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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데뷔 김윤석 “섬세한 감수성에 놀랐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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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데뷔 김윤석 “섬세한 감수성에 놀랐다고요?”

입력
2019.04.12 04:40
수정
2019.04.12 13:38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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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데뷔작” 호평 받는 ‘미성년’ 선봬… “가장 나다운 작품”

영화 ‘미성년’으로 감독 데뷔한 김윤석은 “여성 작가와 여성 배우, 여성 스태프들과 상의하면서 네 여성 주인공의 이야기를 만들었다”며 “다같이 공동작업을 하면 좋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쇼박스 제공
영화 ‘미성년’으로 감독 데뷔한 김윤석은 “여성 작가와 여성 배우, 여성 스태프들과 상의하면서 네 여성 주인공의 이야기를 만들었다”며 “다같이 공동작업을 하면 좋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쇼박스 제공

아주 풋풋하다. 쉬 믿지 못하겠지만 정말 그렇다. 연출자 이름을 숨기고 영화 ‘미성년’(11일 개봉)을 보여 줬다면 재능 있는 젊은 신인 감독이 나타났다며 영화계가 들썩였을지 모른다. 나아가 여성주의적 시선도 읽힌다. “어떤 외국인 관계자가 VIP 시사회에서 스태프에게 물어 봤대요. 이 영화 만든 ‘여성 감독’이 신인이냐고요. 그래서 혹시 ‘황해’(2010)를 봤느냐고, 거기서 뼈다귀 들고 나오는 사람 기억하느냐고, 그 배우가 감독이라고 얘기해 줬다더군요.” 최근 서울 삼청동에서 마주한 김윤석(51) 감독이 스크린 밖 에피소드를 들려주며 껄껄 웃었다.

‘배우 김윤석’이 영화감독에 뜻을 품은 건 오래 전이다. 연극 무대에서 활동하던 시절에도 그는 연기와 연출을 겸했다. “스크린에 넘어왔을 때부터 저에게 영화 연출은 막연한 꿈이 아니라 뚜렷한 목표였어요. 연극이든 영화든 인간의 드라마를 다룬다는 건 똑같아요. 다만 메커니즘이 다를 뿐이죠. 묵묵히 지식과 경험을 쌓으면서 때를 기다려 왔고, 그러다 영화라는 매체로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난 겁니다.”

김 감독은 2014년 말 젊은 연극인들의 창작극 시연 무대에서 연극 ‘미성년’을 보게 됐다. 고등학교 2학년 동급생인 두 아이가 서로의 엄마 아빠가 불륜 관계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10대 고교생 시선으로 사건을 바라본다는 게 무척 신선했어요. ‘네 엄마가 우리 아빠 꼬셨잖아’ ‘(불륜 사이를) 어떻게 모르겠냐, 배가 불러오는데’ 같은 대사를 아이들이 주고받으니 웃음이 터지더라고요. 이거다 싶었죠.”

희곡 원작자 이보람 작가와 함께 3년여간 시나리오에 매달렸다. 상업성이 강한 영화는 아니라서 투자에 난항을 겪었다. 제작이 무산될 위기도 여러 번이었다. 영화가 완성돼 관객을 만나기까지 5년 걸렸다. 김 감독은 “그간의 우여곡절을 생각하면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게 기적처럼 느껴진다”며 “투자부터 캐스팅까지 정말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김윤석(왼쪽부터) 감독은 신예 김혜준과 박세진에게서 빼어난 연기를 이끌어냈다.
김윤석(왼쪽부터) 감독은 신예 김혜준과 박세진에게서 빼어난 연기를 이끌어냈다.

주리(김혜준)와 윤아(박세진)는 주리 아빠 대원(김윤석)과 윤아 엄마 미희(김소진) 사이에 아기까지 생긴 상황에서 주리 엄마 영주(염정아)가 모르게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하려 애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어른들은 현실을 회피하고 외면하기만 한다. 영화는 아이들과 어른들의 태도를 대비시키며 미성숙하고 무책임한 기성 세대를 꼬집는다. “원작 연극을 볼 즈음 우리 사회에 무기력한 기운이 팽배했어요. 저 또한 기성 세대로서 책임감을 느끼며 자신을 돌아보게 되더군요. 젊은 세대와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도 했고요.”

감독 데뷔를 준비하는 사이에도 그는 배우로 영화 ‘남한산성’ ‘1987’(2017) ‘암수살인’(2018) 등을 찍었다. 여러 장르에서 선 굵은 연기를 펼쳐 온 그에게 ‘미성년’ 같은 섬세한 감성이 숨겨져 있을 줄은 몰랐다. “그동안 나를 어떻게 본 것이냐”며 웃음 짓던 김 감독은 “내 출연작을 떠올리면 ‘미성년’이 의외다 싶겠지만 가까운 지인들은 ‘정말 김윤석답다’고 말한다”고 했다. “드라마와 캐릭터가 살아 있는 영화를 좋아합니다. 일례로 ‘쇼생크 탈출’(1995)은 열 번 봐도 재미있잖아요. 그 힘은 기교가 아니라 드라마에 있다고 봅니다. 내 능력만큼, 기교 부리지 않고, 진정성을 담으려고 했습니다.”

김 감독은 “배우들의 연기가 최고의 무기”라고 자신했다. 염정아와 김소진은 예전부터 눈여겨본 배우들이었고, 김혜준과 박세진은 3차례 오디션으로 뽑았다. “어떤 사건을 극복해 가는 인간의 모습을 배우의 표정으로 담아내고 싶었어요. 배우들이 마치 피가 배어 나올 듯이 자기의 피부 속을 다 드러내 인물에 다가가는 연기를 보여 줬어요. 눈꺼풀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연기하는 모습에 전율한 적도 많았습니다.”

김윤석 감독은 염정아(왼쪽)와 김소진을 캐스팅하며 “중견 여성 배우들이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지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쇼박스 제공
김윤석 감독은 염정아(왼쪽)와 김소진을 캐스팅하며 “중견 여성 배우들이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지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쇼박스 제공

배우를 가장 잘 아는 건 배우다. 김 감독의 빼어난 연출이 증명한다. 카메라는 관객과 같은 눈높이를 줄곧 유지하면서 클로즈업으로 배우의 얼굴을 담아내 관객이 인물의 내면에 몰입하도록 이끈다. 서로 적대 관계인 네 여성 주인공 사이에 감도는 미묘한 연대감과 유대감이 자연스럽게 설득되는 이유다. “그들은 현실을 피하지 않고 용기 있게 만났어요. 그러면 연대감이 생기죠. 저는 그게 동지애, 전우애 같아요. 서로 만나야만 분노가 긍정적인 에너지로 발전해요. 피하면 증오만 쌓일 뿐이죠. 나이 먹었다고 다 성년이 아니에요. 마음을 열고 손을 내밀 줄 아는 용기와 실천력이 있어야 성년이죠.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영화를 만든 겁니다.”

‘미성년’에 ‘올해의 데뷔작’이라는 호평이 쏟아지고 있다. 김 감독의 차기작이 벌써 궁금해진다. 그는 “평범한 사람의 비범한 순간을 다룬 영화를 계속 만들고 싶다”고 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또 다시 문서 파일에서 깜박거리는 커서를 무수히 마주하며 창작의 고통을 견뎌 낼 것이다. 김 감독은 “연극은 훨씬 더 어려운 과정을 거쳐 무대에 올려진다”며 “그 시간이 몸에 배 있기에 쉽게 무너지거나 좌절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 심정이 어떠냐고들 물어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데뷔작이 은퇴작이 될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해 왔듯 묵묵히 뚜벅뚜벅 성실하게 작업을 해 나가고 싶습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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