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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 “심심한데 뽀뽀나 할까”… 영화는 잊혀도 그의 대사는 남았다

입력
2019.06.15 04:4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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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미워할 수 없는 악역 배우 허장강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한국일보> 는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들을 통해 매주 토요일 들려드립니다.

허장강(왼쪽)이 영화 ‘인간 사표를 내라’(1971)에서 동료 배우 박노식과 열연하고 있다. 허장강은 액션배우 박노식과 달리 악역을 주로 맡은 성격파 배우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허장강(왼쪽)이 영화 ‘인간 사표를 내라’(1971)에서 동료 배우 박노식과 열연하고 있다. 허장강은 액션배우 박노식과 달리 악역을 주로 맡은 성격파 배우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마담,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할까?" 과거 한국 액션영화를 패러디한 류승완 감독의 ‘다찌마와 리’(2000)에서 인용한 이 대사는 코미디 프로그램 등에서 종종 쓰이며 ‘우심뽀뽀’라는 줄임말로 유행어가 되었다. 이 대사의 시작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코미디언 서영춘이 주연한 ‘살살이 몰랐지’(1966)에서 범인 역을 맡은 허장강(1923∼1975)의 대사가 원조다. 정작 영화는 대중의 기억으로부터 잊혀졌지만, 이 한 줄의 문어체 대사만큼은 희대의 명대사가 되어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고 살아남았다. "이번 일만 잘되면 다이아반지가 문제야?" 같은 유의 낯간지러운 대사를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읊어대는 허장강 특유의 능청스러운 연기 스타일은 한국 영화 전성기를 이야기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약방의 감초와 같다.

영화 '장화홍련전'(1972)의 허장강.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장화홍련전'(1972)의 허장강. 한국일보 자료사진

◇연기에 목숨 건 한 남자

“그 얼굴로 멜로배우를 할 수 있었겠어? 장동휘, 황해처럼 본격 액션배우로 남지도 못했고. 또 김승호나 김진규처럼 정통파 배우로서 자신을 드러내지도 못했다고. 하지만 그 틈에서 허장강은 누구 것도 아닌 제 것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싶어.” ‘만선’(1963)을 같이 작업했던 김수용 감독의 평이다. ‘사기한 미스터 허’(1967)와 같은 단독 주연작은 극히 드물었고 대개는 중심에서 벗어난 비주류 배역을 도맡았지만, 그럼에도 허장강은 쟁쟁한 주연 배우들의 틈새에서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과시한 성격파 명품 조연이었다. ‘꽃상여’(1974)에선 주연인 신성일과 윤정희의 인상을 지워버릴 듯 신들린 연기를 펼쳐 제13회 대종상 남우조연상과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조연상을 차지할 정도였다.

서울의 인문중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틈만 나면 아이들을 불러 모아 신파극 놀음을 하곤 했던” 허장강은 해방을 맞아 배우의 길을 걷고자 극단을 찾았다. 그러나 연기자로서의 출발점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국도극장의 성보가극단에 들어가고자 입단 시험을 치렀지만 떨어졌고, 하나가극단의 연구생으로 간신히 합격했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증권회사에 들어가 직장생활을 하는 것도 잠시. 스스로 극단 백마산을 세우고는 여관집 창고를 무대로 빌려 ‘황토를 찾는 사나이’란 제목의 연극을 공연했으나 아마추어 무명배우의 첫 작품은 누구의 이목도 끌지 못한 채 묻히고 만다.

제대로 된 연기자 경력은 악극을 하던 반도가극단에 들어가서부터였다. “노숙과 기식을 하면서” 독하게 버텨내던 시기, 그는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연극 ‘계월향’에서 기생 계월향을 괴롭히는 왜장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 역을 맡으며 처음으로 재능을 인정받는다. 한국영화의 단골 악역으로 맹활약하게 될 싹이 무대 시절부터 일찌감치 움텄던 셈이다. 잠재성을 눈여겨본 ‘계월향’의 연출가 서항석은 장현(長顯)이라는 본명 대신 ‘성수동 뚝섬의 물이 마를쏘냐, 기나긴 강물처럼 부디 오래오래 살아 대성하라‘는 뜻을 담아 장강(長江)이라는 예명을 지어주었다(경향신문 1975년 9월 22일자 8면). 배우 허장강의 탄생이었다.

영화 '종각'(1958)에서의 허장강.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종각'(1958)에서의 허장강. 한국일보 자료사진

◇관객 환호성까지 이끌어낸 명품 악역

이강천 감독의 ‘아리랑’(1954)은 허장강의 영화배우 데뷔작이었다. 그 무렵 충무로는 악극단 출신 연기자들을 대거 기용하는 추세였다. 주연 영진 역을 맡으며 호평을 얻은 그는 다른 배우를 염두에 두고 있던 이강천 감독을 설득해 다음 작품인 ‘피아골’(1955)의 조연 자리를 따낸다. 휴전 후에도 지리산에서 게릴라 활동을 하던 빨치산의 인간 면면을 다룬 이 군상극에서 허장강은 동료를 겁탈한 죄를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우고 죽이는 만수 역할로 광기 어린 표정연기를 선보이며 깊은 인상을 남긴다. 악역 전문 배우라는 허장강의 정체성은 신파극 ‘눈 나리는 밤’(1958)에 와서 결정적인 것이 된다. 그의 배역은 여주인공을 괴롭히는 아편중독자 전 남편 역이었는데, 전옥이 허장강을 살해하는 극의 클라이맥스에서 영화를 보던 관객들은 통쾌한 나머지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내 팔자에 딴따라해서 이만하면 됐지 뭘 또 바라겠어.” 극 중에선 응징 받고, 밖에서는 욕먹는 악역이었지만 자신의 연기가 관객에게 먹힌다는 사실만으로도 허장강은 기뻐했다. 그 이후 허장강은 ‘육체의 길’(1959)의 깡패나 ‘죄 없는 청춘’(1960)의 악당, ‘인목대비’(1962)의 폭군 광해, ‘김약국의 딸들’(1963)에서 셋째 딸 용란을 학대하는 성불구자 남편 연학을 거쳐 ‘월하의 공동묘지’(1967)의 가짜 의사 태호, ‘팔도사나이’(1969)의 일본 야쿠자 아베, 만주 웨스턴 ‘쇠사슬을 끊어라’(1971)의 조선인 밀정 허달건 등 잇달아 악역을 연기하며 ‘악역하면 허장강’이란 도식을 대중의 뇌리에 각인시킨다.

당대 성격파 배우 독고성과 이예춘은 날이 선 카리스마와 비정함을 무기로 삼았지만, 허장강의 노선은 달랐다. ‘쇠사슬을 끊어라’의 허달건은 동족을 괴롭히는 악한이지만 번번이 여자와 티벳 불상을 얻는데 실패하며 처량한 신세가 되고, ‘감자’(1968ㆍ김동인의 동명 원작 소설을 소설가 김승옥이 연출했다)에서 복녀의 남편은 생계를 아내에게 떠넘긴 채 노는 무능력자 백수이지만 해학적인 구석이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음험하지만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때론 어수룩한 모습과 빈틈을 내보이며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자아내는 인물을 마냥 악인이라고 단죄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허장강의 매력은 일상적인 평범성에 있었다. 악역을 하든 선한 역을 하든 그의 표정과 몸짓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닌 삶의 희로애락, 인간적인 정감이 녹아 들어 있었고, 그런 허장강을 관객들은 친근감을 품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밉지만 밉지 않은 이중성의 악역은 그래서 가능한 것이었다.

방자 역으로 향단 역의 도금봉과 손발을 맞춘 ‘성춘향’(1961), 관상쟁이 박주사 역으로 김승호, 김희갑과 공연한 이형석 감독의 ‘서울의 지붕 밑’(1961)에서 잠시 악역의 굴레를 벗어던진 허장강은 시종일관 유머를 잃지 않는 서글서글함으로 서민 풍속극의 전개에 활력을 더해주기도 했다(안종화 감독의 ‘춘향전’(1958)과 김수용 감독의 ‘춘향’(1968)까지 합해 방자 역만 세 번을 했다.) 건달을 하든, 사기꾼을 하든, 동네 아저씨를 하든, 기자를 하든 허장강은 언제나 허장강이었다. 성공한 배우 인생이었지만 차츰 이미지가 고정되어 역할 선택에 제약을 받는 걸 괴로워했던 그는 일제강점기 종 만드는 장인의 이야기를 그린 ‘종각’(1958)에서 정극 배우로의 연기변신을 시도하고, ‘만선’과 ‘메밀꽃 필 무렵’(1967), ‘영시’(1971), ‘교장선생 상경기’(1973)에 이르러 종래의 이미지로부터 벗어난 소탈한 연기를 선보이게 된다.

영화 '분례기'(1971)에서의 허장강.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분례기'(1971)에서의 허장강.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민적 풍모 배우의 최후

수십 편의 영화를 동시다발적으로 제작하면서 배우의 겹치기 출연, 이른바 ‘가께모찌(掛け持ち)‘가 상식이던 시절이었다. 영화사 제작부가 차량을 대령해 배우를 모셔가는 일이 보통이었는데, 허장강은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본인이 촬영장에 1시간 전 먼저 나타나 대기하는 걸 원칙으로 삼았다. 배우들의 목소리를 성우의 후시녹음으로 대체하는 게 업계의 관습이었지만, 허장강은 일정이 허락하는 한 본인의 역할은 직접 녹음해야 직성이 풀리는 완벽주의자였다. 충무로에서 본인의 목소리로 더빙하는 배우는 그를 제외하면 신영균이나 김승호 말고는 없다시피 했다. 스스로에게는 엄격했지만 주변을 배려하는 자상한 일면도 있었다. 술을 입에 대지 않으면서도 동료들을 위해 집 안에 바를 만들어 초대하는가 하면, 일본에 건너가서 분장용구를 주변사람 몫까지 챙겨다 나눠주었다. 촬영 도중 휴식시간엔 개인기인 곱사춤으로 주변을 웃기며 “이봐, 웃긴 값 500원 내놔”라 너스레를 떨었고, ’분례기‘(1971) 때는 후배인 윤정희의 연기를 손수 지도하기도 했다. 영화 속에선 배신의 아이콘이었지만 현실에서는 정과 의리에 죽고 사는 큰 형님이었던 것이다.

그랬던 그가 1975년 9월 21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2세. 전날 밤샘 촬영을 하고도 쉬지 않고 새마을 돕기 연예인 축구 경기에 달려와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날 서울운동장에 모인 2만명은 연거푸 헛발질을 하며 비틀거리는 허장강의 모습을 팬서비스로 착각하고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죽는 순간까지도 관객 앞에 선 배우의 마지막이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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