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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현관문 닫히는 것까지 봐주세요” 여성들, 신림동 사건 뒤 ‘공포의 귀갓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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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현관문 닫히는 것까지 봐주세요” 여성들, 신림동 사건 뒤 ‘공포의 귀갓길’

입력
2019.06.18 04:40
수정
2019.06.18 10:14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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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한국일보] 지난 12일 오후 11시 여성 안심 귀가 스카우트 대원들이 서울 관악구 난곡동 주민인 한 20대 여성의 귀갓길에 동행하고 있다. 박지윤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지난 12일 오후 11시 여성 안심 귀가 스카우트 대원들이 서울 관악구 난곡동 주민인 한 20대 여성의 귀갓길에 동행하고 있다. 박지윤 기자

“지침상 집 근처까지만 가게 되어 있다고 설명을 해도 제발 건물 안으로 들어와서 현관문 열고 들어가는 것까지 지켜봐 달라고 간청하는 여성이 한둘이 아니예요.”

서울 관악경찰서 미성파출소의 ‘여성 안심귀가 스카우트’ 대원 정연수(57)씨와 박미선(56)씨의 말이다. 너무 간절하게 부탁하는 바람에 결국 건물 안으로 따라 들어가 문이 닫히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와야 했다. 이건 두말할 것 없이 ‘신림동 강간미수 사건’이 던진 충격 때문이다. 폐쇄회로(CC)TV의 생생한 화면은, 피해를 당할 뻔한 여성이 바로 나였을 수 있다는 공포 그 자체였다.

[저작권 한국일보] 지난 12일 서울 관악경찰서 미성파출소에서 여성 안심 귀가 스카우트 대원 정연주(57)씨와 박미선(56)씨를 만났다. 이들은 오후 10시부터 다음날 새벽 1시까지 2인 1조로 여성들의 귀가에 동행하거나 우범지대를 순찰한다. 박지윤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지난 12일 서울 관악경찰서 미성파출소에서 여성 안심 귀가 스카우트 대원 정연주(57)씨와 박미선(56)씨를 만났다. 이들은 오후 10시부터 다음날 새벽 1시까지 2인 1조로 여성들의 귀가에 동행하거나 우범지대를 순찰한다. 박지윤 기자

정씨와 박씨 두 대원이 활동하는 미성파출소의 관할구역은 신림동과 난곡동 일대. 사건이 터진 곳과 가까운 곳인 데다, 원래 위험한 곳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지난 12일 밤 두 대원과 함께 안심귀가 현장을 좇아갔다. 2015년 서울시가 전면 시행에 들어간 안심귀가 스카우트는 여성의 귀갓길 안전을 돕기 위해 평일 밤 10시부터 다음날 새벽 1시(월요일은 자정)까지 순찰과 동행 서비스를 제공한다.

2016년 통계청 조사를 보면, 여성 1인 가구 비율이 20.9%로 서울에서 가장 높은 곳이 관악구다. 기업이 밀집한 서초구, 영등포구에 이웃해 있지만, 다세대 주택 등 상대적으로 싼 집들이 많아서다. 하지만 여건이 좋은 편은 아니다. 신림동과 난곡동 일대만 해도 신대방역 등 인근 지하철로부터 걸어서 30분 이상 걸리는 곳이 흔하다. 지형상 좁고 가파른 언덕길이 많아 어두운 밤이면 무섭다. 박 대원은 “아직 경제력이 부족한 20~30대 여성이 많이 살고, 또 스카우트 서비스를 가장 많이 이용한다”고 말했다.

[저작권 한국일보] 지난 12일 서울 관악구 난곡동 일대를 순찰하고 있는 여성 안심 귀가 스카우트 박미선(56)씨와 정연주(57)씨. 지역 특성상 좁고 어두운 골목이 많다. 박지윤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지난 12일 서울 관악구 난곡동 일대를 순찰하고 있는 여성 안심 귀가 스카우트 박미선(56)씨와 정연주(57)씨. 지역 특성상 좁고 어두운 골목이 많다. 박지윤 기자

순찰 중이던 밤 10시 45분 퇴근길이던 정모(27)씨를 만났다. 정씨는 스카우트 대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한데 길을 걸었다. 보통 서울시의 120다산콜센터로 스카우트 서비스를 신청하지만, 정씨는 자주 이용하다 보니 서로 알아보고 그렇게 함께 가는 경우가 다반사다.

스카우트 서비스를 자주 이용하는 정씨에게도 신림동 사건은 충격이었다. 일단 주변에 사는 성범죄자를 검색해볼 수 있는 ‘성범죄자 알리미앱’을 깔았다. 호루라기에다 호신용 스프레이까지 갖췄다. 혼자 유난 떠는 것 같아 망설였던 걸, 지금은 무조건 하고 본다. 정씨는 “야근이 잦아 택시가 골목 안까지 못 들어가겠다 할 때마다 암담한 기분이었다”며 “안심 스카우트를 비롯, 할 수 있는 건 다 한다”고 말했다.

[저작권 한국일보] 지난 12일 밤 순찰 중이던 여성 안심 귀가 스카우트 대원 정연주(57)씨가 기자에게 서울시 '안심이앱' 사용법을 설명하고 있다. 박지윤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지난 12일 밤 순찰 중이던 여성 안심 귀가 스카우트 대원 정연주(57)씨가 기자에게 서울시 '안심이앱' 사용법을 설명하고 있다. 박지윤 기자

이어 대원들은 김모(33)씨도 만났다. 김씨는 스카우트 대원들과 휴대폰 번호를 서로 교환했을 정도로 단골 이용객이다. 정씨와 달리 김씨는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공포감이 덜한 건 아니다. 그는 “신림동 사건을 보고 언젠가 집을 떠나 독립하리라던 꿈을 완전히 접었다”고 토로했다.

스카우트 대원들은 여성들에게 먼저 다가가 동행 서비스를 제안하기도 했다. 노란색 모자에 조끼까지 갖춰 입고 번쩍대는 경광봉을 휘둘러 대는데도 못 알아보는 이들이 의외로 많았다. 이어폰 때문이었다. 박 대원은 “음악을 너무 크게 들으면 누가 뒤에서 따라오더라도 모를 수 있어 위험하다”며 “이어폰은 한쪽만 쓰고 주변을 살피며 걸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평소 눈에 익혀뒀다가 급할 때는 그 편의점이나 마트에 뛰어들어가는 것도 방법이다.

스카우트 대원들은 만나는 여성마다 ‘안심이 앱’을 적극 홍보했다. 귀가 모니터링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 앱은 작동상태에서 휴대폰을 3번만 흔들면 인근 파출소 등으로 자동적으로 신고를 보낸다. 지난 10일 은평구에선 길거리에서 음란행위를 하던 남성이 이 앱으로 검거되기도 했다. 정 대원은 “우리도 새벽 1시 퇴근 이후 집으로 갈 땐 이 앱을 사용한다”고 말했다.

박 대원은 이 일을 할 때마다 늘 스물아홉 쌍둥이 딸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고질적 인원 부족 문제로 힘에 부칠 때가 많다. 안심 귀가 스카우트 연간 이용실적을 보면 2015년 3만1,547건에서 지난해 34만1,162건으로 10배 이상 늘었다. 하지만 인원은 420명에서 452명으로 고작 30여 명 정도 늘었을 뿐이다. 정 대원은 “인원이 없어 담당 구역이 너무 넓다 보니, 순찰을 돌다가도 호출이 들어오면 먼 길을 오가야 한다”고 말했다. 순찰이 끝난 새벽 1시, 신림동에도 밝은 달은 떠 있었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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