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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북한, 5ㆍ18 때 공작원들에 광주 가지 말라는 지령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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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북한, 5ㆍ18 때 공작원들에 광주 가지 말라는 지령 내렸다”

입력
2019.06.24 04:40
수정
2019.06.24 07:21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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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북 대남 공작원 “北, 5ㆍ18 개입 안 했다”] 

 “광주 예측불허, 상황 관리 안 된다”며 1980년 서울 침투 교관 증언 

 공작원ㆍ전투원 양성 정치군사大, 5ㆍ18 대응 실패 복기 후 별동대 100명 양성 

 지만원 등 北 개입 주장은 틀려… 일부 탈북민, 헛소문 듣고 틀린 주장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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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평양시 형제산구역. 정확한 연도는 말할 수 없다. 그 곳에 자리 잡은 북한의 조선노동당 산하 금성정치군사대학(이하 정치군사대학)에서 30대의 한 젊은 교관은 공작원 교육을 받던 학생들에게 또렷하게 말했다. 그 교관은 1980년 대만인 유학생으로 위장해 남한에 침투해 있던 인물이었다. “광주폭동(5ㆍ18민주화운동) 때 내가 서울에 있었는데, 광주에 우리(공작원들)가 모여야 하는지를 (상부에) 물었더니, ‘지금 예측불허다. 너희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몰살이라도 당하면 큰일나기 때문에) 가지 말라’는 답을 들었다”는 것. 북한에서 5ㆍ18민주화운동은 광주폭동, 광주봉기로 불린다. 당시 젊은 학생으로 정치군사대학에서 교육받았던 김정찬(가명)씨는 아직도 그 교관의 말을 명확히 기억하고 있다.

북한 공작원 출신 김정찬(가명)씨가 자신이 교육받았던 북한 금성정치군사대학의 지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진희 기자
북한 공작원 출신 김정찬(가명)씨가 자신이 교육받았던 북한 금성정치군사대학의 지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진희 기자

한국일보는 북한 정치군사대학 출신 탈북민인 김정찬씨에 대한 인터뷰를 통해 ‘5ㆍ18 때 북한이 개입했다’는 일부 극우 세력들의 주장은 완전히 틀린 말이라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일명 ‘130연락소’로 불리는 정치군사대학은 1970,80년대 북한이 국가차원에서 대남 공작원과 특수전투원을 양성했던 곳이며 남한 정세와 사회상에 대해서도 수시로 교육을 시킨다. 현재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으로 통합됐다. 80년대 정치군사대학은 수업과 교재로 북조선이 ‘광주폭동’ 대응에 실패한 이유를 교육했고, 향후 비슷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100명의 별동대원 양성에까지 나섰다. 50대의 김씨는 “탈북민 중에도 5ㆍ18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진상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이라며 “당시 북한의 대남공작 상황은 오직 중앙당 3호청사(대남 공작 담당 부서들) 관계자와 정치군사대학 출신들만이 정확히 말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정치군사대학 출신 탈북민은 국내 7,8명 정도로 알려졌다.

김씨는 2000년대 초반 한국 국민이 됐다. 그는 5ㆍ18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지만원씨의 주장 등이 퍼져가는 현상을 보고는 “저건 이상하다, 말이 안 된다”며 당시 상황을 증언하기로 했고, 믿을 만한 외교소식통의 소개를 통해 한국일보 기자와 만났다.

[저작권 한국일보]그래픽 김경진기자
[저작권 한국일보]그래픽 김경진기자

 ◇5ㆍ18은 북한 입장에서도 예측불허 전개 

김정찬씨의 자세는 친근했지만 눈매는 유난히 날카로웠다. 정확한 나이도, 본명도 말하지 않았다. 신상이 드러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감추는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청소년기인) 고등중학교(중ㆍ고교) 시절에 5ㆍ18을 접했다”고 말했다. 광주폭동, 광주봉기 장면이라고 북한에서 방송이 됐다. 그는 “주로 광주 시민들이 공수부대원을 공격하는 장면 위주였다”고 설명했다. 신군부가 장악한 한국 방송사들이 내보낸 장면들을 재편집한 것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김씨는 “북한에서 5ㆍ18 뉴스를 내보낸 이유는 남조선이 이렇게 불안정하다는 선전 목적이었다”며 “그런데 북한 주민들은 광주 시민들이 손목시계를 차고 있고, 옷도 잘 입고, 큰 건물과 간판 같은 발전상에 더 관심을 가졌다”고 말했다. 일종의 ‘남한에 대한 동경’을 키우는 결과를 몰고 왔다. 또 시민들이 군인에 대항하는 장면 보도도 북한 주민들의 사상 교육에 좋지 않다고 판단돼, 얼마 안 가서 5ㆍ18 뉴스는 북한에서 차단됐다.

그는 5ㆍ18 이후 80년대에 정치군사대학에 입학했다. 공작원 수업 중에는 ‘남조선 정세 및 환경’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김씨는 “수업시간에 5ㆍ18을 분석하고 활용에 왜 실패했는지를 배웠다”고 했다. 김씨가 아직까지 기억하는 내용은 △(북한 공작원들 중에서) 지도자가 없었다 △지리적 위치가 혁명본부(평양)에서 너무 멀었다 △누구도 저리 커질지 예상 못 했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김씨는 “교관들이 명확하게 결론 내 줬다”며 “광주폭동은 예측불허로 전개됐고 (북한이) 준비와 역량이 안 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군사대학이 아니라 인민무력부 산하 인민군이 별도로 남한 정세에 개입했을 가능성은 없었을까. 김씨는 “김정일이 당시 대남 사령관(담당자)으로 무력부의 파괴 활동을 하지 못하게 못 박았다”며 “무력부가 나갔다면 김정일에게 작살났을 것이며 정치군사대학에서 모를 수가 없다”고 말했다. 정치군사대학에서 벌어지던 매일의 사건ㆍ사고조차 김정일에게 직접 보고됐을 정도였다. 북한은 1970년대 중반까지 무력투쟁(전쟁)을 통한 통일노선을 견지했지만, 이후에는 남한 내부를 교란시켜 내부붕괴를 야기하는 전략으로 돌아섰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공작원 양성과 침투에 몰두한 것이다. 김씨와 함께 자리한 외교소식통은 “인민군이 나서면 그것은 전면전이 되기 때문에 인민군이 대남 공작에 나서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북한이 5ㆍ18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는 다른 증거들도 있다. 김씨는 “정치군사대학 동기들은 한 해 120~130명 정도고 많으면 150명가량인데 18, 19세 정도부터 입학했다”며 “그런데 어느 날부터 군대와 대학을 나온 23, 24세 정도의 학생 100명이 우리와 분리된 건물에서 별도로 교육을 받더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들은 키도 최소 170㎝ 이상이었고 정규 학생들과 접촉이 안 돼 학생들 사이에서 그냥 ‘선전대’ ‘특공대’라고 불렸다. 그 학생들은 기수는 낮은데 연령이 높았기 때문에 정규 학생들과 갈등이 있었다. 이에 교관들은 “‘앞으로 광주폭동 같은 사건이 또 일어나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그 결과로 100명의 별동대원 양성이 계획됐다”고 정규 학생들에게 설명해 줬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어렸던 정규학생들과 달리 지식, 외국어, 군 경험을 갖추고 인텔리 공작원으로 양성된다고 들었다. 정규 학생들은 1학년 때 사상교육과 야외 훈련이 각각 50%였다가 이후 야외훈련 60% 정도로 확대됐는데, 이들 100명은 그 반대로 이론 수업이 60% 정도였다고 한다. 김씨는 “당시 학생들끼리 만나면 서로 물어봐서 알게 된 내용”이라고 말했다.

100명의 별동대원들은 이후 별다른 활동 없이 해산됐다고 알려져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김씨는 “만약 5ㆍ18에 북한이 개입했다면, 정치군사대학에서 이처럼 활용 실패 이유를 찾고 향후 계획을 도모하기보다, 5ㆍ18 때의 활동 경험을 전수하고 교육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혹시 남파 공작원 중에서 개인이 광주 현장에서 상황을 관찰하고 보고했을 수는 있지만, 가능성에 대한 추정일 뿐이며 확인된 것은 없다.

정치군사대학 인근에는 ‘915연락소’라는 곳이 있었다. 최첨단 병원이다. 국외 공작활동이나 교육 도중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는 곳으로 각종 공작 정보들이 모인다. 치과 치료를 위해 병원을 이용했던 그는 그곳에서도 북한의 5ㆍ18 개입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에서 체포된 청년들이 계엄군에게 줄줄이 끌려가고 있다. 청년들의 옷에 계엄군이 즉흥적으로 적어놓은 죄목이 보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에서 체포된 청년들이 계엄군에게 줄줄이 끌려가고 있다. 청년들의 옷에 계엄군이 즉흥적으로 적어놓은 죄목이 보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만원은 자기 세뇌… 탈북민들도 모르면서 말해” 

5ㆍ18의 북한군 침투설에 대해 김정찬씨는 되물었다. “북한이 광주를 점령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북한 입장에서는 남한을 소란하게 하는 게 목적이지, 어느 지역을 점령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설명이었다. 김씨는 “광주 사람들 입장에서도 ‘우리가 민주화운동 하는데 왜?’라는 어이없는 반응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전국적인 동시다발적 봉기가 있어서 남한이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면 북한도 개입하는 게 쓸모가 있었겠지만 5ㆍ18은 그게 아니었다. 그는 “대남공작은 남한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게 목적이지 뒤집어엎겠다는 건 아니다”고 했다.

김씨는 더구나 “북한은 완전히 계획에 따라 움직인다. 계획된 것이 아니면 덥석 물지 않는다”며 “사람들이 북한을 너무 모른다”고 했다. 5ㆍ18은 북한이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즉 계획에 들어 있지 않은 사안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는 지만원씨에 대해 “북한을 너무 모르고, 사기꾼이 거짓말을 하면서 스스로 믿게 되듯이, 자기 거짓말에 세뇌되고 자기가 빠진 것 같다”고 했다. 또 “만약 북한 쪽에서 내려온 것이라면 전두환 정권이 가만히 있었겠나”라고 말했다.

김정찬씨는 얼마 전 친분이 있던 탈북자와 전화통화를 했는데 그 사람조차 “5ㆍ18에 북한이 개입한 게 맞다, 그렇게 들었다”고 했다고 한다. 북한 내부에서 돌던 헛소문도 영향이 있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북한 뉴스에서 방송된 5ㆍ18 영상에서 학생들이 활동하는 장면 등을 보고, 북한 내부에서 ‘우리 대남공작원들이다’라는 소문이 돌았다. 근거 없이 나돌던 소문인데 탈북민들 중에서 그때 들었던 소문을 믿고 있다고 설명했다.

5ㆍ18 뉴스나 1989년 임수경씨의 방북 장면은 북한에서 불러일으킨 효과가 한국이 생각하는 ‘빨갱이’와는 차이가 있다고 김씨는 지적했다. 그는 “오히려 한국의 위상을 높인 것이었다”고 했다. 5ㆍ18 뉴스에서 북한은 남한의 발전상을 봤고, 임수경씨의 등장은 그 자유분방함에 놀랐다고 한다. 김씨는 “임수경씨가 하는 행동이나 발언 등이 보여준 자유로움이 북한 사람들에게 자신들과 비교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공작원으로 선발돼 서울사투리, 한자를 배우다 

김정찬씨는 자세히 이야기할 수 없지만 북한 고위직 가정에서 자랐다. 북한 10대들은 자신이 향후 어떤 직업을 가지게 될지 모른다. 부모도 마찬가지이다. 학교에 다닐 때 정기적으로 불러 이런저런 것을 물어보고(사상검증), 신체검사를 하면서 공작원 재목들을 고른다. 그렇게 그는 중앙당 대외정보조사부(이하 조사부)에서 운영하는 정치군사대학에 들어갔다. 김씨는 “몸에 흉터도 있어서는 안 된다, 흉터로 나중에 신원이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치군사대학 입학 전 초대소(일종의 안가)에서 새로운 이름과 고향을 부여받고 완전히 신분을 세탁하는 과정을 거쳤다. 당 산하 통일전선부와 대외연락부도 정치군사대학에 학생을 위탁교육한다. 통전부는 해외공작원을, 연락부는 대남공작원을 양성하는 곳이다. 통전부와 연락부에서 위탁 교육한 학생들은 사실상 공작원들 중에 지도자급이다.

김씨는 “120~130명의 동기들 중에서 누가 (지도자급인) 위탁교육생인지 알려 주지 않아도 교육을 받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고 말했다. 탈락자도 많아서 교육생 중 졸업자는 절반 정도이다. 조사부 소속 학생들은 지도자급 공작원이 무사히 침투하도록 가이드를 하며 유사시 목숨도 내놓을 수 있도록 훈련받는다.

정치군사대학에서는 며칠 늦게 도착한 한국 신문을 공부하고, 교재 외에도 수시로 남한 정세에 대한 자료가 배포된다. 한국에서 발생한 사건들과 자본주의 철학을 배우고, 남조선 사회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이해하도록 한다. 김씨는 “(한꺼번에 많이 주입하기보다) 조금씩 면역시키는 식으로 배우게 한다”고 말했다. 훈련 과정에서 한국 라디오를 듣고, 부여된 임무에 따라 일부 학생들은 자본주의 영화도 본다. 한국에서는 금지됐던 5ㆍ18 관련 외신 비디오도 봤다. 북한에서는 한자를 쓰지 않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당시 한자를 많이 썼기 때문에 한자 공부도 했다. 남한 사투리도 배우는데 서울사투리, 경상도 사투리 등 지역별로 배운다. 공작원 침투 경험을 가진 교관들이 임기응변을 가르쳐 주기도 한다. “갑자기 북한 말투가 튀어나왔을 때, 강원도 쪽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고 둘러대라는 식이다. 그는 아직 북한 억양이 강했다.

정치군사대학은 당시 4년제(이후 6년제로 개편)였으며, 졸업 후 임무에 따라 2~4년간 전문교육을 더 받아야 현장 침투 가능한 요원이 된다. 즉 교육기간은 6~10년에 이르며, 작전이 있어야 투입되기 때문에 대기시간까지 더 길어질 수 있다. 공작원들을 투입할 때는 서로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게 한다. 한 명이 잡혔을 때 ‘동지’까지 위험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의 경험에 따르면 침투공작원으로 양성되는 위탁교육생은 한 해 5,6명이었지만, 실제 한 해 대남 공작원이 몇 명 정도 침투하는지는 알 수 없다. 각지의 초대소에서 1, 2명을 집중 교육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1987년 KAL기 폭파 사건 당시 범인 김현희도 초대소에서 양성됐다. 여성들은 정치군사대학에서 교육하지 않고 초대소에서 교육한다. 위장 방식도 예술 분야까지 포함해 다양하다.

북한이 197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공작원들을 남한에 침투시켜 남한의 내부붕괴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통일전선을 변경 한데 대해, 김씨는 “학생운동 세력, 공부 잘하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접근해서 그들이 북한 장학금을 받는 경우도 많았는데 당사자는 그게 북한 돈이라는 것을 전혀 모른다”고 했다. 그는 현재 정치인 이름 몇 명을 언급했다. 또 “새누리당이라고 예외는 아니고 보수, 진보 가리지 않고 다 있다”고 했다. 아침에 북한에서 서울로 가서 서울의 호텔에서 약속을 잡고 점심을 먹은 뒤 다시 북한으로 복귀한 선배 공작원들의 에피소드는 전설처럼 정치군사대학에서 전해져 내려왔다.

 ◇북한 군대는 구타 없는데, 정치군사대학에는 있었다? 

북한 군대에서는 위계에 의해 상급자가 하급자를 구타하는 문화는 없었다고 한다. 물론 동기끼리 우발적인 싸움은 발생하지만, 위계에 의한 폭행은 없다는 것이다. 만약 고참에게 구타를 당하면 상부에 바로 보고해야 하고, 상부에서 가차없이 가해자를 내친다. 그런데 정치군사대학에서는 선배의 구타가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가 재미있다. 김씨는 “한국 문화를 배우도록 훈련 받는 곳이니까, 한국의 군대문화를 따르기 위해 그리 한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과거 특히 심각했던 한국의 군대 문화를 이해시키기 위해, 정치군사대학에 구타 문화가 도입됐다는 것이다. 교관보다는 1년 선배가 훨씬 무서웠다.

김씨가 설명하는 북한 군대는 우리의 편견과 반대였다. 그는 TV프로그램 ‘진짜 사나이’를 보면서 “역시 군대는 북한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는 “북한의 훈련은 유연하고 합리적”이라며 “무조건 통과라는 것은 없으며, 체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그에 맞게 배려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물론 지금은 어떤지 알 수 없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은 1980년대”라고 전제했다.

그는 수영을 잘 못했다. 남들보다 수영으로 건너야 할 거리를 줄여서 부과 받았다. 강요는 없다. 고소공포증이 있으면 수직밧줄, 수평밧줄 훈련을 할 때 독촉하지 않고 기다려 준다. 그는 “열외도 없다”며 “열외는 열등감을 심어주며 사람의 의욕을 꺾이게 한다”고 말했다. 스스로 부족한 것을 생각하게 하고, 자신이 노력해서 발전하게 만든다고 했다. 김씨는 “총을 쏘더라도 왜 쏴야 하는지 자기가 알아야 하는 게 아닌가”라며 “북한은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조건 강도 높은 훈련과 일률적으로 참는 것이 ‘군인의식’인 것처럼 포장되는 한국 상황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정치군사대학은 학생과 교관이 쓰는 식당이 따로 있었는데, 학생식당의 음식 질이 훨씬 좋았다. 교관들이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고 싶어했을 정도라고 한다.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탈북민들 

그는 인터뷰 내내 “보수도 진보도 북한을 너무 모른다”고 거듭 지적했다. 그는 “최근에 ○○일보에서 장마당의 쌀값이 떨어졌으니 북한의 식량이 부족한 게 아니라는 기사를 썼더라”며 “아예 돈이 없으니까 사려는 사람이 없어서 값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 북한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고 북한의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김정찬씨는 “탈북민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많이 노력해야 한다”고 전제하면서도, 탈북민들이 정치적인 입맛에 따라 이용당하는 현실도 비판했다. 그는 북한에서 부유했던 가정 환경상 어느 강연에서 자신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말했는데, 이후 담당 기관 관계자가 연락해서 “왜 그렇게 말했느냐”고 지적했다고 전했다. 그는 “항상 악을 품고 일했다”고 했다.

김씨는 한국 정부를 믿고 일했는데 약속했던 것들이 정권이 바뀌고 담당자가 바뀌면 뒤집어지고 지켜지지 않은 경험을 많이 했다. 자세히 밝힐 수 없지만, 그 중에는 신변의 위협으로 이어진 사례들도 있었다. 김씨는 “탈북민은 북한에서 살아온 경험 때문에 기본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며 “하지만 한국의 보수 정권이나 보수 세력들에게서 약속이 뒤집히고 배신당하는 경험들을 겪으면서 탈북민들은 현재 많은 혼란을 겪고 있다”고 했다.

그는 5ㆍ18에 북한이 개입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만한 정치군사대학 출신들이 있지만, 아직까지 ‘북한 개입은 없었다’는 진실을 말하는 이가 없었던 이유도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기 쉬운 탈북민들의 불안한 입지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이진희 기자 river@hankookilbo.com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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