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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꽃보다 말

입력
2019.04.15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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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꽃은 왜 예뻐야 해요?”

첫 봄꽃을 보고자 하는 이들의 산행에 우연히 끼어든 날이었다. 예상보다 길이 험했다. 그늘에는 며칠 전 내린 눈이 녹지 않고 하얗게 남아 있는 곳도 있었다. 솔직히 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아직 쌀쌀맞은 날씨에 귀한 꽃 한 송이 보려고 산에 오를 마음을 낼 정도는 아니다. 그러니 앉은부채, 금괭이눈, 복수초 같은 꽃 이름을 되뇌며 발아래를 살피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꽃은 왜 예뻐야 하냐는 둥 어리석은 질문을 하고 있는 거다.

물론 내 눈에도 꽃은 그냥 예쁘다. 예뻐야 할 이유 같은 건 없다. 꽃의 아름다움은 마치 수학의 공리 같아서, 정의하거나 증명할 필요가 없다. 사물이나 사람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꽃에 기대거나 꽃을 원본으로 삼을 만큼 당연한 것이다. 철학자 시몬 베유는 아름다움은 목적을 품고 있지 않으며, 그 자체로 선할 뿐, 다른 무엇의 수단이 아니라고 했다. 그 말대로라면 벌이나 나비에게 꽃은 아름답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배추나 무를 대할 때처럼 그저 먹음직스럽거나 유익하게 보일 것이다.

벌이나 나비는 아니지만 아름다움에 관한 한, 나는 둔한 사람이다. 젊은 사람이었을 때는 특히나 자연의 아름다움에 관심이 없었다. 내가 유일하게 관심을 둔 것은 언어의 아름다움이었다. 눈앞에서 화르르 피어난 벚꽃보다, “울음 울지 않는 것은 바람에 불려 올라간 검은 비닐봉지, 안 될 줄 알면서도 한번 해보는 것이다 꽃핀 벚나무 가지 사이에 끼어 진짜 새처럼 퍼덕거려 보는 것이다(이성복,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같은 말들이 더 사무쳤다. 때로는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지는 단어의 계단들을 지루하게, 끈질기게 더듬어 오르기를 즐겼다. 그러다가 뒤돌아보면 어느덧 시야가 확연히 바뀌어 있는 청량한 명료함도 사랑했다.

“이건 ‘너도바람꽃’인데, 아직 볕이 따뜻하지 않아서 꽃잎이 닫혀 있는 거예요. 한낮이 되면, 꽃잎이 열려요.” 땅바닥에서 3cm쯤 올라온 엄지손톱만한 꽃망울이다. 분홍이 옅게 비치는 흰 빛을 띠고 있다. 살얼음 가시지 않은 흙 위에 온 힘을 다해 피어난 꽃이 대견한 마음에 ‘너도!’ 라고 불러주었나. 그러나 꽃은 이름이나 사람 마음과는 상관없는 세상에 속해 있다. 그늘 속 흰 꽃은 무연히 바람에 흔들릴 뿐이다. 나 또한 물끄러미, 하염없이 꽃을 바라보고만 싶다.

단어 혹은 이름은 공유하는 기억이며, 거듭된 약속이다. 언어는 마음이 납득할 수 있는 길을 따라가게 되어 있고, 이따금 공유하는 기억의 발판을 박차 오르는 순간도 맞이한다. 언어의 아름다움은 논리와 상징의 공간 어디쯤에 드리워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약속을 무시하고 기억을 배신하는 과정에서 그 모든 것은 쉽게 무너진다. 있는 것을 없다고 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거짓말, 의미를 비틀어 천박한 속셈을 드러내는 억지, 망사레이스 같은 염치조차 벗어던진 벌건 탐욕, 누구든 걸리기만 하면 헐뜯고 짓밟는 조롱의 언어들은 추할 뿐 아니라 소통을 망가뜨린다. 아무 정보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가리키는 실재도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고, 억지는 억지를 낳고, 조롱은 조롱을 낳는다. 그뿐이다. 단 하나, 추한 언어들이 제공하는 유용한 정보가 있기는 하다. 그런 언어를 내뱉은 이들에 대한 것이다. 그들의 정체는 그들의 언어만큼 추하고 공허하다.

언제부터인가 언어의 아름다움은 원본의 아름다움에서 비롯된다고 믿게 되었다. 꽃은 아름답다는 말이 필요 없이 늘 아름답다. 필 때 고요히 피어나고 질 때 고요히 진다. 그늘과 허무의 자리에서 의연하다. 물론 사람 마음으로 들여다보며 하는 말이다. 해석이란 그런 것이다.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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