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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희 “내 소설은 빛날 뻔했던, 희미한 별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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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희 “내 소설은 빛날 뻔했던, 희미한 별들의 이야기”

입력
2019.06.28 04:4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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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희 작가는 보통 사람들의 작고 평범한 일상에서 반짝이는 이야기를 발견해낸다. 26일 서울 서교동 창비 사옥에서 그를 만났다. 이한호 기자
윤성희 작가는 보통 사람들의 작고 평범한 일상에서 반짝이는 이야기를 발견해낸다. 26일 서울 서교동 창비 사옥에서 그를 만났다. 이한호 기자

“어딘가 틈이 많은 인물들. 그러나 가늘게 빛이 새어 나오는 문처럼, 문 안쪽의 어둠을 가까스로 밀고 나와, 우리도 미처 몰랐던 마음의 테두리를 보여주고, 어느 때는 어둠을 극장으로 바꿔주기도 하는, 그런 틈을 가진 인물들.”

윤성희 작가의 2011년 황순원문학상 수상 축사에서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을 김애란 작가는 이렇게 묘사했다. ‘틈’이란 표현처럼, 윤성희 세계의 인물은 환한 빛이라거나 컴컴한 암흑 같다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렵다. 대신 틈에서 새어 나오는 빛처럼 희미하게 점멸한다. 그래서 어떤 시점에 인생을 돌이켜보다, ‘나름대로 잘 산 것 같은데 어쩌다 이렇게 됐지?’ 의아해하며 울상 짓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윤 작가의 새 장편소설 ‘상냥한 사람’ 속 인물도 마찬가지다. 주인공 형민은 어린 시절 ‘형구네 고물상’이라는 인기 드라마의 아역배우 ‘진구’ 역할을 맡아 짧은 인기를 누렸다. 38년이 지나 형민은 ‘그 시절, 그 사람들’이라는 추억의 인물을 초대하는 프로에 섭외된다. 어머니 가게의 단골이던 PD의 눈에 들어 진구로 발탁된 날부터 지금까지, 형민은 변명으로 가득 찼던 지난날을 돌이켜본다.

“꼭 아역배우가 아니라도 한때 반짝했다가 평범해진 사람들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껴요.” 26일 서울 서교동 창비 사옥에서 만난 윤 작가는 소설의 주인공을 ‘한때 잘나간 아역배우’로 설정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엄청 실패한 건 아닌데, 살다 보니 실패한 것 같은 인생이 있잖아요. 난 열심히 산 것 같은데 잘 안 풀린 인생. 그래서 결정적으로 어디에서 잘못됐는지 시초를 찾지 못하고, 모두가 기특하다고 머리를 쓰다듬던 진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성인이 되고 마는 거죠. 사람들은 대개 결정적인 판단력이 요구되는 사건이 닥치기 전엔 자신이 나쁜 인간인지 좋은 인간인지 몰라요. 형민에게도 그런 타이밍, 사건이 필요했던 거예요.”

올해로 등단 20년을 맞은 윤 작가는 “점점 더 타인의 삶을 쓰는 행위가 엄중하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이한호 기자
올해로 등단 20년을 맞은 윤 작가는 “점점 더 타인의 삶을 쓰는 행위가 엄중하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이한호 기자

소설은 형민이 진구이던 시절을 회상하다 “우유부단 했던 것을 선량했다고 착각한 것은 아닌지” 깨닫는 것을 기점으로 1, 2부가 나뉜다. 2부에서는 연기활동을 계속하려 했지만 번번이 오디션에서 낙방하고, 공부는 시원찮고, 직장을 잡고 결혼도 하지만 결국엔 곁에 아무도 남지 않은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가 형민 주변 인물들의 삶을 통해 펼쳐진다.

윤성희 소설의 저력은 바로 이 ‘주변 인물들’의 촘촘한 디테일에서 나온다. 형민의 어머니, 형민의 아내, 형민의 딸, 형민이 다니는 회사의 조 과장, 박 대리 등, 수많은 주변인의 사연을 늘어놓으며 결국 형민이 지금에 이르게 된 순간을 차근차근 짚는다.

“소설에서 주인공을 만드는 것은 결국 주인공을 뺀 나머지라는 생각을 해요. 어떤 작가는 주인공의 심리를 잘 다룰 수도, 어떤 작가는 주인공을 큰 사건에 휘말리게 할 수도 있겠죠. 저는 주변 인물의 이야기를 쓰다 보면 결국 주인공에 닿아요.”

미국의 소설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소설이란 도대체, 망할 놈의 인간이 무엇인지에 관한 글”이라고 했다. 윤 작가는 “잘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어느 날 삐끗하고 마는 ‘이 망할 놈의 인간’이 내 이야기의 주인공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런 사람들을 곰곰이 들여다보고 쓰는 것이 좋아요. 굵직한 별자리보단, 구름에 가려 눈에 보일랑 말랑 하는 무수한 별에 더 관심이 가요. 빛날 ‘뻔’ 했던 별들이요.”

올해로 등단 20년. 그는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황순원문학상까지 굵직한 상을 받은 유난히 상복 많은 작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유를 모르겠다”며 한결같이 손사래를 친다. “상을 받을 때마다 생각해요. 이렇게 과대평가 돼서 어떡하지? 내가 한국문학을 너무 소박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 그래도 이유가 있다면 이런 ‘보이지 않는 별’ 같은 사람들에 일관된 관심을 가진 것을 알아줬기 때문일까? 글쎄, 정말로 모르겠네요.”

김애란 작가는 축사에서 “선배 모습이 선배 소설 속 인물들과 닮았다”고도 썼다. 이번 책에는 그 흔한 띠지도 추천사도 없다. 작가가 정중히 사양한 탓이다. 보일랑 말랑 점멸하는 것 같아도 20년 동안 한번도 꺼지지 않은 빛의 비결이다.

상냥한 사람

윤성희 지음

창비 발행ㆍ312쪽ㆍ1만 5,000원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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