이라 숨기고 싶었던, 초라해서 남에게 보여주기 싫었던 일상들을 당당하게 펼쳐 보였습니다. 굴곡진 곳에서 나직이 따라부르던 삶의 노래가 메인무대로 당당히 컴백한 것입니다. 기성세대의 트롯에 대한 환호는 BTS의 ‘자신의 삶을 사랑하라’는 메시지에 열광하는 아미들의 마음과 무엇이 다를까요.

한국의 가수는 가수이기 이전에 소리꾼입니다. 우리 예능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금자탑을 쌓은 판소리는 다섯 개의 ‘전(傳)’을 노래로 남겼습니다. 일생처럼 긴 이야기를 담은 ‘전’으로 노래하고 공연하는 것은 모든 가수들의 마지막 목표인지도 모릅니다. 나훈아, 김연자처럼 자신의 삶과 노래가 오롯이 담긴 공연을 꿈꾸지 않는 가수가 있을까요.

삶에서 나온 노래는 다시 삶이 되고, 노래와 함께한 삶의 이야기는 곧 ‘전’입니다. 트롯 가사처럼 솔직하면서도 구구하지 않은, 절절하면서도 달관한 듯 술술 넘어가는 시김새로 엮어내야 제맛이 나는 것이 우리네 삶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노래도, 인생도 낡아지고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잘 익어가는 것입니다. 이 구수하고 멋진 인생을 노래하기에 트롯보다 더 적절한 장르가 있을까 싶습니다. 우리의 삶이 곧 노래이고 전이며, 가장 진실한 문화유산입니다. 이참에 트롯과 그 안에 녹아든 우리네 삶이 가장 당당한 문화 컨텐츠이자 가식 없는 역사의 한 부분으로 온전하게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유명상 대구한국일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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