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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시선, 워코노미] ‘거인’ 러시아 쓰러뜨리고 ‘빚더미’에 앉은 일본

입력
2019.05.04 10:0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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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러일전쟁 

※ 태평양전쟁에서 경제력이 5배 큰 미국과 대적한 일본의 패전은 당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하지만 미국과 베트남 전쟁처럼 경제력 비교가 의미를 잃는 전쟁도 분명히 있죠. 경제 그 이상을 통섭하며 인류사의 주요 전쟁을 살피려 합니다. 공학, 수학, 경영학을 깊이 공부했고 40년 넘게 전쟁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온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러시아 극동함대 주둔지인 중국 뤼순항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대포 시험발사를 하는 모습. 홍사광 한국사회문화연구원 이사장이 2003년 일본군 참전 장성의 후손에게 입수한 사진이다. 연합뉴스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러시아 극동함대 주둔지인 중국 뤼순항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대포 시험발사를 하는 모습. 홍사광 한국사회문화연구원 이사장이 2003년 일본군 참전 장성의 후손에게 입수한 사진이다. 연합뉴스

1904년 2월8일 밤 10시30분, 일본 연합함대의 구축함 10척이 러시아 극동함대의 모항 뤼순을 급습했다. 어둠을 이용한 어뢰공격에 능했던 연합함대의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이로 인해 극동함대의 전함 2척과 방호순양함 1척이 피해를 입었다. 극동함대의 주력을 뤼순에 가두는데 성공한 일본군은 다음날인 9일 제물포해전에서 극동함대의 분견대 2척을 자폭시키고 인천에 상륙했다. 한국과 만주를 두고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일으킨 러일전쟁의 시작이었다.

 ◇경제력 3배, 군사력 6배의 벅찬 상대 

1903년 내내 러시아와 일본은 협상을 벌였다. 러시아를 대하는 일본의 심경은 복잡했다. 1895년 청일전쟁을 이긴 일본이 랴오둥반도를 뺏자마자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 3개국이 개입해 원상회복시켰다. 나아가 러시아는 랴오둥의 항구도시 뤼순을 자신의 극동함대 모항으로 삼았다. 겨울에도 쓸 수 있는 태평양의 군항을 그토록 원했던 러시아의 소원이 저절로 이뤄진 격이었다. 이전까지 모항으로 쓰던 블라디보스토크는 완전한 부동항이 아니었다.

의화단의 난을 핑계로 만주에 군대를 파병했던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만주만으로는 양이 차지 않았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황인의 진격을 막을 백인의 구세주”라며 니콜라이 2세를 치켜 세웠다. 일본은 “만주는 러시아가, 한국은 일본이 나눠 갖자”고 러시아에게 제안했다. 러시아는 “만주는 전적으로 우리 것이고, 한국에 대한 일본의 경제적 권리는 인정하지만 그 이상의 정치적 권리는 인정 못한다”고 선을 그었다. 나아가 평양과 원산을 잇는 북위 39도 이상의 한반도는 군사적 중립지대로 두자고 주장했다. 건설 중이던 시베리아철도가 완공되면 동아시아 전체에 대한 군사적 지배가 가능하다는 판단이었다.

러시아는 일본이 상대하기에 여러모로 벅찬 상대였다. 전쟁 당시 일본의 인구 약 4,600만 명은 핀란드와 폴란드를 점령 중인 러시아의 1억4,600만 명의 30% 선이었다. 경제력이라는 면으로도 둘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한 나라의 경제규모를 나타내는 지표로 흔히 사용되는 국내총생산은 1934년 사이먼 쿠즈네츠가 제안한 개념으로 러일전쟁 당시에는 공식 데이터가 없었다. 최선의 추정치를 구해보면 당시의 영국 파운드 스털링 가치 기준으로 일본은 약 7억 파운드, 러시아는 약 21억 파운드였다. 이 또한 일본은 러시아의 30% 수준이었다.

두 나라의 군사력 격차는 당연했다. 약 110만 명의 정규 육군을 가진 러시아는 당시 세계 최대 육군 보유국이었다. 일본 육군은 정규군 18만 명에 예비군 85만 명을 더해야 러시아군에 근접했다. 물론 러시아는 맘만 먹으면 예비군 동원을 통해 육군 병력을 380만 명까지 늘릴 수 있었다. 해군력 차이도 확연했다. 전함 수에서 일본은 7척인 반면, 발트해, 흑해, 극동의 3개 함대를 보유한 러시아는 22척을 가졌다.

 ◇유일한 활로는 속전속결 

군사적 관점에서 일본에게 유리한 점은 단 하나였다. 바로 지리였다. 광대한 영토를 가진 러시아 입장에서 동아시아는 결국 변방이었다. 러시아 육군의 주력은 유럽에 위치했고 극동에 위치한 부대는 14만 명 수준에 그쳤다. 적어도 초전에는 병력상 우위를 일본군이 누릴 수 있었다. 해군도 일본 연합함대와 러시아 극동함대만 비교하면 대등했다. 보스포러스해협은 국제법상 군사적 항행이 금지돼 흑해함대는 합류가 불가능했고 발트해함대가 극동함대와 힘을 합치려면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거치는 고된 항해를 해야 했다.

물론 이는 시간이 가면 사라질 한시적 우위였다. 시베리아철도가 완공되면 유럽의 러시아군은 신속하게 만주로 쏟아져 들어올 수 있었다. 발트해함대도 수개월 걸려 오지 말란 법이 없었다. 실제로 1904년 9월 니콜라이 2세는 발트해함대의 동아시아 이동을 명령했다. 전함 8척과 구형전함 6척, 그리고 순양함 십수 척을 보유한 발트해함대는 명실상부한 러시아 해군의 에이스였다. 극동함대의 잔존 세력과 힘을 합치면 수적으로 연합함대를 능가했다.

일본의 결정은 ‘그렇게 되기 전에 전쟁 목표를 달성하자’였다. 그러려면 가진 힘을 한번에 쏟아 부을 필요가 있었다. 병력의 집중은 당연했다. 별개로 존재하던 여러 함대를 합쳐 연합함대를 구성했다. 또 러시아군 5만 명이 지키는 뤼순을 점령하기 위해 병력을 비인도적으로 갈아 넣었다. 공격에 투입된 일본 3군 소속 15만 명 중 최소 6만 명, 최대 11만 명의 전사자가 발생했고 3만 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일명 ‘반자이 돌격’의 원조가 바로 뤼순전투였다.

러일전쟁 개전 직후인 1904년 4월 프랑스 신문 ‘르 프티 파리지앵’에 게재된 만평 ‘거인과 난쟁이의 전쟁’. 러일전쟁은 한반도에 대한 주도권을 둘러싸고 ‘난쟁이’ 일본이 ‘거인’ 러시아에게 도전한 무모한 전쟁이라는 서구의 시각이 반영돼 있다.
러일전쟁 개전 직후인 1904년 4월 프랑스 신문 ‘르 프티 파리지앵’에 게재된 만평 ‘거인과 난쟁이의 전쟁’. 러일전쟁은 한반도에 대한 주도권을 둘러싸고 ‘난쟁이’ 일본이 ‘거인’ 러시아에게 도전한 무모한 전쟁이라는 서구의 시각이 반영돼 있다.

 ◇GDP의 16%를 전장에 쏟아붓다 

또 다른 변수는 바로 돈이었다. 이미 얘기했듯이 일본의 경제력은 러시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단기간에 돈을 최대한 끌어 모아 승부를 내는 게 일본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전쟁비용은 전쟁에 이긴 후 배상금을 받으면 된다는 판단이었다. 실제로 일본은 청일전쟁 때 약 2억3,000만 엔을 쓰고 배상금으로 3억6,000만 엔을 받았다. 청 연간 예산의 2.5배에 해당하는 돈을 받아낸 것이다.

개전 시점에 러시아는 약 1억700만 파운드의 금을 보유했다. 여기에 더해 프랑스와 독일로부터 5,500만 파운드를 빌렸다. 러시아 국내에서 빌린 돈은 900만 파운드 정도였다. 즉 러시아의 최대 전비는 1억7,100만 파운드였다.

반면 일본의 1,200만 파운드 금 보유고는 러시아의 약 10% 수준에 불과했다. 연간 세금수입은 1,900만 파운드였다. 일본의 전쟁 지속가능 여부는 전적으로 얼마나 많은 빚을 국내외에서 얻을 수 있는가에 달렸다. 전쟁 기간 중 엔화 국채는 총 7,200만 파운드가량이 발행됐다. 이보다 더 큰 빚은 영국과 미국에게 판 8,200만 파운드의 외화 국채였다. 실제 일본이 전비로 투입한 1억8,800만 파운드 가운데 빚이 83% 이상이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위해 가진 곳간을 모두 털고도 모자라 세수 8년치의 빚을 져야 했다.

일본이 들인 군사비가 얼마나 무리한 출혈인지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국내총생산에 대한 군사비의 비율을 계산할 수 있다. 약 19개월의 전쟁기간을 감안할 때 연간 군사비의 국내총생산에 대한 비율은 러시아가 5.2%, 일본이 16.6%로 일본이 세 배 이상 높았다. 30% 수준의 경제력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전쟁비용을 러시아보다 조금 더 썼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통상적인 경우와 비교하자면 2015년 기준 전세계 연간 군사비 대 국내총생산 비율은 2.2%였다. 평화 상태인 대부분의 나라에서 해당 비율은 1%에서 2% 초반 사이였다. 2015년 군사비 지출 상위 15개국 중 9개국이 이 범위에 들었다. 이 비율이 3%보다 크면 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떤 형태로든 군사적 대치나 무력 행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러일전쟁 때의 일본과 같은 수준의 군사비 지출을 지속할 수 있는 국가는 없다고 보는 게 무방하다.

1905년 9월 미국의 중재로 미국 뉴햄프셔주의 군항 포츠머스에서 열린 강화회의에 참석한 러시아와 일본의 대표단. 승전국 일본은 막대한 전비 지출을 만회할 배상금을 받지 못한 채 뤼순과 사할린을 얻는데 만족해야 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05년 9월 미국의 중재로 미국 뉴햄프셔주의 군항 포츠머스에서 열린 강화회의에 참석한 러시아와 일본의 대표단. 승전국 일본은 막대한 전비 지출을 만회할 배상금을 받지 못한 채 뤼순과 사할린을 얻는데 만족해야 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또 다른 대국 미국에 원한 품다 

1905년 5월27일 쓰시마해전에서 연합함대가 항해에 지친 발트해함대를 격멸하자 일본과 러시아 모두 종전을 희망했다.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경제력이 없었고 러시아는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정치력이 없었다. 특히 러시아는 1905년 1월22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시위대를 향해 군대가 발포한 ‘피의 일요일’ 이후 전국에서 혁명이 진행 중이었다. 6월27일에는 흑해함대 소속 전함 포템킨에서 썩은 고기 수프를 강제로 먹으라고 명령하던 장교들을 수병들이 죽이는 일까지 벌어졌다.

전쟁에 승리했다고 생각한 일본은 가장 우호적이라 판단한 미국에게 종전협정 중재를 맡겼다. 6월12일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양국의 강화를 주재하겠다고 발표했다. 일본은 1억2,300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받기를 원했다. 전비 전부는 아니어도 대부분의 빚을 갚을 수 있는 돈이었다. 루즈벨트는 제대로 일본의 뒤통수를 쳤다. 배상금을 한 푼도 못 주겠다는 러시아의 편을 들었다. 결국 일본은 배상금 없이 뤼순과 사할린군도 남쪽을 갖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이 때 생긴 미국에 대한 일본의 악감정은 1941년 태평양전쟁 개전까지 두고두고 이어졌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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