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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동해시대 경북] 경북항만 100년… 일본인 주도 항만건설 뒤엔 조선인 피와 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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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동해시대 경북] 경북항만 100년… 일본인 주도 항만건설 뒤엔 조선인 피와 땀

입력
2019.05.15 04:40
수정
2019.05.1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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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포항 등 3곳 내년 100주년 항만건설 日人 흔적은 관광지로

감포항 왼편 송대말 등대 아래 일본인 재벌 오다 도모기지가 자비로 조성한 네모난 인공수족관. 각종 어패류와 어류 40여종을 관상용으로 풀어두고 입장료를 받았다고 한다. 경주시 제공
감포항 왼편 송대말 등대 아래 일본인 재벌 오다 도모기지가 자비로 조성한 네모난 인공수족관. 각종 어패류와 어류 40여종을 관상용으로 풀어두고 입장료를 받았다고 한다. 경주시 제공
일본 역사학자 도리이 류우조가 1917년에 촬영한 울릉도 도동항 모습. 일제는 개항 후 1878년 첫 동해 측량에 나섰고, 1880년에 울릉도를 처음 측량했다. 1883년 우리 농민 54명이 도동항을 통해 울릉도에 이주, 지난날 우산국의 유인도 시대를 이어나가게 됐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울릉도독도해양연구기지 제공
일본 역사학자 도리이 류우조가 1917년에 촬영한 울릉도 도동항 모습. 일제는 개항 후 1878년 첫 동해 측량에 나섰고, 1880년에 울릉도를 처음 측량했다. 1883년 우리 농민 54명이 도동항을 통해 울릉도에 이주, 지난날 우산국의 유인도 시대를 이어나가게 됐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울릉도독도해양연구기지 제공
2016년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울릉도독도해양연구기지가 100여 년 전 도리이가 찍었던 비슷한 위치에서 촬영한 울릉도 도동항 모습.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활기찬 도동항의 모습은 과거의 아픔을 무색하게 한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울릉도독도해양연구기지 제공
2016년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울릉도독도해양연구기지가 100여 년 전 도리이가 찍었던 비슷한 위치에서 촬영한 울릉도 도동항 모습.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활기찬 도동항의 모습은 과거의 아픔을 무색하게 한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울릉도독도해양연구기지 제공
1920년대 감포 앞바다에서는 정어리가 셀 수 없이 잡혔다고 한다. 생물로 처분하지 못한 우리 어자원 정어리를 통조림으로 만들어 일본으로 수출한 장본인이 감포 항만건설에 두 팔 벗고 나섰던 경주 갑부 다쯔노였다. 아이러니한 역사는 상념에 젖게 한다. 경주시 제공
1920년대 감포 앞바다에서는 정어리가 셀 수 없이 잡혔다고 한다. 생물로 처분하지 못한 우리 어자원 정어리를 통조림으로 만들어 일본으로 수출한 장본인이 감포 항만건설에 두 팔 벗고 나섰던 경주 갑부 다쯔노였다. 아이러니한 역사는 상념에 젖게 한다. 경주시 제공
태수바위 아래 자리한 ‘산신’이라고 음각된 비석은 100년 전 경주 감포항 방파제 공사 때 죽어나간 조선인의 넋을 달래기 위해 일제가 세운 것이다. 경주시 제공
태수바위 아래 자리한 ‘산신’이라고 음각된 비석은 100년 전 경주 감포항 방파제 공사 때 죽어나간 조선인의 넋을 달래기 위해 일제가 세운 것이다. 경주시 제공
경북 포항 구룡포읍에 있는 ‘구룡포근대역사관’ 전경. 이 건물은 1920년대 구룡포 항만건설 주역 중 한 사람인 하시모토 젠기치가 살던 집을 리모델링한 것이다. 구룡포읍행정복지센터 제공
경북 포항 구룡포읍에 있는 ‘구룡포근대역사관’ 전경. 이 건물은 1920년대 구룡포 항만건설 주역 중 한 사람인 하시모토 젠기치가 살던 집을 리모델링한 것이다. 구룡포읍행정복지센터 제공
구룡포공원에 자리한 1920년대 구룡포 항만건설의 또 다른 주역 도가와 야스브로의 송덕비. 이 비석은 한 맺힌 우리 역사를 증명하듯 해체와 보전 갈등으로 시멘트 발림이란 수난을 당한 채로 여전히 건재하다. 구룡포읍행정복지센터 제공
구룡포공원에 자리한 1920년대 구룡포 항만건설의 또 다른 주역 도가와 야스브로의 송덕비. 이 비석은 한 맺힌 우리 역사를 증명하듯 해체와 보전 갈등으로 시멘트 발림이란 수난을 당한 채로 여전히 건재하다. 구룡포읍행정복지센터 제공

이 이야기는 우리가 잊고 있는 ‘그날의 사건’으로 시작하는 게 좋겠다.

사건 하나. 1896년 3월13일 아침, 경북 울진 죽변항에서 집단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 어민 15명이 살해당했다. 가해자는 창, 곤봉으로 무장한 울진 어부들이었다. 무차별 살인이었다. 산 자들은 혼비백산해 바다로 뛰어들어 정박 중인 배에 올라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왕비 살해에, 단발령 시행에 민심이 극도로 악화된 결과였다. 이 사건의 처리는 장장 9년이나 걸렸다. 고종이 내탕금 18만 3,750원을 일본에 준 뒤에야 종결됐다.

사건 둘. 1905년 5월29일 오전 6시46분, 쓰시마 해전에서 끝까지 분투하던 러시아 순양함 돈스코이호는 쫓기고 쫓겨 울릉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러일전쟁은 그렇게 끝났다. 일본의 승리였다. 엄밀히 말하면 미국의 중재에 따른 판정승이었다. 하지만 전쟁에서 판정승은 모든 것을 갖는 걸 의미했기에 KO승과 진배없었다. 일본은 이 전쟁의 승리로 조선에 대한 미국, 영국, 러시아, 청나라의 간섭과 항의를 일거에 잠재웠다. 우리 역사는 돈스코이호와 함께 울릉도 앞바다에 가라앉고 있었다.

1896년의 죽변항 살인 사건은 아직 우리의 주권이 죽변항의 팔팔 뛰는 고등어마냥 쌩쌩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883년 조일통상장정과 1889년 조일통어장정 쯤으로 우리 어부들은 기죽지 않았다. 1905년 울릉도 앞바다에서 일본 함대가 침몰했더라면, 우리에게 ‘식민지인’이란 주홍글씨는 새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1910년 조선은 34년 11개월 17일이란 길고도 어두운 ‘강점 터널’ 속으로 처박힌다. 1876년 강제 개항한 지 34년 만이었다.

경주 감포항, 포항 구룡포항, 울릉 도동항은 내년이면 항만 100주년을 맞는다. 100년 전 감포와 구룡포, 도동은 우리네 땅이 아니었다. 동해도 우리 영해가 아니었다. 모두 일제의 것이었다. 이것의 실감나는 조치가 1914년 ‘조계 철폐’였다. 조계를 일제는 ‘외국인 거류지’라 표현했다. 일제 천하에서 외국인 거류지라는 특별 구역은 필요치 않았다. 제국과 식민지, 주인과 식민지인의 구분만 필요했다. 우리는 1876년부터 1914년까지를 대한민국 개항기로 본다. 우리에게 개항은 ‘강제’라는 인식이 강하다. 강제될 땐, 죽변항 살인 사건처럼 저항을 했다.

감포항, 구룡포항, 도동항은 개항이란 표현이 적절치 않다. 3대 항구의 항만사는 일제의 항만사다. 1920년 무렵, 동해엔 저항의 흔적이 없다. 일본인의 행적만이 파편처럼 둥둥 떠다닌다. 우리는 개항사와 항만사를 뭉뚱그려 ‘수탈과 약탈의 역사’라며 일본 탓을 한다. 일본은 ‘조선 근대의 역사’라며 일본 덕이라 한다. 협상 불가능한 감정의 골이다. 그러나 역사는 역사다.

1920년이면 조국은 없고 산하만 있던 이 땅 도처에 일본인이 삶의 뿌리를 깊숙이 내렸다. 1902년 이미 일제는 대한제국의 지세, 인종, 복종, 가옥, 행정, 역사를 상세하게 담은 ‘한국안내’란 책을 자국의 이주민들에게 제공했다. 이 책엔 부산, 인천, 평양, 원산, 군포, 목포, 마산 등 항구도시 정보도 빼곡히 담겼다. 지도까지 첨부해 근대도시 형성과정의 이해를 도왔다. 이런 형편에 1920년 항만 때는 항구와 배를 보호하는 방파제 건설이 그 항구의 위상을 결정지었다.

그런 면에서 감포는 극적인 도시 반전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만큼 항만으로 덕을 본 도시이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항만 개발로 ‘감포가 경주를 먹여 살린다’는 말이 생겨났을까. 감포항엔 경주 갑부 다쯔노 중심의 항만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다쯔노는 기선저인망(일명 데구리)을 2대 갖고, 통조림공장을 운영했다. 또 도평의원(도의원)으로 끗발이 대단했다. 조선총독부가 경북도에 13척의 기선저인망을 허가할 때, 다쯔노가 살던 감포에만 8척을 내주었다. 또 항만 당시 3,000명이었던 감포 인구는 빠르게 증가해 1만9,000명(1937년)에 이르렀다. 읍으로 승격 되려면 1,000명이 모자랐지만, 다쯔노는 경주군 양북면에서 감포리를 떼어 인근 8개 리를 합쳐 읍으로 승격시켰다. 감포항은 동해 남부의 중심 어항으로 우뚝 섰다.

그 영광의 이면에는 조선인들의 땀과 살과 피가 마구 뒤섞여 있다. 신라 왕비가 기도를 하고 태자를 얻어 ‘태자암’이라고도 불리는 감포읍 오유리의 태수바위 아래 뾰족한 비석 하나가 그걸 증거한다. 일제는 비석 가운데 산신(山神)이라고 새겨놓았다. 방파제 공사를 하면서 태수바위를 쪼개 길을 내고, 돌을 옮기는 과정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어느 날부터 울부짖는 소리와 번개와 벼락이 끊이지 않았다. 때론 핏물 같은 비가 하염없이 내렸다. 일제는 산신을 달래 방파제 공사로 죽은 영혼들을 다스린다며 비석을 세웠다. 1926년 7월29일의 일이었다.

구룡포항 항만사엔 앙숙이었던 일본인 두 유지가 극적으로 화해하는 장면이 도드라진다. 1910년대 이미 구룡포에 자리를 잡은 하시모토 젠기치와 도가와 야스브로는 각각 세력을 형성했다. 가가와현 출신의 하시모토 뒤에는 동향의 어민들이, 도가와 뒤에는 타 지역 출신들이 줄을 섰다. 마을이 번창할수록 주도권을 놓고 두 패는 충돌했다. 패싸움까지 벌어져 부상자가 속출하기도 했다. 하시모토와 도가와가 극적으로 손잡은 것은 방파제 건설이란 대공사를 앞두고였다. 두 세력 모두 방파제 건설은 구룡포의 미래요, 사활이 걸린 문제라고 인식했다. 폭풍이 몰아치면 속수무책이었고, 배가 뒤집히고,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다. 이 문제를 해결한다면, 어제의 적도 오늘의 동지가 될 수 있었다. ‘구룡포축항기성동맹회’가 꾸려졌다.

도가와가 회장을, 하시모토가 부회장을 맡았다. 두 유지의 의기투합은 방파제 공사에 탄력을 불어넣었다. ‘가가와현 해외출어사’에 따르면 1921년 1월 공사비 약 3만엔을 투입해 항구 북동쪽에 면적 7,700㎡ 매립 공사를 시작했고, 1922년 3년 사업으로 35만엔을 투입해 먼저 매립해 놓은 항구 북동쪽 용주리부터 방파제를 설치해 나갔다. 공사비는 조선총독부에서 12만엔, 경북도청에서 13만엔을 지원받았고, 나머지 자금은 구룡포읍과 일본인으로부터 조달했다. 182m짜리 방파제 공사가 끝나자 항내 정박이 안정됐고, 부산과 원산, 부산과 울릉도를 오가는 여객선의 중간항구가 됐다. 이때에도 산자락을 잘라 돌을 마련했고, 수많은 조선인이 희생됐다. 도가와는 구룡포공원에 세워진 송덕비로, 하시모토는 그가 죽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 구룡포근대역사관으로 변신해 여태 회자되지만, 희생된 조선인을 추모하고, 넋을 달래주는 이는 그 어디에도 없다.

울릉 도동항엔 구체적인 항만사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1882년 고종이 개척령을 내리고 이듬해 54명이 울릉도로 이주했을 때, 이미 조선인 116명과 일본인 79명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또 1899년 울릉도의 삼림채벌권을 놓고 한ㆍ일ㆍ러 삼국 간 갈등이 벌어졌는데, 일본인의 도벌 행위를 조사하기 위해 원산 주재 외무서기생 다카오 등이 울릉도에 파견됐다. 이때 다카오는 울릉도의 지세, 형세, 일본인 인원과 호수 등을 담은 보고서를 만들었다. 일제는 1905년 2월 독도를 시마네현 관할로 강제 편입할 당시 이 보고서를 무주지 선점 근거 중 하나로 악용했다. 이런 점을 미뤄볼 때, 울릉도의 관문인 도동항의 방파제 건설은 더 큰 이슈로 번번이 덮였을 공산이 크다.

경북도는 1920년 “감포, 구룡포, 도동 등 20개항을 ‘지정항’으로 고시”한 조선총독부의 관보를 항만 100주년 근거로 들고 있다. 경북도는 전문기관에 맡겨 내년 ‘경북동해생활문화총서’를 발간할 예정이다.

심지훈 한국콘텐츠연구원 총괄에디터ㆍ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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