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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뚤빼뚤 서툴지만 살맛 나” 노년에 글 배우는 순천 할머니들의 그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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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뚤빼뚤 서툴지만 살맛 나” 노년에 글 배우는 순천 할머니들의 그림일기

입력
2019.02.06 17:10
수정
2019.02.06 18:4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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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남 할머니가 그린 새. 남해의봄날 제공.
김명남 할머니가 그린 새. 남해의봄날 제공.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빛깔이 이름 모를 새의 깃털과 꼬리를 물들인다. 파란색 지붕 밑에서 모이를 주워 먹는 노란 병아리, 앙증맞게 뛰어다니는 주황색 토끼도 알록달록하다. 천진난만한 유치원생 아이들의 그림인가 봤더니, 나이 지긋한 할머니들의 그림일기다. 사인펜 크레파스 색연필을 돌려 쓰며 정성스레 색을 덧입히니 그림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기가 솟고, 따스한 기운이 절로 감돈다.

작품의 주인공은 전남 순천 지역의 할머니들 20명. 제일 ‘어린’ 56세 막내부터 아흔을 바라보는 맏언니(88세)까지 2016년부터 순천시 평생학습관 한글작문교실 초등반에서 공부를 시작해,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이 됐다. 학교에서 이들은 ‘순천 소녀시대’로 불린다.

한평생 까막눈으로 살았던 할머니들은 연필을 잡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손이 떨린다며 선을 긋는 것도 힘들어 했고, “그림은 한 번도 그려 본 적 없다”고 손사래 치며 한사코 펜 들기를 거부했다. 할머니들에게 글을 가르쳤던 김순자씨는 “글을 모른다는 사실이 들통날까 봐 불안에 떨고 흰 종이만 봐도 겁을 냈던 분들이었다”며 “처음에는 글 공부보다는 어르신들의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듣는 데 더 많이 집중했다”고 말했다. 굳게 닫혔던 할머니들의 마음이 열리니 한평생 묻어둔 가슴속의 한이 쏟아져 나왔다.

권정자 할머니가 그린 마당의 나무와 꽃. 남해의봄날 제공.
권정자 할머니가 그린 마당의 나무와 꽃. 남해의봄날 제공.

화사한 색감의 그림과 달리, 글에는 저마다 가슴 찡한 사연들이 녹아 있다. 가난해서, 여자라는 이유로 학교 근처에도 가 보지도 못했던 어린 시절, 얼굴 한 번 보고 결혼한 술주정뱅이 남편 시중 들고, 아이들 뒷바라지하느라 내 몸 아픈 줄도 모르고 살았던 모진 세월을 한 줄 한 줄 담담하게 써내려 간다.

할머니들에게 가장 서럽고 후회되는 일은 글을 쓰지도 읽지도 못해 평생 주눅 들었던 삶 그 자체였다. “동네 사람들이 언제 관광을 가면 좋겠냐고 묻는데 글을 몰라 대충 손으로 달력을 짚었는데 어찌나 가슴이 벌렁벌렁하던지. 시아버지는 나보고 글을 몰라 앞으로 어찌 살 거냐고 걱정만 했습니다.” 이제 남의 도움 없이도 이름과 주소를 쓰고, 간판도 읽을 수 있게 된 할머니들은 은행에 가서 비밀 통장도 만들고, 자녀와 손주들에게 하루에도 수십 번 휴대폰 문자를 보낸다.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권정자 외 19명 지음 

 남해의봄날ㆍ192쪽ㆍ1만8000원 

할머니들은 무엇보다 잃어버린 나를 찾게 된 게 너무 짜릿하다고 행복해했다. 젊은 시절 이미자보다 노래를 잘했다는 손경애 할머니(68)는 이제는 건강이 좋지 않아 노래 한 곡 부르는 것도 숨이 차다. 하지만 그림에선 신나게 무대를 뛰어다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소박하게나마 꿈을 이뤘다. 할머니들은 그간 작업한 그림일기를 모아 지난해 3월 서울에서 첫 전시회 ‘그려보니 솔찬히(‘제법’이란 뜻의 전라도 사투리) 좋구만’을 열었고, 올해는 세계 최대 아동 도서 전시회인 이탈리아 볼로냐 북페어를 비롯해 미국 뉴욕 등지에서 전시가 예정돼 있다.

안안심 할머니의 작품. 남해의봄날 제공.
안안심 할머니의 작품. 남해의봄날 제공.

어엿한 작가와 화가로 거듭난 할머니들은 책 말미에 남은 여생 작품활동에 대한 당찬 포부도 잊지 않았다. “글 공부를 하면서 우울증도 사라졌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도 새로운 것이 자꾸 떠올라 내가 화가가 된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합니다(김유례 할머니ㆍ56).” “나는 지금이 내 인생에서 최고의 행복인 것 같습니다(김명남 할머니ㆍ71).”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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