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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가까운 성찰의 땅…무궁무진 티베트의 매력

입력
2019.06.0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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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17> 동티베트③ 세더향ㆍ거르마촌ㆍ타궁초원

타궁초원의 무야대사 금탑과 설산, 맑은 하늘이 작은 물웅덩이에 비쳐 그림 같은 풍광을 연출하고 있다.
타궁초원의 무야대사 금탑과 설산, 맑은 하늘이 작은 물웅덩이에 비쳐 그림 같은 풍광을 연출하고 있다.

동티베트에 가면 설산을 눈요기 삼아 달릴 수 있다. 해발 약 4,000m 산등성이 거다량쯔(疙瘩梁子)를 넘어 관망대 앞에 멈춘다. 오후 1시의 햇볕이 아주 강하다. 간혹 구름이 얌전하게 움직이지만 쾌청한 날씨라 시야도 밝다. 평원에 자리잡은 티베트 사원이 유난스레 빛난다. 불타는 듯 눈부신 혜원사(惠远寺)다. 갈래길을 보지 못하고 지나쳤는데 돌아보니 세더향(协德乡) 입구다. 일직선으로 뻗은 도로로 접어들어도 여전히 이글거리고 있다.

세더향으로 가는 길, 햇빛에 반사된 혜원사 지붕이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다.
세더향으로 가는 길, 햇빛에 반사된 혜원사 지붕이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다.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하는 티베트 승려의 모습이 낯설고 이색적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하는 티베트 승려의 모습이 낯설고 이색적이다.

사원 앞까지 2km 직선도로다. 어린 승려 둘이 오토바이를 타고 빠르게 지나간다. 티베트의 거친 질주가 낯설다. 사원의 담장 앞에 멈추면 더욱 예상하지 못한 모습과 만난다. 티베트 불탑인 초르텐으로 둘러싼 장면은 생전 처음 본다. 대충 헤아려도 정문의 오른쪽만 50여개다. 게다가 앞줄은 낮고 뒷줄은 높다. 33만㎡가 넘는 사원이다. 한쪽 면만 해도 거의 600m다.

혜원사는 1729년에 건축된 궁전식 사원으로 7세 달라이라마 깰상갸초(格桑嘉措ㆍསྐལ་བཟང་རྒྱ་མཚོ་)의 피난처다. 청나라 옹정제의 통치 시기였다. 몽골계 중가르 군대가 라싸를 침공하자 청 조정은 1,800km나 떨어진 이곳에 행궁을 지었다. 그 옛날 어마어마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평범하고 한산하다. 안쪽에 위치한 라오덴(老殿)은 포탈라궁에 비하면 아주 소박하다. 노란 담장과 창문, 검붉은 지붕 위에는 초르텐이 반짝인다. 초록 기와를 배경으로 티베트 사원의 상징인 법륜과 사슴 한 쌍도 빛을 뿜고 있다.

초르텐으로 쌓은 혜원사 담장.
초르텐으로 쌓은 혜원사 담장.
7세 달라이라마의 피난 행궁이던 혜원사 라오덴.
7세 달라이라마의 피난 행궁이던 혜원사 라오덴.
혜원사 초르텐에 앉은 까마귀.
혜원사 초르텐에 앉은 까마귀.

다시 정문으로 나왔다. 담장 초르텐 꼭대기에 까마귀가 사뿐히 앉는다. 가까이 가도 본체만체 무시한다. 수천 년간 고원을 터전으로 살아온 티베트 민족은 조장(鳥葬)으로 장례를 치른다. 척박한 자연 환경이 낳은 문화다. 긴 겨울은 매장에 적합하지 않고 화장에 비해 깨끗하다. 하늘과 가까운 땅에 살며 환생을 믿는 그들은 독수리에게 육체는 물론 영혼까지 맡긴다. 티베트 어디에서나 등장하는 까마귀도 깔끔한 뒤처리를 담당한다. 정문 앞에 늘어선 초르텐 너머로 멀리 야라설산이 보인다. 설산만큼 맑은 티베트 초원은 새의 낙원이다. 티베트 까마귀는 자연에서 와서 공허하게 떠나는 삶을 보여준다. 티베트에 오면 자연스레 깊은 성찰이 솟아오른다.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영혼까지 울리는 티베트의 생명이다.

혜원사를 찾아온 세더향, 안내 표지판이 뜻밖이다. 옛 지명인 타이닝(泰宁)의 고성 흔적이 있다. 눈길을 사로잡은 이유는 ‘11세 달라이라마 탄생지’ 안내판 때문이었다. 그를 봉공하는 사원이 있다. ‘자와룽췐(甲洼绒群)’이라 부르는데 ‘달라이라마의 작은 궁전’이란 뜻이다. 1838년 11세 달라이라마 캐둡갸쵸(凯珠嘉措ㆍམཁས་གུབ་རྒྱ་མཚོ་)가 출생한 장소다. 대문은 열렸지만 사원으로 들어가는 작은 문이 잠겼다. 인기척을 듣고 온 승려가 자물쇠를 연다. 따로 입장료는 없지만 참배객을 위해 문을 열어준다.

타이닝의 고성 흔적.
타이닝의 고성 흔적.
11세 달라이라마 출생지 안내판
11세 달라이라마 출생지 안내판
11세 달라이라마 출생지에 세운 사원.
11세 달라이라마 출생지에 세운 사원.

사원 규모는 아담해 10분이면 넉넉하게 둘러본다. 석가모니를 비롯해 보살과 종교개혁가 총카파(宗喀巴ㆍཙོང་ཁ་པ་)가 봉공돼 있다. 졸졸 따라다니던 승려는 손짓하더니 대략 20cm인 돌 하나를 자세히 보라고 한다. 육자진언 ‘옴마니밧메훔(ཨོཾ་མ་ཎི་པ་དྨེ་ཧཱུྃ་)’이라 적힌 돌이다. 캐둡갸초는 4세에 후계자로 인정돼 달라이라마가 됐지만 불과 18세에 원적했다. 사후 옛집을 사원으로 건축할 때 우물에서 발견됐다. 비단으로 가린 신비로운 돌, 일부러 보여준다는 듯 순박하게 웃는다. 사진은 찍지 못하지만 시주라도 좀 하라는 미소다.

임신 중인 어머니는 너무 배가 고파 우물에서 혼절했다. 얼마 후 깨어나니 우물은 향기로운 쑤여우차(酥油茶)로 변했다. 야크 젖을 응고한 버터에 차와 소금을 섞어 만든 음료다. 차마고도를 통해 알려진 비타민 공급원이다. 티베트 사람은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마신다. 어머니는 차를 마시고 정신을 차렸고, 얼마 후 아들을 출산했다는 전설이다. 9세부터 12세 달라이라마는 모두 스무살 전후 돌연 사망했다. 열반과 환생으로 이어지는 달라이라마다. 인간의 수명은 비슷하련만 19세기 70년 동안 4명의 달라이라마가 연이어 단명했다. 사원을 나와 뒤돌아보니 문틈 사이로 11세 달라이라마 불상이 보인다. 마치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눈빛, 순간적으로 카메라를 들었다. 승려는 곧 문을 닫았다.

출생지 사원에 봉공된 11세 달라이라마 불상.
출생지 사원에 봉공된 11세 달라이라마 불상.
혜원사에서 본 야라설산.
혜원사에서 본 야라설산.

티베트는 1271년 원나라를 건국한 몽골족 쿠빌라이가 직접 통치한 이후 늘 속국이었다. 14세기 후기부터 정교합일의 티베트는 총카파가 창시한 겔룩파가 주도했다. 물론 닝마파, 까규파, 까담파 등 서로 교리를 달리 하는 종파가 있다. 16세기에 이르러 겔룩파 지도자 쐬남갸초(索南嘉措ㆍབསོད་ནམས་རྒྱ་མཚོ་)는 칭기즈칸의 후예 알탄 칸으로부터 달라이라마 칭호를 하사받는다. 몽골계는 여전히 명나라 영토 바깥의 실권자였다. 스스로를 3세 달라이라마로 부른 쐬남갸초는 총카파의 제자를 1세, 그의 후계자를 2세로 추증한다. 이후 청나라가 건국되자 속박은 더욱 강해진다. 자치와 독립을 위한 몸부림은 늘 실패로 끝났다. 지금 14세 달라이라마는 1959년 라싸 봉기 후 피신해 인도 다람살라에 거주하고 있다.

세더향을 나와 바메이(八美) 마을을 지난다. 도로는 평탄하고 오가는 차량도 별로 없다. 아담한 산이 이어진다. 이제 동티베트 토양에 익숙해졌는지 높은 해발도 그저 평지 같다. 간혹 지나치는 차창 밖 오색 깃발이나 육자진언만이 여기가 티베트 땅이라고 말할 뿐이다. 우연히 후배 블로그를 보다가 발견한 사원이 부근에 있다. SNS로 위치를 물으니 거르마촌(各日马村)이다. 마을 입구 패방을 보니, 아무리 봐도 모를 티베트 문자와 함께 무야대사(木雅大寺)라 적혀 있다. 큰 사원이 있나 보다. 무야는 무슨 말인지 궁금해진다.

거르마촌 입구의 패방.
거르마촌 입구의 패방.
설산 아래 거르마촌. 입구에 큰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설산 아래 거르마촌. 입구에 큰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거르마촌의 오색 깃발과 육자진언.
거르마촌의 오색 깃발과 육자진언.
무야 티베트 여인의 길게 땋은 머리카락.
무야 티베트 여인의 길게 땋은 머리카락.

초원을 가로질러 마을로 들어간다. 초원과 설산 사이 나지막한 산, 그 아래 포진한 사원과 마을이다. 초입에 건물을 짓느라 감동이 더 오래 이어지지 못해 아쉬울 뿐이다. 봉긋한 야산에 무수히 많은 오색 깃발이 나부낀다. 초르텐보다 더 하얀 설산이 어깨를 걸친 모양이다. 천천히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여인의 뒷모습, 길게 땋은 머리가 허리 아래까지 내려온다. 이 지역 여성은 길게 머리를 기른다. ‘무야 티베트’의 풍습임을 나중에 알게 됐다.

무야 티베트와 자룽 티벤트의 대략 분포.
무야 티베트와 자룽 티벤트의 대략 분포.

단바에서는 ‘자룽 티베트’를 만났다. 넓은 문화 권역을 지닌 티베트다. 막연하게 알던 티베트도 조금 내부로 들어가면 꽤 흥미롭고 탄탄한 역사를 품고 있다. 무야 문화를 이룬 민족이 어디에서 왔는지 여전히 수수께끼지만, 중국 학계에서는 서하(西夏)의 후예로 생각한다. 1038년 강족(羌族) 계열의 당항족이 건국한 나라로 거의 200여년 동안 왕국을 유지했다. 지금의 닝샤에 수도를 세우고 간쑤의 실크로드인 하서주랑까지 장악하고 독자적인 문자를 창제하는 등 강대국이었다. 당시 서하는 중원의 송나라, 서역의 위구르 전신인 회홀, 북방의 거란족 요나라, 서남부의 티베트(토번) 등과 판도를 유지하다 결국 칭기즈칸에 의해 멸국지화를 당해 역사에서 사라졌다. 당항족 일부는 동티베트 일대로 남하해 토착민과 융합해 살아왔다고 추정한다. 캉딩 서쪽, 다오푸 남쪽, 야장 동쪽, 주룽 북쪽에 주로 정착했다.

무야인도 티베트 불교를 신봉하지만 자기만의 자연숭배 관념도 남아 있다. 바로 백석(白石)에 대한 신념이다. 당항족에게 흰색은 선(善)이며 백석은 길상(吉祥)이자 재물이다. 정월 초하루가 되면 하얀 돌을 하나씩 구해 집으로 들어가는 풍습도 있다. 당항족 신화가 있다. 외적이 침공하자 당항족은 긴급하게 피난에 나섰다. 절체절명, 몰살 위기를 맞았는데 천신이 출현해 하늘을 향해 백석 3개를 뿌렸다. 돌은 흩어져 3곳의 설산을 만들어 외적을 저지했다. 신화는 언제나 드라마이자 그럴듯한 현실의 반영이다. 설산을 이정표로 무사히 이주한 덕분이라면 고마운 존재이자 신앙이 되고도 남지 않았을까?

무야대사의 육자진언 마니석.
무야대사의 육자진언 마니석.
각양각색의 마니석이 모여 작품처럼 보인다.
각양각색의 마니석이 모여 작품처럼 보인다.
무야대사의 마니석과 초르텐, 그리고 마니차.
무야대사의 마니석과 초르텐, 그리고 마니차.

무야대사에 가까이 가다 깜짝 놀랬다. 돌 숭배사상이 허언이 아니다. 층층이 쌓여 있다. 그냥 돌이 아니라 옴마니밧메움을 총천연색으로 아로새긴 마니석(玛尼石)이다. 어디서 가져온 돌인지 모르나 판자처럼 넓다. 도화지처럼 얇다. 천편일률적이지 않고 각양각색이라 볼수록 신기할 따름이다. 육자진언은 관음보살이 선물한, 중생을 위한 구원과 수행의 염불이다. ‘우주(옴)에 충만한 지혜(마니)와 자비(밧메)가 모든 존재(움)에게 그대로 구현되리라’는 뜻이다. 생로병사의 중생이 어찌 소중히 다루지 않겠는가? 당항족의 피가 흐르는 무야인의 적나라한 현장을 보는 느낌이다. 그야말로 육자진언의 박물관이다.

여섯 글자는 육도윤회(六道輪廻)를 상징하며 서로 다른 색깔로 은유한다. 보통 하양, 초록, 노랑, 파랑, 빨강, 검정의 규칙을 따른다. 바탕색에 어울린 단색도 많다. 바탕색도 하나가 아니라 둘 이상 현란하다. 하양으로 육자진언을 적고 푸른 산천과 파란 하늘을 가르기도 한다. 사원은 언덕 아래 분지에 세워져 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도 마니석은 쉽게 날아가지 않을 듯싶다. 마니석으로 높은 담장을 세우고 바깥에는 초르텐과 마니차가 사방을 다 채웠다. 마니차를 돌리며 순례하는 일은 티베트 사람의 일상이다.

승려가 무야대사의 부속 전각을 오르고 있다.
승려가 무야대사의 부속 전각을 오르고 있다.
무야대사를 순례하다 쉬고 있는 사람들.
무야대사를 순례하다 쉬고 있는 사람들.
한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무야대사를 순례하고 있다.
한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무야대사를 순례하고 있다.

양손에 봉지를 든 승려가 계단을 오르고 있다. 강렬한 오후의 햇볕이 전각 위로 쏟아진다. 도금된 지붕이 환하게 반사한다. 사원을 따라 순례하는 사람이 많다. 돌다가 지쳐 앉아 쉬는 사람도 있다. 지팡이를 살살 누르며 할머니는 한없이 느릿느릿 걷는다. 육자진언을 하나씩, 수없이 많은 마니석을 다 헤아리듯 중얼거리는지도 모른다. 세상을 향한 염원은 남녀노소 인간이라면 누구나 똑같으리라. 소박한 꿈이거나 원대한 포부이거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거르마촌을 빠져나와 큰길로 접어들면 곧바로 타궁초원(塔公草原)이 펼쳐진다. 타궁은 ‘보살이 좋아하는 지방’이란 말이다. 야라설산이 한눈에 조망되는 초원에 긴 성벽을 쌓았다. 이중으로 백탑(초르텐)을 세우고 안에는 금탑이 빛나고 있다. 무야금탑이라 부른다. 3층 높이의 탑을 만들기 위해 거의 100kg에 달하는 황금을 사용했다. 1997년에 죽경사 활불이 기부해 건축했다. 서북쪽 약 400km 떨어진 죽경사는 닝마파 6대 사원이다. 설산과 어울리는 금탑이 마치 천 년 전부터 있었던 듯 타궁초원이야말로 제자리이지 싶다. 이미 동티베트의 풍광에 감동한 사람이라도 발길을 쉽게 떼지 못할 만큼 아름답다.

설산도 빛나고 금탑도 빛나고….
설산도 빛나고 금탑도 빛나고….
설산과 금탑이 조화로운 타궁초원.
설산과 금탑이 조화로운 타궁초원.

구름과 설산, 금탑과 백탑까지 화면에 들어온다. 언제 내린 비인지 모르나 동그란 물웅덩이에 비친 금탑을 놓칠 수 없다.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말도 조연으로 제법 어울린다. 황금도 만년설도 모두 빛나니 누가 더 멋지다고 손을 들어주기 어렵다. 해가 뜨거나 노을이 지면 환상의 극치라고 한다. 웅덩이 앞에 가만히 앉았다. 바닥에서 보니 1m 남짓한 수면이 엄청나게 넓어 보인다. 설산도 금탑도 멋진 반영의 주인공이다. 금탑이 없더라면, 설산이 아니라면, 초라한 웅덩이를 그냥 지나쳤다면, 물이 고이지 않았다면 볼 수 없었던 ‘나만의 발견’이다.

※티베트어의 한글 표기는 제각각이라,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참고하고 동국대학교 티벳장경연구소가 발행한 한글 표기안(2010)을 따랐음을 알립니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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