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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의 제5원소] 질문할 권리, 질문할 의무

입력
2019.01.23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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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전능한 신에게 딱 세 개의 질문만 던질 수 있다면 당신은 무슨 질문을 하고 싶은가? “요즘 먹고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들어요?”, “저는 몇 살까지 사나요?”, “호모 사피엔스 같은 끔찍한 종을 대체 왜 만드셨나요?” 생활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도 이렇게 묻고 싶다. 물리학을 연구하는 직업인으로서 묻는다면 질문의 내용이 훨씬 딱딱해질 것 같다. 암흑에너지의 실체가 무엇인지, 빅뱅은 대체 어떻게 한 건지, 이 우주는 왜 이 모양 이 꼴인지, 등등. 천하의 아인슈타인은 한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정말로 관심이 있는 것은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할 때 어떤 선택의 여지가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아마도 아인슈타인에게 기회가 있었다면 이렇게 물어봤을 것 같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우주를 만든 거요?”

시대를 이끌었던 과학자들은 좋은 질문을 던진 사람들이었다.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이를 통해 새로운 방향이 제시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열리기 때문이다. 좋은 질문이 세상을 바꾼다. 과학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유명한 질문의 긍정적인 효과를 최근 우리 모두 목격했다. 아예 질문 자체가 직업인 사람들도 있다. 바로 기자이다. 기자는 묻는 것이 직업인 사람이다. 좋은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진실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기자와 과학자는 닮았다.

질문하는 사람으로서의 기자라는 직업을 인정하더라도 일반인들과 기자 사이에는 여전히 큰 시각차가 있는 것 같다. 최근 논란이 됐던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만 해도 그렇다. 대통령에게 경제정책의 기조를 바꾸지 않는 자신감의 근거를 묻는 기자를 바라보는 일반 국민의 반응 중에는 너무 무례하다거나 질문의 기본이 안 돼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반면 언론계에서는 전반적으로 기자가 그럴 수도 있지, 라는 반응이 많아 보인다. jtbc 뉴스룸의 손석희 앵커는 지난 정부 시절과 비교했을 때 권위주의 정부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장면으로 볼 수도 있겠다고 논평했다. 손석희 앵커의 논평은 선의에서 나왔겠지만 지난 시절 언론의 검은 역사를 단지 ‘권위주의 정부’ 탓으로만 치부할 우려도 내포하고 있다. 국민들의 뇌리에는 박근혜 대통령 앞에서 한 마디도 못한 채 공손한 모습으로 미소만 짓고 있던 기자들의 모습,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일부러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의 기회를 주었음에도 끝내 침묵을 지키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후자의 사례도 과연 오바마 정부가 ‘권위주의 정부’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인지 의문이다.

일반인과 언론인의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어쭙잖게 추정해 보자면, 질문하는 사람으로서의 기자라는 정의에서 당사자들은 질문을 일종의 특권으로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대통령이든 재벌총수든, 절대군주나 황제, 아니 전지전능한 신이라 하더라도 나는 내가 궁금한 것을 바로바로 물을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기자이니까, 라는 생각. 본인 의지에 따른 그런 능력은 곧 권력이다. 이 시각에서 보자면 기자가 대통령한테 좀 불편한, 또는 무례한 질문을 할 ‘특권’이 뭐가 잘못되었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적 공기로서의 언론의 사명을 생각한다면 기자의 질문행위는 권리가 아닌 의무에 가깝다. 자신이 묻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묻는 게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을 대신해서 국민들이 꼭 묻고 싶은 질문, 즉 공익적인 질문을 대신 던지는 것이 기자의 소임이다. 질문하는 직업인으로서의 기자라면 질문의 대가로 정치적인 억압이나 온갖 핍박이 가해지더라도 이를 무릅쓰고 필요한 질문을 꼭 해야만 한다. 그게 기자다. 그래서 기자의 질문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여야 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꼭 던져야 했던 중요한 질문들, 80년 광주의 발포책임자는 누구인가, 박종철은 왜 죽었는가, IMF 사태는 왜 터졌나, 다스는 누구 것인가, 삼성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을 권력에 맞서 용기 있게 제때 던졌는지, 또 그 답을 듣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혹시나 질문하는 ‘특권’을 발휘해 입을 다물거나 엉뚱한 질문을 하지는 않았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의무가 특권으로 전화되면 정략적인 판단이 개입하기 쉽다. 범죄행위를 기소할 의무가, 법에 따라 유죄를 판결해야 할 의무가 특권으로 바뀐다면 ‘네 편’에겐 더 엄격하게 적용하고 ‘내 편’에겐 그 특권을 포기할 마음이 샘솟지 않겠는가. 권력의 제4부라는 언론도 크게 다르지 않다. 몇몇 유력언론의 질문은 오로지 하나, 어떻게 문재인 정부를 망하게 할 것인가라는 정략적인 질문에만 집중돼 있는 것 같다. 최저임금이든, 부동산이든, 간장게장이든, 판문점이든, 목포든, 그 무엇이라도 행여 그렇게 나라가 망한다는 결론에만 끼워맞추는 건 아닌지, 이러다 정말로 나라를 망하게 하지는 않을지 걱정이다. 나라가 망해야만 사는 사람들, 그래서 실제로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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