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삶과 문화] 영화 ‘바이스’와 코끼리 생각하지 않기

입력
2019.04.30 04:40
31면
0 0
영화 '바이스'의 한 장면. 콘텐츠판다 제공
영화 '바이스'의 한 장면. 콘텐츠판다 제공

영화 ‘바이스(Vice)’를 보았다. 예일대에서 퇴학당한 깡촌 출신 ‘찌질이’가 미국 역사상 최연소 백악관 비서실장을 거쳐, 무소불위 부통령이 되는 딕 체니의 전기를 그린 정치코미디다. 딕 체니는 권좌에 오르자 중동 전쟁, 관타나모 고문, 개인 정보 훼손 등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 부통령과 악덕을 모두 의미하는 영화 타이틀 ‘VICE’는 그래서 절묘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악행들이 ‘여론을 등에 업고’ 일어났다는 것이다.

딕 체니는 유능한 마케팅 전문가를 고용한다. 소비자들이 주요 이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표현해야 그들로부터 원하는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다. 부유층의 감세를 정당화하고자 ‘죽음의 세금(death tax)’이라는 표현을 만들어낸다. 지구온난화에 찬성하는 여론을 무마하고자 ‘기후 변화’라고 대신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틀, 프레임을 어떻게 제시하느냐에 따라 여론이 달라진다는 것을 딕 체니는 제대로 알고 활용한 것이다. 보수는 늘 프레임 전쟁에서 진보를 이긴다는 조지 레이코프의 책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인지언어학의 세계적 석학인 조지 레이코프는 그의 책에서 버클리대 학생들에게 “코끼리 생각하지 말기” 과제를 내주었지만, 성공적으로 마친 학생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말한다. 코끼리라는 단어를 말하는 순간 ‘생각하지 말라’는 과제와는 상관없이 모두 코끼리를 연상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틀, 프레임이 형성된 것이다. 프레임은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이나 계획, 행동 방식, 우리가 행동한 결과의 좋고 나쁨을 결정한다. 프레임을 이해하면 왜 미국 빈민층이 “미국이 우선”을 외친 최상층 트럼프에게 투표했는지, 이러한 현상이 선거에서 종종 나타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이 현재 처한 사회적 위치에 관계없이 자신의 가치관을 부각하는 정치인에게 표를 던지는 것이다.

프레임 전쟁은 정치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회 이슈도 언론에서 ‘프레임’된다. 2015년 우리 정부가 담배 가격을 인상했을 때 언론에서는 담배 가격을 올리면 흡연율이 낮아진다는 보건 프레임과 담배세가 9억원짜리 아파트 재산세와 맞먹는다는 증세 프레임이 격돌했다. 실제 연구 결과 증세로 프레임된 기사를 읽은 사람들은 보건으로 프레임된 기사를 읽은 사람들에 비해 담배 가격 인상 정책을 덜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이슈라도 어떻게 제시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인식과 의사 결정은 달라진다는 뜻이다.

최근에도 식약처가 젊은 엄마들 사이에 인기 있는 수입 세척제에서 메틸클로로이소티아졸리논(CMIT)과 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이라는 살균 보존제를 극소량 발견해 회수 조치한 일이 있었다. 언론에서는 이 내용을 “가습기 살균제 성분 아이 젖병 세척제에서 발견”으로 보도했다. 가습기 살균제 사태로 인한 충격과 아픔이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엄마들의 불안과 분노는 컸다. CMIT/MIT가 가습기 살균제 성분인 것은 맞다. 그러나 같은 성분이라도 가습기를 통해 들이마시는 것과 세척제에 포함되어 씻겨 내려가는 것의 차이를 설명해 주는 언론은 드물었다. 세척제에 포함된 살균 보존제는 가습기 살균제에 비해 500분의 1 정도의 극소량이라는 점을 언급하는 언론도 적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세척제 성분으로 살균 보존제를 소량 허용한다는 사실은 오히려 국내에 수입된 다른 세척제에도 가습기 살균제 성분이 발견될 수 있다는 보도로 둔갑돼 불안을 증폭시켰다. 소비자는 정확한 정보와 더불어 다양한 시각을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으려면 애써 잊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원숭이, 사자 등 다양한 동물을 떠올리면 되듯이 말이다.

백혜진 식품의약품안전처 소비자위해예방국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